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5 2015-03-10   602

[칼럼] 미생과 펀치, 그리고 사회적 경제운동

미생과 펀치, 그리고 사회적 경제운동

이영환 l 성공회대 사회복지학 교수

 

드라마 <미생>에 이어 <펀치>를 재미있게 보았다. 한 시간 동안 푹 빠져들게 참 잘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부조리한 완고한 현실을 타파하려는 젊은이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펀치>는 권력을 장악한 못된 세력들에게 불의의 한방을 먹이면서 역전드라마를 펼치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로, 통쾌하고 기발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못된 세력들의 끈끈한 담합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욕망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티격태격하고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각각의 욕망추구를 공통기반으로 강고한 현상유지의 연대체를 형성한다. ‘욕망연합’이라 명명할 만하다. 기실 이들 각각의 행위와 사고방식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엉성하기 짝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엉성한 개인들의 치졸한 담합구조가 모든 객관적인 증거들을 왜곡하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좀처럼 깨기 어려운 강고한 수구적 지배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이 왜 이렇게 답답한지 깨달음이 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백치>에서 풍자한 구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현상유지라!!”. 사실 <미생>도 마찬가지이다. 비정규직을 둘러싼 현실적 질곡이 얼마나 깨기 힘든 지배체제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메시지일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은 강고한 욕망의 네트웍도 조그만 허점 하나 때문에 균열이 가고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결말을 드라마는 제시한다. 그리고 나쁜 놈들이 미처 감추지 못한 그러한 허점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그것도 자동차 블랙박스 기록처럼 나쁜 놈들 스스로에게 속한 것이었다. 물론 드라마틱한 결론을 위한 작가의 상상력이겠고, 엄밀히 따지면 논리적인 허점도 많이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통찰에 공감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현실의 완고한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빈틈을 우리는 갈구한다.

 

요즘 졸업시즌이지만 대학의 풍경은 그리 기쁜 표정이 아니다. 희망차게 사회로 진군해나가야 할 졸업생들을 보내면서 가슴 한켠에 찬바람이 싸하게 부는 서늘함을 피할 수 없다.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갑을 사회의 고착화, 전반적인 고양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등 우울한 소식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이 빠르게 향상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정착, 교육수준과 인권의식의 고양 등 전반적인 사회적 발전은 분명하지만, 진정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악화되고 있는지 영 가늠하기 어렵다. IMF 경제위기를 겪고 나서 10년 정도 흘렀을 때, 당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재산이 그동안 1조원에서 10조원으로 불어났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그 자녀들은 비상장 회사 1-2개를 상장하면서 하루밤 사이에 5-6조원의 재산을 불리고 있다. 현실의 강고한 지배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증표로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강고한 지배체제의 허점을 어떻게 발견하고, 또 이를 변혁의 단초로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모든 사회운동의 정답없는 고민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답답한 현실에서 민중의 자구책은 우선적으로 협동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혼자서는 생존조차 어려운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질곡에 대응하는 일에서도 협동은 필수적이다. 계와 두레 같은 협동조직은 민중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에 다름 아니다. 유명한 경제인류학자인 폴라니는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사회적 변화를 민중의 삶을 갈아엎어 버리는 악마의 맷돌에 비유하였다. 사회적 변화는 방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속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통찰이다. 민중이 그러한 변화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그들의 삶은 산산히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늦추어서 민중의 자생력이 복원될 수 있도록 비빌 언덕이 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민중의 자구적인 협동적 노력이다.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조합 그리고 각종 자발적 결사체(associations)들이 그 산물인데, 이러한 자발적 조직들은 이후 서구 복지국가를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자발적 협동의 정신은 복지국가의 연대정신이 되고 조합과 같은 사회경제조직들은 연대훈련의 장이면서 사회보험제도 등 복지정책의 운영 및 전달체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복지국가를 형성하고 또 유지하는 바탕에 이러한 민중의 자발적 협동의 노력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 이후 많이 잊혀져 버렸다. 왜냐하면 복지국가가 확장되면서 사회경제조직들이 하위 파트너로 흡수되어 버리기도 했고, 협동조합들처럼 외형은 남아있더라도 시장조직과의 경쟁과정에서 상업화되면서 본래의 협동정신을 상실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사회적경제라는 표제아래 새롭게 부각된 것은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 위기가 중요한 계기였다. 복지국가 위기는 외형적으로 국가의 재정위기로 주로 표현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복지국가의 관료화와 경직성,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기력이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적경제의 부활이 서구 여러나라에서 제창되었다. 놀라운 것은 굉장히 빠른 시간에 각 나라마다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사회경제 조직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새롭게 생긴 조직들도 있고 기존 조직들도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서구 복지국가의 바탕에 사회적경제의 정신에 연원을 둔 수많은 시민사회조직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이 서구 민주주의는 물론 복지국가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회적 경제 운동이 제3세계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서구에서와 같은 폭발적인 발전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이하게 정부가 강력하게 사회적경제 운동을 후원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경제 조직의 확대는 기대만큼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같은 현상은 곧 제3세계의 자발적 조직체들이 식민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즉 식민주의가 사회 자체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상황을 제외하고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시민사회의 활성화, 시민사회조직의 확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확립과 복지국가건설 작업이 교착상태에 봉착해 있는 것은 결국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고, 이는 곧 시민사회가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경험하고 학습하고 훈련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활성화되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정신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시민사회 조직들이 정치적 진보와 경제적 사회화의 정신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NGO, NPO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운동에 대한 관심이 매우 약하다. 정치적 옹호활동을 사명으로 하는 단체들도 그 자체로 사회경제운동의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식은 약하다. 역으로 사회경제조직들도 정치적 의미의 결사체라는 의식이 별로 없다. 원래 한 뿌리를 공유했지만, 이후 분화된 이들 조직들의 정신을 다시 결합하는 노력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조직들이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행복한 직장을 만드는 일을 제안하고 싶다.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민중들이 협동을 통해 추구했던 것은 이상적인 사회를 작은 공동체에서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은 성취들이 모여서 현실의 완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고, 결국 이를 변혁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자유를 맛본 사람들이 포악한 고용주의 압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필자는 우리 NGO들이나 사회경제조직들이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장기업들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면 그렇지 않은 직장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장시간노동과 권위주의, 이윤추구의 절대화 등이 지배하지 않고, 사람이 함께 살기위한 일(노동)의 의미를 발견하는 곳, 휴식과 노동의 조화, 가정생활과 직장의 조화 등이 실현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고, 물질적 자원의 빈약함을 호소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목표가 없다면 무엇을 위해 그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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