[시평 210] 독일 공산당 해산, 통진당 해산의 전례가 될 수 없다

 

[시민정치시평 210]

 

독일 공산당 해산, 통진당 해산의 전례가 될 수 없다

: ‘용북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

 

홍윤기 동국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대통령 선거에서 저지른 부정행위를 덮기 위해 국정원, 법무부, 새누리당이 합주해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정쟁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누리당은 앞으로 종북성 여부를 기준으로 정당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도 해산할 수 있는 입법을 추진한다고 한다. 이제 ‘종북(從北)주의’는 북한 담론을 지렛대로 삼아 대한민국 정치판과 국민 생활을 전체주의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보수우파 정권이 휘두르는 ‘용북(用北)주의’의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 잡을 기세다.

 

이런 종북주의 제압의 주요한 전례로 법무부는 과거 분단시대 서독에서 단행되었던 독일공산당 해산을 비중 있게 검토하는 모양이다. 만약 그렇다면 필자는 그런 일일랑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다. 왜냐하면, 서독의 아데나워 정권이 감행했던 독일공산당 해산은 반공 콤플렉스를 이용해 반대파를 제압하려다가 전후 독일에서 막 자리 잡아가던 민주주의 정치문화의 분위기만 경색시키고 결국은 독일공산당의 사실상 재창당으로 끝난, 실패한 정략의 대표적 전례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진보당 해산 시도는 종북주의를 이용하려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날 용북주의의 사례가 될 공산이 크다. 독일공산당 해산의 전말을 살펴보면 그 사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1956년 8월 서독 정부가 연방헌법재판소의 의결로 단행한 독일공산당 해산보다 5년 전에 독일은 ‘사회주의제국당(SRP)’이라는 정당을 해산한 적이 있었다. 이 정당은 전후 서독의 민주주의 공간에서 과거 친위대와 독일군 출신들이 모여 합법적 절차에 따라 나치즘을 계승할 것을 표방한 나치당의 후속정당이었다. 나치 패망 후 6년이 채 안 된 시점에 창당된 이 당은 북부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는 25%가 넘는 득표율을 올려 어떤 동네는 아예 나치 깃발이 다시 휘날릴 정도였다. 인접국과 점령군이 경악을 금치 못한 가운데 당시 아데나워 정부는 1951년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을 신청하였는데, 서독 헌재는 1년 반의 심리를 거쳐 해산, 자산몰수 및 후속 내지 대체 정당의 금지를 선고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독일 국내외의 어떤 정치세력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데나워 정부는 이 나치 계승정당에 이어 당시 연합국 점령군 모두에게서 활동 인가를 받은 독일공산당(KPD)에 대해서도 정당해산을 신청하였다. 그런데 앞의 사회주의제국당의 경우와는 달리 당시 서독 헌재는 한 차례의 구두심리만 진행하고 거의 5년 동안 평결을 미루었다. 독일공산당의 국제적 후원자였던 소련이 연합국 점령군의 강력한 일원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은 서독 헌재의 초대 소장이었던 헤르만 회프코-아쇼프가 독일공산당의 해산을 공공연하게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독의 3대 기간정당 중 하나였던 자유민주당(FDP)의 중앙위원이었는데, 독일연방은행의 정치적 독립을 확립한 재정전문가로서 독일 재정정책의 근간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거물급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다. 이런 그의 정치적 비중 때문에 전후 서독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행사했던 아데나워조차도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당해산을 강행할 수 없었다.

 

이런 그가 1954년 사망하고 2기 헌재가 구성되면서 아데나워 정부는 사실상 기각 상태에 있던 독일공산당 해산안을 재개하도록 헌재의 심리 규정을 개정하고, 재판소장에는 보수우파 성향의 요셉 빈트리히를 임명하도록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독일공산당 해산안 심의는 급물살을 타고, 1956년 8월 서독 헌재는 독일공산당의 해산을 선고하였다. 그런데 이 때 제시된 서독 헌재의 평결은 법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해산 판결의 요지는 독일공산당의 강령이 서독기본법에서 규정하는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기본법에서 독일 국가질서의 최고 원칙인 이 규정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려면, “현존하는 질서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 질서를 계획적으로(planvoll) 침해하여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 질서를 제거하려는 의도와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헌법침해의 의도가 조속한 시일 안에 당장 실현된다는 전망이 거의 없더라도”, 단지 그런 의도를 단지 표방하는 것만으로도 “헌법에 위배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 해석에 따르면 독일공산당이 정강에 명시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발전 노선’은 곧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거쳐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사회질서를 수립’할 의도를 공표한 것으로 단정하고, 바로 이 노선이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최고원칙으로 하는 독일기본법과 합치할 수 없다고 평결하였다. 이에 따라 ‘아데나워 체제의 혁명적 전복’을 명시한 당시 독일공산당의 정당강령은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현격하게 제한하는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하는 ‘문서적’ 증거로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 평결이 내려지기 전인 1956년 2월 독일공산당은 한 달 전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천명한 탈스탈린 정책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노선을 정강에서 삭제하고 의회민주주의적 방식에 따른 평화적 정권 수립을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이런 자체 변화의 노력은 서독 헌재의 평결에서 무시되었다.

