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8월 2014-08-04   1951

[통인] 삼성이 알면 깜짝 놀랄 이야기

삼성이 알면 깜짝 놀랄 이야기

곽형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장 직무대행

박상규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4년 8월호 (통권 213호)

‘학교다닐 때 싸움 좀 했겠군.’ 그를 보자마자 혼잣말을 했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머리는 짧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구릿빛이었다. ‘주먹’을 떠올리게 하는 육체. 괜한 유인구는 통하지 않을 듯했다. 정면돌파 외에 길은 없었다.

나이는? “1975년생입니다” 

마흔인데, 그 나이에 거리에서 싸우고 있을 거라 예상했나요? “전혀”

솔직히 말합시다. 학교 다닐 때 싸움 좀 했죠? “아니요.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학생들끼리 싸울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아무튼 대체로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저음의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시비 걸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 그럼 글로벌 기업 삼성이 먼저 싸움을 걸었단 말인가. 그는 삼성과 싸웠다. 가족까지 말린 결전이었다. 약 1년 걸린 싸움. 그동안 누군가는 죽고 다쳤다. 끝내 그는 이겼다.?물론 곽형수 지회장 직무대행 혼자 싸운 건 아니다. 그가 말한대로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꿨기에’ 승리한 싸움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는 사측과 지난 6월 말 기준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삼성에서 노동조합이 인정된 셈이다. 경총이 협상 대리인으로 나섰지만, 삼성의 ‘무노조 경영 76년’ 역사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이다.?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삼성을 이겼을까. 곽형수 지회장 직무대행에게 싸움의 전사와 이후를 가늠해 봤다. 그를 지난 7월 17일 서울 정동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어린 시설, 나이 마흔이면 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의 꿈은 다 비슷하잖아요. 대통령, 의사, 변호사… 공무원 집안이에요. 외가는 군인, 친가는 경찰. 이렇게 삼성과 싸울 거라 전혀 생각 못했죠.

집에서 충돌이 있었겠네요?

거의 담 쌓았습니다.

언제부터요?

부산 내려갈 때부터 쌓았는데, 이번 싸움으로 더 쌓였죠.

왜 부산으로 갔어요?

집에서 가장 먼 곳이 부산이니까요. 서른 초반에 갔으니까 9년 됐네요. 그전엔 계속 인천에서 살았어요.

왜 집에서 가장 멀리 가고 싶었어요?

(그는 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위니아만도 공장에 다니다가 사표를 냈더니 AS애프터서비스 일을 해보라고 제안하더군요. 서비스 일을 해보니, 체질에 맞더라고요. 당시 수수료 체계는 8:2였어요. 고객에게 1만원 받으면 8천원이 내꺼였죠. 그런데 갑자기 6.5:3.5로 바꾸더라고요. 당시 일하던 서비스센터 사람들과 항의해서 8:2로 다시 돌렸죠. 그 뒤 회사와 관계가 껄끄러워져서 나왔죠. 삼성에서 오라는 제안도 있었고.

삼성에는 언제 입사했어요?

2009년.

서른 초반에 만도위니아 다녔으면… 그전엔 뭐 했어요?

직업 군인으로 해군에서 일했어요. 기술직이어서 기계 만지고 참 좋았는데……. 제가 매여 있는 걸 싫어하나봐요. 배 탈 땐 좋았는데, 육상 생활하면서 군에서 나왔죠.

삼성에 입사할 땐 기대가 컸겠네요.

네…….  그… 그렇죠(그는 창밖을 보면서 뜸을 들였다). 입사 두세 달 만에 실망했지만.?

실망한 계기는?

삼성서비스하면 ‘1등’이 떠오르잖아요. 만도위니아 있을 때도 ‘삼성은 대우가 좋다’ 뭐 그런 이야길 많이 들었고. 근데 와서 보니까 안 좋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뭐가 그렇게 안 좋았어요?

임금의 불투명성. 만도에서 일할 땐 임금체계가 단순했어요. 얼만큼 일해서 내가 얼마를 버는지 알죠. 근데 삼성에서는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임금항목을 하나로 묶는 GMS통합수수료 프로그램이 있는데, 2012년부터 여기에 모든 걸 녹이기 시작했어요.

녹인다?

