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한 장이면 동네가 놀이동산

 

이명석 저술업자

 

일러스트 황진주

 

겨울이 기울어질 무렵, 집을 옮겼다. 이사라는 게 그렇다. 지갑도 시간도 몸도 괴로운 일이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신문지 바닥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노라면, 2년 뒤에 또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걱정이 단무지처럼 노랗게 피어오른다. 그래도 즐거운 쪽으로 생각하자. 이렇게 제 집 하나 없는 신세로 굴러다니는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 여행을 하게 된 거라 여기자. 그러니까 나는 이제 최소 2년을 기한으로 이 동네를 가지고 재미있게 놀아볼까 한다. 놀이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지도다.

 

 

우리 동네 탐방으로 만드는 세계지도

 

먼저 몇 해 묵은 이야기부터 하자. 그때 나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어귀에 살았다. 혜화동은 그 나름대로 산책을 부르는 정겨운 동네지만, 언덕 너머 성북동이 주는 재미는 별스러웠다. 아파트 같은 게 별로 없어 한적하게 서울의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라는 점만이 아니었다. 그쪽에는 대사관저, 외국 상사원 사택, 가톨릭 선교 단체 등 유독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곳이 많았다. 주민센터에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실 같은 걸 열 정도였다. 

여유로운 날에 나는 두 장의 지도를 들고 나섰다. 하나는 내가 직접 그린 동네 지도, 다른 하나는 세계지도였다. 룰은 간단했다. 골목을 거닐다 어떤 나라의 표식이 나오면 세계지도에 깃발을 그린다. 포르투갈 대사관 표지판, 체크! 그리스 대사관저 체크! 누군가 내다버린 호주산 와인 병, 체크! 그 다음엔 세계지도에 체크된 나라를 동네지도와 선을 그어 연결한다. 이렇게 나는 성북동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세계를 발견했다. 어느 날인가는 한성대입구역부터 대로를 따라 만국기가 꽂혔다. 성북구에서 그 지역에 대사관이나 외교관저가 있는 나라의 국기를 꽂기로 한 것이다. 나는 신이 나서 지도를 채워나갔다. 

머지않아 이런 놀이를 위해 굳이 성북동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길거리 간판에서 항상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빵집, 홍콩 반점……. 이런 건 쉽다. 좀 덜 알려진 장소를 찾는 게 더 재미있다. 돌로미티 아이스크림에서 알프스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도시를 찾고, 티티카카 카페에서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호수를 발견한다. 작은 세계지도를 들고 다니며 세계의 모든 나라에 깃발을 꽂아볼까도 싶다. 과연 얼마 만에 그걸 다 채울까?

 

 

통인동에서 이상李箱과 함께 지도 놀이

 

새로 이사 온 서촌에서는 다른 종류의 지도 놀이를 해볼까 한다. 따뜻해지면 친구들을 통인동 ‘이상의 집’으로 불러 모은다. 이어 이상의 시 「오감도」를 읽는다.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그러고 묻는다. “왜 이 시에 막다른 골목이 나올까?” 똑똑한 척하는 녀석들이 모더니즘이 어떻고, 식민지 지식인이 어떻고 떠들어댈 것이다. “됐어. 이 동네엔 정말 막다른 길이 많거든.” 나는 동네 지도를 나눠주곤 돌아다니며 막다른 길을 찾아 표시해 오라고 한다. 과연 몇 군데나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은 그럴싸한데 막상 하려니 부끄러우시다고? 그럴 때는 아이들을 끌어들이면 좋다. 예전 어느 일본 잡지에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보았다. 대학원생들이 한 동네를 찍어 그곳 초등학생들과 팀을 나눈 뒤, 지도를 가지고 여러 미션을 수행한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어느 팀은 동네의 ‘이야기 지도’를 그린다. 가령 어느 나무가 번개를 맞았다면 지도에 번개를 표시한다. 유명한 시인이 하숙하던 집이다. 지도에 시구를 적는다. 좀 더 수학적인 지도 놀이도 할 수 있다. 학교에서 출발해 가장 멀리 살고 있는 친구의 집까지 간다고 해보자. 그 중간에 자리 잡은 친구들의 집을 모두 거치면서 가장 빨리 가는 동선은 어떤 걸까? 환경생태학적인 주제를 넣어볼까? 학교 앞에 살고 있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지도를 그려보자. 먹이를 주는 식당, 쓰다듬어 주는 언니 집, 고양이들의 집회장… 

 

 

새로운 동네 지도 만들기

 

이미 땅 위에 있는 걸 지도에 베껴야 한다는 법만 있나? 내가 만든 지도에 따라 동네를 바꾸면 안 될까? 여러 명이 둘러앉아 동네에서 꼭 필요한 시설들을 고른다. 학교, 경찰서, 우체국, 떡볶이 가게, 공원, 도서관…….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새롭게 위치를 잡는 거다. 단순해 보이지만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라서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꼭 필요한데 없는 가게가 있다면, 창업의 아이디어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아파트촌에서는 이런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직선과 사각형만 가득한 세계니까.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자. 이웃 마을로 원정을 가거나, 시골 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를 노려보자. 그것도 어려우면 자기 집안의 지도, 내 방의 지도를 그려보자. 침대가 대륙이 되고 의자가 섬이 되고 책꽂이가 산맥이 된다. 방바닥이 잡동사니로 어지럽혀져 있으면 다도해가 되는 것이고. 

이사 뒤의 내 집은 아직 정글과 같다. 이걸 어떻게 바꿀까? 방 안의 지도를 그리자. 가구들을 새로 배치하고 가장 효과적인 동선을 만들자. 지도를 그리는 건, 야생의 섬을 문명의 세계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화, 여행, 커피, 지도 등 호기심이 닿는 갖가지 것들을 즐기고 탐구하며, 그 놀이의 과정을 글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