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11월 2014-11-03   2380

[역사] 일본, 전쟁으로 살고 지고

일본,
전쟁으로 살고 지고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전쟁국가, 일본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요즘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주목받는 이유는 뭐죠?” 답은 짧고 명쾌하다.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니, 이젠 정말 외교를 잘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어느새 미국과 중국은 공공연하게 서로를 주적시하고 있다. 이 갈등 구도에서 일본은 미국 편이다. 아베 정부는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집단적 자위권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행사할 태세다. 집단적 자위권이란 가령, 미국이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으면 동맹 관계인 일본이 자신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하고 반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전쟁의 일주체로 나설 수 있는 권리다. ‘앞으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던 평화국가 약속을 걷어차려는 지금, 19세기 이래 전쟁을 통해 흥망성쇠의 길을 오락가락했던 전쟁국가로서의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도발자였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서 그들은 수혜자였다.      

전쟁을 향한 질주

1894년 갑오년, 일본은 청에 선전포고하며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청은 전쟁에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나, 일본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히로시마에 지휘본부인 대본영을 설치했고 메이지 천황이 그곳에서 기거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일본 지식인들이 문명인 일본과 야만인 청 사이의 정의로운 전쟁이라 호도했던 청일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청을 대신해 동아시아의 호랑이로 등극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의 도발자 역시 일본이었다. 반전운동이 있긴 했지만, 대다수 일본인들은 이번에도 전쟁을 지지하고 적극 협력했다. 러일전쟁은 승자와 패자 따로 없이 종결되었다. 러시아군이 계속 패하긴 했으나, 쓰시마 해전 이후 일본 역시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어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만주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되자, 일본인들은 서양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며 열광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비상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여겼다.

제대로 계단을 오르기 위해 일본이 제일 먼저 할 일은 중국이란 산을 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10년대부터 ‘21개조 요구’ 등을 내세우며 중국 공략에 나섰으나, 그들처럼 호시탐탐 중국 진출의 기회를 노리는 서구 열강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은 꿈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전쟁을 선택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설립한 일본은 1937년 베이징 교외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군사 충돌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중일전쟁은 난징대학살을 감행하며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일본의 계획과 달리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장기전에 돌입했다. 일본의 전쟁 행보는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동남아시아까지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 일본은 결국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하고 연합국의 압박과 공세가 거세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쟁을 향한 일본의 질주를 멈춘 것은 많은 희생을 불러온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였다.

참여사회 2014년 11월호 (통권 216호)

전쟁특수로 쌓아 올린 고도성장

패전국 일본은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였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재건과 부활의 토대였다. 일본은 3년의 전쟁동안 전쟁 특수를 누리며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호황을 경험했다. 군사 보급품과 군사 장비를 생산하고 공급했으며 무기를 수리했다. 우리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 일본에겐 천우신조였던 셈이다. 미국으로부터 동아시아 반공기지의 지위를 부여받은 일본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전쟁을 통해 패전 상황을 빠르게 복구하고 경제부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국에 의해 1965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또다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된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12개 기지를 전쟁 시설로 활용했다. 미군은 일본에서 물자를 구입했고, 미군은 일본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리고 막대한 방위비를 쓰는 미국으로의 수출이 증대했다. 일본의 대미수출은 1965년 수출 초과로 바뀐 이후 1975년까지 연평균 21%씩 성장했다. 한국처럼 베트남 특수를 누리던 파병국에 대한 수출도 늘었다. 패전 직후 한국전쟁 특수로 단기간에 전후 복구에 성공하고 곧이어 찾아온 베트남전쟁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늘 미국이란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다.

지금 일본에는 주한미군의 두 배에 달하는 5만 3천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하고 한국에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여 한미일 군사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반중국동맹에 일본은 적극적으로 임하려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이 전쟁국가로서의 부활을 꿈꾸는 위협적인 이웃이란 인식이 압도하고 있다. 미국의 바람과 달리 한국과 일본이 같은 배를 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김정인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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