 

서독 헌재의 선고에 의해 정당해산이 강행되면서, 그 조처의 정당성에 대해 사방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법리적으로 독일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 폭력 혁명을 계획적으로 수행하려고 했다는 증거의 부족(Beweisnot)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단지 언행으로 그런 의도를 표명한 것이 형사처벌의 일반적 기준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정치적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공산당 해산 조치를 받아내기 위해 당시 아데나워 정부는 연방헌법재판소의 심의 규정까지 개정하는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압력은 공산당을 의회정치 전통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던 서유럽 우방국들로부터 밀려들었다. 서유럽 정치판에서 서독은 유일하게 공산당을 허용하지 못하는 정치적 미성숙자라는 질시를 받았고, 아데나워 정부가 이끄는 서독의 국가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유권자 5.7%의 지지율로 초대 연방의회에 진출했던 독일공산당은 동독의 지배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과 연계하여 소련의 하수인으로 활동하는 정치적 행태로 인해 2대 총선에서는 원내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런데 그 어떤 무장 봉기나 폭력 행사의 계획이나 실행의 흔적이 없는 독일공산당을 상대로 이런 무리를 무릅쓰고 정당해산을 강행한 아데나워 정부의 진정한 의도는 독일공산당의 반헌법성 여부보다는 1950년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 창설을 전후하여 독일 정부에서 추진한 독일 재무장 계획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서 독일공산당이 의회에서의 비중을 넘어서는 활동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독일공산당이 중요한 활동분자로 활약한 이 평화운동은 당시 900만 명의 서명을 모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바로 이런 평화운동의 주동세력 중 하나인 독일공산당을 해산함으로써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반대 시민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재무장이 강행되었다. 그러면서 독일의 재무장에 반대하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연방호헌청(BVS)에 의해 무차별 사찰이 행해졌다. 그 가운데는 후에 사회민주당(사민당)과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연립정부에서 법무장관이 되었다가 연방대통령으로 선출된 구스타프 하이네만도 있었다.

 

의회정치 측면에서 이미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독일공산당은 정당해산 조치를 당하면서 7000~1만 명에 달하는 당원들이 단지 공직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직장에서 추방되었다. 이 중 상당수는 증거부족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언행이나 공산당과의 연계가 문제되어 실직당하고, 심지어 구금되거나 수감되었다. 독일 사회에도 거의 미국의 매카시즘에 준하는 반공 히스테리가 휩쓸었고 시민생활의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즉 공산당의 정강에 나온 ‘가상적 반헌법성’을 근거로 단행한 정당해산은 독일이 추구하는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현실적으로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1968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된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 정권은 사실상 독일공산당의 재창당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빌리 브란트의 ‘사민-자민’ 연립 정부가 독일공산당의 합법화를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데에는 가열되는 냉전 상황에서 독일이 취할 길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서독의 재무장에 이어 1970년대부터 미국의 핵무기가 서독으로 반입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전쟁의 최전선이 독일 땅에서 전개될 확률이 점차 높아졌다.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서독의 번영을 지켜내려면 어떤 형태로든 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해야 했다.

 

독일판 신뢰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대변되는 동유럽 적대 진영에 먼저 나를 신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독이 먼저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신뢰를 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까이해서 변화시킨다(Veranderung durch Annahrung)”는 원칙은 이쪽이 먼저 상대방에게 문을 열어 상대방이 나에게 들어오기 편하도록 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럴 때 상대방의 가치에 대한 개방의 성의를 보이면서 상대방의 개방을 유도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독일공산당의 합법화는 서방 세계의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 안에서도 공산주의를 평화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물론 서방세계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의 가치수준 이상으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민주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공동의 가치가 된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성숙한 민주주의’는 동유럽의 ‘국가독점 사회주의’와 ‘일당지배 인민민주주의’를 현상에서 인정하면서 상호 공존할 정치적 용량을 갖고 있었다.

 

서독은 독일공산당 금지 조처를 선도적으로 해제하면서 독일공산당이 동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것까지도 인내했다. 물론 그 과정은 세세히 관찰되었다. 하지만 서독판 국정원인 연방호헌청(BVS)과 연방수사청(BKA)은 자신들이 충분히 확보하고 조정하는 상대방의 내부 정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서투른 짓 따위는 아예 하지 않았다. 정보부 본연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이지 양지를 지향하는 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필자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독일공산당을 사실상 합법화함으로써 그것이 곧 독일공산당의 정치적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독일공산당의 이런 정치적 쇠망이 법적인 강제해산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해산 조치를 되돌린 이후 참여가 허용된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 속에서 자멸했다는 데 있다. 독일공산당에 대한 법적ㆍ정치적 제압이 아니라 서독의 ‘성숙한 민주주의’야말로 독일공산당으로 하여금 독일의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기본질서’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오롯이 지키면서도 스스로 정치적 수명을 다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반성에 의거하여 필자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조처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아주 중요한 핵심문제는 대한민국 헌법에 반한다고 단정된 통합진보당의 반국가적(?) 종북성이 아니라, 우리 국가의 반민주적 이탈, 민주주의 정치의 미성숙 상태다. 지금과 엇비슷했던 독일공산당 해산의 역사를 보면 당시 독일공산당과 비슷한 모양새로 간주되고 있는 한국의 통합진보당 문제에 우리 대한민국이 취할 방안의 윤곽이 잡히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반대자의 색출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넓은 복지를 통해 반대자도 포용하는 것이 아닐까.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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