장거리 서비스, 시간외 수당 등을 구분해서 엔지니어 기사에게 줘야 하는데, 통합수수료 체계로 ‘녹여’ 버리는 거죠. 그래서 구체적인 항목 등을 따지면 회사는 ‘녹아 있어서 우린 모른다’고 해요.

그럼 임금으로 얼마를 받았어요?

저는 좀 벌었어요. 반품전담 공동 회장을 했고, 기사들 교육하러 다니기도 했으니까요. 보통 기사들보다 많이 벌었죠.

원래 기술이 좋았나봐요.

아니요. 손기술도, 발기술도 없어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계속 파고드는 성격이에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다른 건 눈에 잘 안 보여요. 그래서 공부하고 그랬죠.

그럼에도 불투명한 임금 때문에 삼성에 대한 마음이 돌아섰나요?

예, 그만두겠다고도 말했죠. (임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불합리하니까.

하지만 계속 다녔네요.

당시 사장이 잡았어요.

그때 안 나간 걸 후회하나요?

아니요. 그때 나갔으면 이런 의미 있는 순간에, 이렇게 의미 있는 곳에 없었겠죠. 남은 게 운명 아니었을까요?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밖에서 보면 삼성은 상당히 잘 포장돼 있잖아요. 일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말도 ‘삼성에서 일하니 돈 많이 벌겠어요’, ‘삼성은 실적 좋으니 보너스도 많이 받겠어요’, ‘일은 빡세도 대우는 좋죠’예요. 소비자의 70~80%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청 업체에 근무합니다’라는 말을 못했어요. CMI고객만족평가제도에서 그렇게 말한 게 드러나면 시말서 등을 써야 했죠. 그런데 지금은 솔직해질 수 있잖아요. ‘삼성 옷을 입었지만 하청업체에서 일한다’, ‘대우가 안 좋다’고 말할 수 있고. 그전엔 자기 스스로를 속이면서 일한 거죠.

그는 싸움 속에서 많은 걸 배운 듯했다. 말이 길게 이어졌다

비정규직이라 노동조건과 임금이 불투명하고 회사가 근로기준법도 안 지키는데, 입에 풀칠하기 바빠 묵인하고 살았죠. 삼성은 노조에 대해 안 좋게 교육해요. 노동언어도 다른 언어로 바꿔요. 노사협의회는 GWPGreat work place협의회, 연월차수당은  리플래시refresh 수당 등으로. 저도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 일조한 셈이죠. 그동안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지 못했으니까.?

노조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 ‘삼성은 절대 노조 인정 안 한다’, ‘그러다 찍히면 다른 곳에서도 일 못한다’ 등의 협박이 난무했죠. 그럼에도 책임감을 느꼈어요. 우리가 시도조차 안 하면 무노조경영의 정당함을 인정하는 거니까.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이어서 고민이 컸죠. 그때 ‘말하지 않아야 할 때 말하는 건 작은 죄요,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큰 죄다’라는 정조의 말을 누군가 문자로 보내주더군요. 잘못된 걸 바로 잡아야 한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죠.

참여사회 2014년 8월호 (통권 213호)

6월30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진행된 염호석 열사 영결식. 

두려움도 컸을 텐데요.

제가 결정하기 전에는 복잡한데, 결정하면 단순해져요.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내는 ‘내가 말린다고 안 할 거 아니지? 이미 한다고 마음 먹은 것 같은데, 그러면 말리는 것보다 도와주는 게 좋겠지?’라고 말했어요. 큰힘이 됐죠. 본사 직원들하고도 친했는데, 그러더라고요. ‘얼마 못 갈 텐데, 버틸 수 있겠어?’

뭐라고 대답했어요?

대답 안 했어요. 강하게 부정하는 게 변명 같아서. 그냥 (결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면 스스로 포기할 수 있죠. 하지만 주저함 때문에 못하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 최선을 다해 보자 했죠.

원래 ‘정의로운’ 성격이었나요?

에이… (웃음) 그렇게 이야길 하면 좀 그렇고요. 그냥 불합리한 건 못 참았어요.

결국 삼성의 불합리함이 지금을 만든 거네요?

불합리함을 느끼면 혼자 삭히지 않고, 책임자에게 따지는 스타일이에요. 만도에서도 그랬고, 삼성에서도 불합리하면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나는 조건이 조금씩 좋아졌어요. 돈도 더 올려주고.

좋았겠네요??

그런데 노조하기 전에는 나한테만 통하는 거잖아요. 누군가는 피해를 볼 텐데.

