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6월 2016-05-30   460

[여성]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싸움의 시작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싸움의 시작

 

글. 손희정 문화평론가
<여/성이론>, <문화/과학> 편집위원. 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이고,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살해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여성들의 두려움과 분노에 불을 지폈고, 이내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여성들은 이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편 이는 그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사람의 우발적 살인이므로 “남녀대결을 부추기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주장은 하도 끈질겨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왜 그토록 여성혐오 사건이 아니어야만 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사건이 갖는 여성혐오적 성격을 우선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이는 기실 칼이 휘둘러진 그 순간에 국한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맥락의 중첩 위에 이는 비로소 여성혐오 사건이 되었다.

 

여성혐오와 폭력 드러낸 강남역 사건
여성혐오란 한 사회가 남성을 보편인간으로 설정하면서 여성을 그보다 열등한 존재이자 그를 위협하는 존재로 타자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성별 간 위계를 통해 남성은 여성을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가해 남성이 “여자들의 무시”를 살인의 이유로 꼽았다는 점은 중요하다. ‘자격 없는 자’에게 무시당했을 때, 모멸감은 분노로 연결되고 모멸감을 준 자는 단죄의 대상이 된다. 여성에 대한 통제 욕망이 극단화된 것이 폭력이며, 그 끝이 살인이다. 사람들은 피해망상에 따른 범죄는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질문해 보자. 여성을 특정한 근거 없는 피해망상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어진 언론의 보도 행태는 이 사건의 여성혐오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언제나처럼 가해 남성의 좌절된 꿈과 생활고, 정신상태가 강조되었다. 그 속에서 희생된 여성은 삶의 역사가 지워진 얼굴 없는 피해자로 내던져졌다. ‘살인사건’의 서사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쓰여 지고, 여성은 또다시 대상화된다. 만약 여성 대중의 주목이 없었다면, 5.17 페미사이드(남성에 의한 여성살해)는 ‘화장실변사체녀’와 같은 또 하나의 ‘00녀’를 남긴 채 신문 기록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피해 여성에 대한 공감이 여성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 하나가 존재하지 않던 공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었던 멸시와 차별, 위협과 성/폭력이 여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여성들은 이를 성별 권력과 관계된 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우리 여성의 일이며, 따라서 남성의 일이다. 그러니 함께 움직이자.” 여성들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살해라 부르는 것에는 이렇게 오랜 시간 쌓여온 기억과 맥락이 있다.

 

참여사회 2016년 6월호(통권 235호)

 

여성의 목소리 내기와 죽이기
사실 5.17 페미사이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3일에 한 번씩 여성이 남성 파트너 혹은 전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다른 맥락 위에 놓여있지도 않다. 명백한 여성혐오 강력사건에서 성별을 지우려고 하는 것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성별이 폭력의 중핵임이 드러나면 우리 사회가 이와 싸우기 위해 건드려야 하는 것은 가부장제라는 뿌리깊은 지배체제 그 자체가 된다. 너무나 복잡한 일일 뿐더러, 그 제도 안에서 혜택 받아 온 남성에게 성찰과 동참을 요청하는 일이 된다. 이를 인지한 남성들은 그 시스템을 유지해 온 장본인이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나는 아니다, 나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래서 등장한다.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만 하는 더 핵심적인 이유는 그 명명을 통해 비로소 체제의 공모자였던 여성들이 각성하고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사건을 접하면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가부장제의 명령을 내면화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보호해 줄게”라며 여성들에게 호루라기를 들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여성을 죽이는 문화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보호가 아닌 보호 받을 필요가 없는 안전한 세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기존 사회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꽤 낯설고, 또 불편한 광경일 터다.

싸움은 순탄하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여성의 용감한 슬픔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과격한 남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추모의 공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극적인 행태는 일베라는 극단적인 혐오세력 너머에 있는 여성혐오 문화 자체를 바로 보자고 말하는 여성들의 입을 막는다. 일베가 모욕적인 화환을 보내자 사람들은 “역시 일베 탓”이라며 문제를 축소시키려 했다. ‘핑크 코끼리’가 여성들을 자극하자, 사람들은 이에 분노한 여성들을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추모의 공간에서 커터칼을 휘두르는 남자 역시 여성들을 위축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여성들이 “발언할 공간, 경청될 공간, 권리를 지닐 공간, 참여할 공간, 존중받을 공간, 온전하고 자유로운 한 인간이 될 공간”(레베카 솔닛)을 침탈하고 위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말하고 있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공간들을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고. 이제 이 싸움에 함께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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