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3년 05월 2023-04-26   2277

[이슈] 폭력의 반대말은 분노가 아니다

진냥 경남지역 초등 교사, 연대하는교사잡것들 활동가


학교폭력이 또다시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예전에는 학교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의 미디어나 SNS를 보면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인식도 달라졌는데 왜 학생 간 폭력은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사회적 관심을 받다 보니 법 개정도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실제 개정되는 내용은 별로 새롭지 않다. 학교폭력과 관련된 법은 쟁점이 될 때마다 개정되어 지금은 누더기나 다름없다. 사회적 관심에 떠밀려 개정되다 보니 개정 이후 법이 미칠 영향을 제대로 검토하거나 당사자나 관련 전문가 등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생략되거나 허투루 이루어진다. ‘개정을 위한 개정’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바뀐 티를 내야 하니까 법이 개정될 때마다 더 많은 절차가 추가되곤 한다. 그러나 절차가 많아질수록 학교 현장에서는 혼란과 업무 부담, 저항 등이 발생한다. 그래서 개정된 법에 따라 만들어진 매뉴얼은 절차를 생략하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결과적으로 ‘법을 개정해도 현실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게 정말 학교폭력을 없애기 위한 법 개정인가?


때리는 놀이가 왜 ‘장난’인가

사실 한국의 학교는 지금까지 폭력 근절을 전면적으로 선언한 적이 없다. 학교에서 ‘더 이상 폭력은 허용될 수 없다’는 공감대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학생들끼리 때리는 놀이가 그저 ‘장난’으로 인정된다. ‘어른’의 체벌도 공공연히 인정된다. 그래서 학교폭력을 심의할 때는 늘 장난인지 장난이 아닌지를 잘 가늠해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심하지만 않으면 폭력을 써도 된다는 건가? 이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즐거울 수도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좁은 공간, 재미라고는 오로지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곳에 많은 사람을 오랜 시간 몰아 놓으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장난감처럼 여기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탈식민주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교육을 ‘비강제적인 욕망의 재배치’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교육을 통해 욕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사람을 괴롭히는 재미가 아니라 더 긍정적이고 다양한 즐거움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소개하고 누리게 해야 한다.

우선 학교 안팎에서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는 엄중히 거부하자”고 선언해야 한다. 미디어는 물론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사람들이 다양하고 긍정적인 즐거움과 재미, 욕망을 누리도록 지원해야 한다.

학교폭력 해결할 때도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드라마 <더 글로리>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스트리밍되었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드라마 설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린다. 계속 “가해자들이 갱의 지시를 받고 저러는 거야?”, “돈이 없어서 피해자로부터 뺏으려고 하는 거야?” 등의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가해자들이 피해자보다 더 부자인데 재미로 괴롭히는 것”이라고 설명해도 외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과거 소위 ‘일진’들은 경제적 배경이 좋지 않지만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이들중 다수는 결국 조직 폭력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학교에서는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이 존재했다. 이 질문은 폭력에 대한 응징도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어떤가? 학교폭력에 대한 각종 제도가 정비되었지만, 더 엄격해진 처벌제도 안에서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의 힘은 더 강력해졌다.

정순신 전 국가수사본부장 후보자 자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최근의 학교폭력은 학생 간 역동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경제적·사회적 계급 격차가 학생 간 권력 차이를 만든다. 물리적인 힘은 자본에 굴복한 지 오래되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많고 부모가 권력자인 사람이 일진이다.

괴롭힘의 양태 역시 달라졌다. 최근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재미와 편의성, 지배관계를 요구한다. 이런 특징은 학생 간 폭력뿐만이 아니라 군대 내 폭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경비 노동자나 서비스업 노동자에 대한 폭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요컨대 최근 학교폭력은 갑질의 형태를 띤다. 갑을관계에 종속되어 즉각 내 말대로 행동하라고, 나를 위한 각종 서비스를 매끄럽게 제공하라고 강요하는 방식의 폭력으로 바뀐 것이다. 학교폭력 문제는 이 갑을관계를 허용하는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해결의 열쇠가 있다.

사다리를 놓지 말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자

학교는 평등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다른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마치 교육의 절대적인 목표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학교 교육이 사다리인 게 맞는 걸까?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을 더 오래 남겨라”, “왜 서울대는 학교폭력 가해자를 합격시켰냐” 등의 주장을 하는 것은 학교 교육을 사다리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잘못한 사람을 사다리에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나 결국 사다리는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다. 사다리에서 높으면 갑이고 낮으면 을이다.

폭력은 극대화된 차별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갈라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이중잣대의 극단이다. 폭력성은 절대로 모든 사람을 향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사람, 그래도 되는 사람에 대해서만 발휘된다. 이 사람에게는 다르게 대해도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 차별과 폭력이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사람을 다르게 대해도 된다’는 신호를 준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나친 폭력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지 못한 권리, 즉 ‘인간을 차별할 권리’를 마치 자신이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이 평등을 선언하고 합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다른 태도로 대하지 않는 교양을 학교 교육에 포함해야 한다. 나와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도 ‘공손하고 다정하게1’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학교는 평등한 관계를 생산해내는 조직, 평등을 실천하는 교육기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돈이 많든 적든, 학년이 높든 낮든, 교사든 학생이든 서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학교에서 끊임없이 재확인해야 한다.

진심으로 학교폭력을 뿌리 뽑고 싶다면

4월 초부터 5월 초까지 2023학년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가 진행된다. 이 조사는 2012년 대구의 한 중학생의 죽음이 만들어 낸 제도적 변화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이루어지는 유일한 실태 전수조사라는 점에서 정말 큰 의미가 있다.

조사 결과가 보도되면 언론은 또다시 “작년에는 몇 퍼센트였는데 올해는 몇 퍼센트”라며, 걱정스러운 말을 쏟아낼 것이다. 물론 작년보다 발생률이 낮아진다면 긍정적인 경향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접근한다면, 그토록 심각하다고 떠들어 왔던 학교폭력 문제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저 표피만 건드리는 것 아닌가. 뿌리는 그대로 두고 터져 나오는 포자만 빨리 닦으라는 것 같아 교사로서 화도 난다.

학교폭력이 정말 문제라면, 뿌리부터 근절하고 싶다면 폭력이라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 폭력의 반대말은 분노가 아니라 평등과 민주주의다.

1  초등학교 4학년 도덕 2단원 제목이다. ‘공손하고 다정하게’는 특정한 관계에서만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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