강남 삼성 본관 앞에서 약 40일 동안 노숙투쟁을 했는데, 씻는 게 가장 힘들었나요?

조합원들은 그랬을 거예요. 잠자리, 모기, 씻는 일 다 힘들었겠죠. 저는 대오를 유지하고 끌고나가 (임금단체협약) 체결해야 하니까, 중압감이 엄청났어요. 씻는 거에 불편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죠. 토요일에 집에 갔다가 월요일에 다시 모이는 투쟁이었는데, 과연 조합원들이 다시 올까, 그런 걱정을 했으니까요.

사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예요.

우리 투쟁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노동조합 탄압에 항거하다가 먼저 떠난 열사에 대한 의리, 주변 동료에 대한 의리, 불합리하고 탐욕적인 자본에 대한 분노, 일하면 할수록 더 힘들어지는 ‘거꾸로 가는 세상’에 대한 분노, 이런 게 투쟁을 이끌어 갔다고 봐요. 돈 때문이었다면 옛날에 포기했을 겁니다.

화장실에 가면 이런 말이 적혀 있잖아요. ‘한 명이 꾸면 꿈이지만, 여러 명이 꾸면 현실이 된다’. 조합원들이 같은 꿈을 꾼 거죠. 금속노조 등 다른 단체와 시민들도 큰 도움이 됐고요. 삼성에서 봤을 때 ‘얘네들은 물러나지 않겠구나’하는 판단이 들어 임단협을 체결했겠죠. 삼성은 우리와 임단협 맺는 게 ‘굴욕’이고, 우린 임단협 자체가 ‘영광’이죠. ‘무노조 경영 76년’ 신화가 깨진 거니까. 삼성에서 민주노조의 발판이 마련됐으니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죠.?

참여사회 2014년 8월호 (통권 213호)

금속노조를 비롯해 수많은 연대 단체들의 도움이 이 투쟁을 이렇게 끌고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노동조합은 사람의 마음을 안아주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1년 간의 투쟁 과정을 통해 느꼈습니다. 같이 힘들어하고 같이 슬퍼했고, 같이 승리한 조합원들에게 감사하단 말 전하고 싶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삼성이 변할까요?

삼성은 안 변할 거예요. 세 살 버릇 여든 가잖아요. 무노조 경영이 체화된 조직인데, 단번에 깨질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어쨌든 노동조합은 ‘쪽수’죠. 조직사업을 해야죠. 내년에는 조합원 수를 최소 지금보다 두 배 늘려야 삼성을 또 ‘굴복’시키겠죠. 미조직 센터 찾아다면서 기사들 만나고 1인시위도 해야죠. 삼성의 폐쇄적인 환경을 생각하면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기사들도 많을 거예요. 빨리 돌아다니면서 조직해야 하는데……. 좀 급합니다.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것도 ‘불합리함’으로 생각하는 걸까? 곽형수 부지회장은 자신들의 성과를 포장하거나 그럴 듯하게 말하지 않았다. 좀 멋있는 말은 ‘누군가 보내준 메시지’,  ‘화장실에서 본 글’이라고 꼭 출처를 밝혔다.?여전히 무노조 경영 신화를 꿈꿀 삼성 오너 일가와 경영진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하나 전하며 끝내야겠다. 곽형수 스타일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 출처는 물론 ‘곽형수의 입’이다.?

언론에서 ‘임단협 타결될 듯’이라는 보도가 나올 때부터였어요. 40일 노숙투쟁하는 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삼성 본사 직원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와 ‘축하합니다’, ‘단협 생기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하는 거예요. 고화질 CCTV가 24시간 감시하는 곳이고, 괜히 우리에게 말 걸다가 피해 볼 수도 있거든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그곳에선 엄청 어려워요.?그 사람들도 우리 투쟁을 지켜봤다는 거잖아요. ‘더운 여름에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도 했을 테고, 낮에는 집회 때문에 시끄럽기도 했을 텐데……. 그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으니까 만감이 교차했어요. 계속 열심히 하면 삼성도 바뀔 수 있겠구나 싶어요. 이제 시작이고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싶습니다. 


박상규

오마이뉴스 기자. 단언컨대, 서른이 될 때까지 ‘기자’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거의 10년 동안 일했다. 너무 오래 일했다. 곧 세계여행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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