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3년 06월 2023-05-30   1164

[이슈] 쌀을 ‘찬밥 신세’ 만드는 정치가 진짜 포퓰리즘이다

엄청나 전국쌀생산자협회 정책위원장

홈쇼핑 채널에서는 맛있는 쌀밥을 만든다는 돌솥·가마솥 상품이 연일 소개된다. 쇼핑호스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에 반찬을 올리며 “찰기 흐르는 맛있는 밥만 있으면 최고의 밥상”이라고 설명한다. 쌀밥 예찬은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이어진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의 여행 일정을 소개하면서, 한국인의 주식인 밥을 보여주고 밥을 잘 먹기 위해 마련되는 다양한 반찬도 소개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한국 음식의 핵심은 밥이야”라고 평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국민이 쌀밥을 먹지 않지 않는데, 농민이 편하게 쌀농사만 지으려 한다”며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거부한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이 국민 정서이고 무엇이 한국의 식문화인지 생각하니 쓴웃음이 난다.

미분양 주택은 사줘도 쌀은 못 산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의 쌀은 급격하게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본에게 조선은 훌륭한 식량창고였고 한일합방 이후 쌀 수탈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1911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명분으로 토지를 강탈했고, 1920년에는 산미産米증식계획을 진행했다. 조금이라도 많은 쌀을 수탈하기 위해서 ‘한 숟가락 덜 먹기 운동’, ‘조선사람 쌀밥 금지’ 등 절미節米운동도 펼쳤다.

이런 사정은 미군정 하에서도 이어진다. 해방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1945년은 기록적인 대풍년이었다. 하지만 쌀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미군정은 자유시장경제 도입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투기꾼들의 매점매석을 부추겼고 쌀값 폭등을 불러왔다. 결국 미군정은 사실상의 공출제1를 시행하고 생산비의 4분의 1에 불과한 가격으로 쌀을 수집했다.

농촌에서 연일 폭동이 일어나고 비난 여론에 거세지자 이승만 정부는 1946년 양곡매입법을 내놓는다. ‘공출을 통한 배급’이라는 점에서 미군정의 정책과 비슷하지만, 쌀 생산비와 물가를 고려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때부터 2020년까지 쌀 생산비 보장정책은 변동직불금2이란 제도로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쌀만 사들였을 뿐 한국 정치는 철저히 농업을 외면했다. 1960년대 농업은 전체 산업인구의 60% 이상, 국내총생산GDP의 37%에 달했다. 그러나 2020년에는 농민 인구가 국민의 3%에 그치고 농업의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1.8%에 불과한 지경까지 왔다. 그나마 농업을 지탱하던 변동직불금 제도마저 폐지되자 쌀값은 시장에 내맡겨졌다.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4일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며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수십조 원이 넘는 미분양 주택은 사줄 수 있지만 매년 1조 원이 든다는 쌀값 대책에 대해서는 “세금을 낭비할 수 있기에 시행할 수 없다”고 했다. 쌀값 대책에 매년 1조 원의 세금이 든다는 정부의 주장도 이해할 수 없지만, 만약 사실이라 하더라도 농업과 농촌, 식량의 가치를 생각할 때 그것이 그토록 과도한 액수인가 싶다.

농부가 잘 익은 벼를 만져보고 있다.

치솟는 물가, 떨어지는 쌀값

2022년 쌀값은 대폭락했다. 1979년 쌀의 완전 자급이 이루어지고 쌀 관련 통계가 작성된 뒤 가장 큰 폭락세이다. 농민들은 밥 한 공기에 300원을 요구하는데 올해는 한 공기에 205원까지 떨어졌다. 세상 모든 물가가 무섭게 오르는데 떨어지는 것은 쌀값뿐이었다. 농민들의 삶은 덩달아 추락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부는 “쌀이 남아돌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쌀 자급률은 오히려 떨어졌다. 2019년 100%가 넘었던 쌀의 자급률은 2021년 84%, 2022년 82%까지 떨어졌다. 쌀 수입 개방 이후 들어온 수입쌀이 조금씩 시장 점유율을 높인 것이다. 즉, 쌀이 남아도는 것은 한국 쌀이 많이 생산되어서가 아니라 대량의 수입쌀이 들어와서 생긴 결과다.

쌀을 포함한 한국의 모든 농산물은 이미 개방되었고, 세계 평균 곡물자급률이 100%를 넘는 시대에 한국은 곡물자급률이 20.1%이다. 그나마 쌀을 대부분 자급하기에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곡물가가 폭등할 때도 국민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쌀이 남는다”고 국민을 선동하고 “쌀값을 보장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지금은 기후위기가 식량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벼는 20~29°C에 이삭이 나오고 곡식이 여무는데, 기온이 상승하면 벼가 안정적으로 자라지 못한다. 기후위기로 해수면이 상승해 토지 염도가 올라가거나 가뭄과 폭우가 반복되는 것도 큰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2020년 56일간의 장마는 쌀 생산량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같은 해 환경부가 발간한 ‘한국 기후변화 평가 보고서’는 2100년 쌀 생산량이 지금보다 25%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식량 안보에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

쌀은 식량 안보 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2022년 11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도시민의 63%는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은 가치가 크다”고 응답했다. 또한 65.7%는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유지·확대하기 위한 추가 세금 부담에 찬성한다”고 했다. 국민들은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농업·농촌의 중심에는 바로 쌀이 있다. 한국 농지의 절반 이상이 논이며, 농민의 51.6%가 쌀을 재배한다. 한국 농업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왔지만 그나마 쌀을 지키려 노력했기에 지금의 농지와 농민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쌀값은 농민 값이며 쌀값이 곧 농민에 대한 국가 처우의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쌀의 가치는 기후위기 시대에 더 커지고 있다. 논은 생물다양성의 보고다. 농촌진흥청이 펴낸 《논에 사는 무척추동물 도감》에 소개된 동물은 무려 280여 종에 이른다. 어떤 사람들은 “논이 물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물이 잠긴 토양에서 세균이 메탄가스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태적으로 보았을 때 논은 공익적 가치가 더 크다. 홍수를 조절하고 공기와 수질을 정화하고 토양 유실을 방지하고 유기물의 재순환을 돕고 여름철에는 주변을 시원하게 만드는 냉각 효과도 있다. 쌀농사는 쌀만이 아니라 생태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것이다.

농민에게 31억 달러 내놓은 미국, 농민 외면하는 한국

농업을 시장경제에만 맡겨놓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최첨단 자본주의의 나라, 윤석열 정부가 ‘혈맹’이라고 말하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은 자국 농민들의 대출 및 보증 융자를 지원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농민을 신속하게 구제하기 위해 31억 달러(4조 486억 원)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자연재해·전염병 등으로 인해 시장이 혼란해지면서 농민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번 지원은 국가 전체 복지에 필수적인 식량, 섬유, 연료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국가 전체를 위해서 농업이 중요한 것이 미국만은 아닐 것이다. 쌀 소비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한국 식생활의 중심에는 여전히 쌀밥이 있다. ‘쌀을 천대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어른들의 말은 결코 묵은 문자가 아니다. 쌀은 우리의 소중한 한 끼 밥상을 지키는 주식이며, 한국의 농촌을 지키고 환경을 지키는 소중한 작물이다.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 농민들의 소박한 꿈이 올해는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1  식량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제하고 농민들의 할당량만큼의 농산물을 정부에 의무적으로 팔도록 한 제도

2  쌀 소득 보전 직불제에서 쌀의 시장 가격이 변함에 따라 단위 면적당 지급하는 특정 금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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