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73] 서민증세라는 이름의 정치적 도박

 

[시민정치시평 273]

 

서민증세라는 이름의 정치적 도박

: 도박의 승률은 1보다 클 수 없다

 

신원기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간사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바퀴라면, 인류 최악의 발명품은 도박이다.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운만으로 일확천금이 가능하고, 그 치명적인 중독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 통념상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상 거의 모든 나라에서 도박을 금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박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데에 성공한 나라는 없었다. 아마도 인류 모두가 성인군자가 되거나, 멸망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도박의 정의와 원칙, 그리고 정치에서 도박

 

가장 넓은 범위에서 도박의 정의는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불확실성은 인간의 일상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사회·경제·개인적 생활에 내재되어 있으며 때로는 지배한다. 불확실성은 불안함을 유발하지만 도박에서 불안함은 미묘한 쾌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최소한의 투자(두뇌 활동)로 최대한의 결과(화폐)를 얻을 수 있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세상 어떤 것도 도박이 될 수 있다. 획득하는 대가의 크기가 클수록 쾌감의 크기 역시 비례하는데, 그 쾌감이 커질수록 흘리는 땀에 걸맞은 대가의 획득이라는 정상적인 근로 관념을 희미하게 만든다.

 

개인적 도박은 불법이지만 정치에서 도박은 어떨까. 2010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서울시의 무상 급식 시행 여부에 대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복지의 탈을 씌워 앞세우는 어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정책도 거부한다”고 밝히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민 투표와 시장직을 연계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등극, 차기 대선 주자 레이스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복안이었지만 여론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정치적 파산 선고를 맞았다. 이처럼 정치에서 도박이란 ‘불리한 줄은 알지만 미래를 위해 일종의 전략적 선택을 내리는 행위’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는 서민 증세 역시 정치적 도박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서민증세, 불리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불리하지 않은 패

 

정부에서 내놓은 증세 방안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 세부적으로 증세 방안을 보면 담뱃세나 주민세, 자동차세 등 누진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인상되는 부분이 많아 고소득층 보다는 저소득층에게 세부담이 귀결된다. 지난 대선에서 드러났듯이 저소득층에서 현 집권 여당을 지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높았다. 이번 증세안이 세수 부족에는 단비가 될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불리하다. 세수 효과도 4조 3000억 원으로 향후 지출될 재정 소요에 비하면 크지 않은 수준. 이렇게 불리한 증세 방안을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믿는 구석은 대중의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에 발표된 세법 개정안에서는 소득공제로 유리 지갑 논란이 일었고, 올 상반기에는 임대 소득 과세 후퇴 문제로 억울한 세입자 논란이 일었다. 최근의 서민 증세 논란까지 더해보자. 주기적인 논란은 이전 논란을 잠재우고 증세에 대한 면역성을 점차 높인다.

 

물론 여기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담뱃세 인상의 본질은 증세지만 철저히 금연 정책으로 말을 돌리는 식이다. 서민들의 세금이 올라가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 약속 파괴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은 기대하기 어렵다. 보편 증세의 관점에서 담뱃세와 주민세 인상은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조치이기에 추가적으로 부자·재벌 대기업에 대한 일부 증세 방안까지 발표하면 여론은 비등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통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비난 여론의 완벽한 봉쇄 여부는 경기 부양에 달려있다. 올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에 걸쳐 재정 보강·정책 금융·대출 확대 등으로 약 41조 원의 자금이 풀리고, 지방에는 안전시설 점검을 이유로 SOC 사업에 집중적으로 예산이 투자된다. 직접 투자가 아닌 만큼 중앙정부의 부담도 크지 않다. 시중에 단기적으로 급격하게 자금이 풀리면 눈으로 보이는 경제지표들은 개선된다. 내 삶의 질이 좋아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착시 효과는 정부에 대한 호감으로 바뀐다.

 

상대적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는 야당과 다르게, 감세와 지출 축소만 강조해오던 보수 정권이 이례적으로 추진한 정책인 만큼, ‘증세도 가능한 개혁적 보수’라는 이미지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서민’이라는 꼬리표만 떼어낸다면 당장보다는 미래의 대중에게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을 확률이 크다. 호감과 신선한 이미지는 표심과 직결, 2년 뒤 있을 선거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 불리해보이지만 마냥 불리하지는 않은 이면엔 이처럼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깔려있다.

 

영리하지만 위험한 정치적 도박, 진정 감당할 자신 있는가

 

물론 계획한대로 노림수가 작동할지는 미지수다. 자칫 판 자체가 뒤집힐 만큼 패가 가진 폭발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 있었던 크고 작은 전쟁의 이면, 권력의 몰락엔 세금 문제가 빠지지 않았다. 미국의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이나 프랑스 대혁명도 부당하고 불공평한 세금이 원인이었다. 분명히 세금은 더 걷어가지만 “절대 증세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정권의 자신감은 서민들의 타들어가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준비한 노림수가 작동하기 전에 자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승패를 떠나 막대한 판돈도 부담이다. 내년 재정 수지 적자가 무려 33조 원에 달한다. 당장이야 괜찮다고는 하지만 부족한 재정은 국채 발행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 계산서는 대다수의 국민들과 미래세대로 청구된다. 이 과정에서 이미 한 차례 증세를 경험한 서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질게 자명하다. 만약 기대한 만큼 경기부양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서민 증세 후폭풍은 배가되어 두고두고 현 집권 세력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정리해보면 영리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선택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도박의 승률은 1보다 클 수 없으며, 조건이 붙을수록 그 확률은 급락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처럼 조건이 다수 필요한 복잡한 승부수는 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서민 증세라는 정치적 도박, 진정 감당할 자신 있는가.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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