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3885

[008] 국가회의록 남기기 운동 – ‘기록이 없는 나라’, 투명행정은 없다

2001년 6월 청와대 정문 앞, 조선시대 사관복장으로 국무회의 속기록 작성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진행하던 참여연대 간사 강제 연행

2001년 6월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청와대 정문 앞에서, 조선시대 사관복장으로 국무회의 속기록 작성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진행하던 참여연대 간사가 강제연행됐다.

┃ 배경과 문제의식 ┃

시민들이 직접 국가기관을 감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그 정보를 시민들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 기자나 언론사는 정부의 자료를 받았지만 대부분 가공된 보도자료였다. 시민들은 국회를 통해서나 정부의 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1999년 정보공개제도가 시행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민들이 직접 원하는 정보를 찾고 정부에 공개를 요구하는 능동적 감시가 가능해 진 것이다. 하지만 정보공개를 활용하는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노력 그리고 정보공개의 범위를 조금씩이나마 확장시켜주는 법원 판결에 힘입어 정보공개운동은 매우 보편적인 시민운동의 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의 정보공개는 해당시기 정부의 속성에 따라 후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정보공개에 소극적이었고, 정작 중요한 정보의 상당 부분을 비공개로 처리하곤 했다.

2000년 12월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은 행정의 투명성 파악의 척도로 국가 정책 결정에 대한 투명한 공개 여부를 조사하기로 결정한다. 그 일환으로 국무회의록, 경제장관간담회와 당정협의회 회의록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한다. 그런데 공개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애초 취지와 달리 담당부처들의 답변을 통해 밝혀진 것은 회의록을 아예 작성하지 않아 공개할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최고 심의 의결체인 국무회의의 경우 ‘국무위원들의 원활한 의견 개진’을 위해 속기록과 녹음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주무부처의 답변이었고, 그룹 구조조정이나 공적자금 지원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다루는 경제장관간담회 역시 ‘자유로운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회의록을 작성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행정부의 최종 의사결정을 조율하는 국무회의조차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장의 회의록 공개 여부를 떠나 국가 정책의 결정과정을 은폐시키고 책임의 소재를 말소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참여연대는 국무회의 몇몇 국가 주요 회의 외에도 중앙행정기관들의 ‘차관급 이상의 직위자가 주재하는 주요 회의’들의 작성 및 공개 실태를 조사하면서 회의록 공개와 국가회의록 남기기 운동을 전면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 주요 활동 경과 ┃

회의록 공개운동은 2001년 6월 21일 ‘회의록 공개 시민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국가회의록 남기기 국민서신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참여연대는 6월 26일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청와대 정문 앞에서, 속기록과 녹음기록을 일절 남기지 않는 국무회의록 작성 실태를 규탄하고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기 위해 1인시위를 진행했다. 그러나 시작한지 10분만에 사관복장을 하고 1인시위를 하던 참여연대 최한수 간사가 연행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투명한 행정을 요구하는 합법적인 1인시위를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강제연행한 것이다.(이 사건은 2003년 법원에서 경찰의 강제연행이 위법하다고 인정되었고, 국가가 위자료 300만 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후부터 참여연대는 9월 18일까지 국무회의의 속기록 작성을 요구하며 국무회의가 열리는 매주 화요일 청와대 앞에서 열 두 차례 1인시위를 진행한다. 또한 국가 회의록의 불성실한 작성 실태를 폭로하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한겨레와 함께 ‘국민서신운동’이라는 캠페인 사이트를 개설했다. 3개월 동안 1,600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의미있는 글을 남겼다. 참여연대는 국민 서신을 직접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지만 이 역시 청와대 측의 면담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1,600인의 국민서신은 자료집으로 발간하여 청와대와 관련부처에 전달하였다.

정보공개운동은 이후 자연스럽게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 상태를 감시하고 정상화를 촉구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2003년 7월부터 중앙 행정기관 몇 곳을 선정해 정보공개를 청구하며 기록물 관리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중앙행정기관의 기록관리라고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민망한 수준이었다. 기록물 관리를 기록물관리법에 정한대로 하고 있는 기관이 드물었으며, 비밀의 분류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보공개사업단은 이러한 실태조사 결과를 미디어다음에 연재하며 기록관리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알려 나갔다.

2004년 5월부터 7월까지 정보공개사업단은 세계일보와 공동으로 <기록이 없는 나라>란 제목으로 9회에 걸쳐 기획 기사를 게재하는 언론기획을 진행했다. 기록물관리법이 1999년 제정되어 2000년 1월부터 시행되었지만 기록관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언론기획을 통해 지적하였고, 이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까지 이끌어 낸 기획 사업이었다. 구체적으로 1950년부터 1993년까지 주요 정책 150건을 선정해 실태조사를 진행하여 정부의 기록 작성 및 보관,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시리즈 기사였다. 5월 30일 ‘국가기록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필두로 ‘부처당 연평균 3만 8,000권 국가기록문서 무단폐기’, ‘부끄러운 기록 없애버려’ 기사가 이어졌다. 국정원의 기록관리와 국가기록원의 현주소를 점검했고, 전문가들의 ‘기록이 없는 나라’ 좌담으로 끝을 맺었다.

<기록이 없는 나라> 공동기획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기록이 없는 나라>가 보도된 당시 허성관 행자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도 “기록물 관리는 지금까지 사각지대였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큰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으며, ‘기록은 역사에 대한 책임이라며 무단폐기를 엄벌’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11월 참여연대는 경기기록문화포럼, 대전충남기록문화포럼, 성공회대민주자료관, 한국국가기록연구원, 한국기록관리학교육원, 한국기록관리학회, 한국기록관리협회, 한국기록학회와 함께 국가기록물 관리의 상시적 감시를 위해 국가기록개혁네트워크(기록넷)를 출범시켜 본격적인 국가기록개혁운동을 진행한다. 이후 2006년에는 기록물관리법이 전면 개정되었고, 기록물관리를 전공한 기록관리전문요원이 중앙행정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에 충원되어 기록관리가 내실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외에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도 2007년 따로 제정되는 등 기록관리제도에 있어 큰 변화·발전이 이루어졌다.

┃ 성과와 의미 ┃

참여연대의 회의록 작성 운동과 국가기록개혁운동은 정보공개운동의 질적인 변화이자 발전을 의미했다. 회의록이 작성되지 않고 국가기록물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정보공개운동은 큰 의미가 없다. 정보가 없으면 공개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여전히 국무회의는 회의록은 작성되지만 속기록은 작성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관리 역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이명박 정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사찰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가기록물의 무단폐기가 일어나기도 한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주요회의의 회의록과 속기록 작성, 기록물의 생산과 보존 및 폐기와 관련된 기록물관리혁신은 십여 년 전에도 중요했지만 2014년 현재 시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확인되고 있다. 투명하고 책임있는 행정을 만들기 위한 참여연대의 정보공개운동과 회의록 작성운동, 국가기록개혁운동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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