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5월 2016-04-29   462

[특집] 꼭꼭 숨어서 울지도 못하고

특집_어린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꼭꼭 숨어서 
울지도 못 하고

 

 

글. 김지은 (어린이·청소년문학)평론가

 

“우리는 겨울에도 웃으며 지내요. 들판에서 양을 잡고, 시원한 말젖을 대접하지요. 정 많고 따뜻한 키르키스 사람들”
키르키스스탄의 어린이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아이들이 웃으며 지내는 마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린이의 행복과 안전은 사회 계몽의 척도임과 동시에 사회 평등의 척도이기도 하다. 아무리 작고 약한 사람이라 해도 그를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합의가 어느 정도 이상은 이루어졌다는 증거다. ‘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의 얼굴을 편안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아이들은 용감하게 자란다. 

두 해 전 오월에 어린 조카는 빈 종이를 주면 배만 그렸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이런 작은 아이도 또래 학생들도 다 보았다. 아이들이 울면서 지내는 마을은 얼마나 슬픈가. 하지만 어린이가 숨어서 우는 사회는 더 슬픈 사회다.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치지 않는 사회, 눈물을 존중하는 사회만이 앞으로 터질 울음을 덜 수 있다. 기억과 고백은 누군가의 전유물이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모두 함께 울고 슬픔 뒤에 놓인 진실을 찾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의 상처를 드러내는 동화
어린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어린이가 고통 받는 일은 어제 오늘의 상황이 아니고 동화작가들은 꾸준히 그 목소리를 동화에 담고자 애썼다. 김옥의 동화 『불을 가진 아이』에는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교사의 차가운 무관심에 지친 동배가 성냥을 주워 그으면서 불의 온기로 자신을 달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동배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의 21세기 한국판이다. 그러나 동배의 성냥갑에서 시작된 불은 앙상하게 바싹 마른 동배 주위의 처절한 상황에 맞닿으면서 무섭게 타오른다. 동배가 불을 사랑했던 것은 마음의 서러운 불길을 달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예쁜 건 너야”라는 한 마디와 꼭 잡아주는 손이 있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학대받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다룰 때 사람들은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는 동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다’면서 외면했다. 그러나 아이들 마음의 불길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동화가 있기 때문이다. 앨리사 너팅의 동화 「오빠와 새」에는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이 동화는 그림형제가 정리했던 「노간주나무」라는 민담을 원작으로 하여 아이를 향해 자신의 고통을 투사하는 어른, 공허한 방관자가 되어버린 현대의 부모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림형제의 원작에서 주인공의 오빠는 새엄마에게 살해당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들로 만든 수프를 마신다.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어린이 앞에 놓인 현실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문학의 어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린이의 시에서 ‘엄마를 먹겠다’는 표현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은 상처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일상 언어가 닿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까지 샅샅이 조명하는 힘이 있다.

지금 우리 어린이는 책이 아니라 뉴스에서 사회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있다. 물론 현실이 안전하지 않은데 이야기가 대피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조차 금기로 여기고 그것이 ‘동화답다’고 우겨왔던 어른들은 울부짖다가 사라지는 어린이들을 지키지 못했고 공범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참여사회 2016년 5월호 (통권 234호)

아이들과 동떨어진 학교 교육
어린이는 아이가 있는 가족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살아갈 미래의 동료다. 왜 어른들은 어린 시절이 ‘즐겁고 밝은 이야기’로만 가득해야 한다고 쉽게 단정할까. 그들의 분노, 좌절, 고통을 대신 말해주던 동화는 종종 ‘지나치게 어둡다’는 이유로 배제되곤 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굶고 맞았다. 어린이를 더 많이 웃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울음과 울음을 변조한 여러 신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린이를 ‘착한 어린이’와 ‘나쁜 어린이’로 나누려는 보수 언론매체의 보도 태도는 놀랍도록 잘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반의 학생들이 서로를 그토록 증오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살펴보지 않고 결과의 중량만을 측정하여 ‘학교 폭력’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들의 눈물은 징벌적인 어조 앞에서 메말라버린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수학 선생님은 어느 해 5월 18일, 교실에 작은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와서 음악을 들려주셨다. 레퀴엠과 몇몇 나지막한 추모의 노래들이었다. 오늘은 우리들이 기억하고 슬퍼해야 할 날이라고, 너희와 비슷한 나이의 청소년들이 죄 없이 소리 없이 죽었던 날이라고 두어 마디 짧게 말하고 나서 내내 음악만 들려주셨다. 출석번호가 28번이었라 수업 전에 그날 배울 함수 문제를 미리 풀고 있던 나는, 교과서를 펼치지도 않고 조용히 음악만 듣던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나는 교육이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보는 다른 경로로 배울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면 학교는 어떤 곳이 되어가는 것일까. 어린 세대는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까. 무엇이든 실시간 업데이트 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몇 십 년 뒤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짐작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것보다는 훨씬 급격하게 변화될 것이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틈은 크레바스crevasse,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처럼 깊을 것이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린이들이 앞으로 혈연과 각종 눈에 보이는 연결망을 넘어서서 공동체의 엉뚱한 구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어린 시민들은 반드시 크고 작은 삶의 변곡점을 만나게 되고 동배처럼 애처롭게 절망할 것이다. 그 절망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흔들리는 어린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의 존재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눈에 띄지도 않았던 숨은 아군과 같아서 도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다가 불쑥 일어났으면 좋겠다. 어린 시민들이 말을 나눌 수 있는 귀와 입이 되어주고 든든한 다리가 되어주면 좋겠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디에 가야, 어떻게 해야 그런 투명한 호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어린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아군, 인과 없는 둥근 호의의 출처가 되어줄 수 있을까.

오늘도 수많은 어린이들은 가슴에 작은 주먹을 하나씩을 품고 혼자 걷고 있다. 주먹을 나무라는 사람만 있고 손바닥을 펴보라고 말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 쓰이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 때는 더 했어. 다 이겨낼 수 있어”라는 난폭한 위로 대신 “괜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곁에 있어”라는 말을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꼭꼭 숨어서 웅크린 채 숨죽여 울고 있는 어린이는 이제 나와서 울어야 한다. 큰 소리로 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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