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사건이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일러스트 atopy

 

세계는 하나가 아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개성,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함흥 등 9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함성이 터졌다. 두어 달에 걸쳐 은밀히 준비된 전국적 거사가 일어난 것이다. 학생, 특히 여학생이 태극기를 흔들며 삐라가 흩날리는 거리를 행진하고 시민이 함께 모여 애국가를 부르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새로운 시위 풍경은 곧바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되었고 거대한 민족적 항쟁의 물결을 이루어냈다.

3.1운동, 그 시위의 한복판에 선 한국인이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아, 일본의 폭압적 독재 하에 숨죽이고 있던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하나의 민족이었구나!’ 그렇게 한국인을 감동시킨 3.1운동을 과연 타자인 외국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세계가 모두 한국인의 독립 투쟁에 감동하며 지지했을까. 세계가 제국주의와 식민지로 분할되어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은 한국인의 독립 투쟁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이라는 관점에서 3.1운동을 바라보았다. 3.1운동을 한국인의 독립 투쟁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식민지,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민족이요, 나라들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3.1운동을 다르게 읽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관심은 오직 일본의 잔학상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은 한국인의 독립 투쟁 양상보다 일본의 잔혹한 탄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 근처에서는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소년 2명이 머리카락을 전주에 매인 채 소방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 등 끔찍한 사건들이 가득했다.  

3.1운동 중에서 서양인과 서양 언론이 가장 주목한 것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었다. 한국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 프랑스 공사와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직접 현장 조사를 한 뒤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서양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렸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지면서, 미국 상원에서는 “미합중국 상원의원은 한국인들이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정부를 위한 열망에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라는 결의안이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잔학상에 대한 서양 열강의 조치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같은 배를 탄 일본에 대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정부는 3.1운동을 공식적인 외교 문제로 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회의에 인도적 차원의 안건으로도 상정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 짓기 위한 평화회담으로서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열린 파리강화회의. 서양 열강과 일본이 함께 한 이 협상 테이블에서 비록 공식적인 안건으로 상정되지는 않았지만, 제암리 학살 사건을 비롯한 3.1운동 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학상은 일본 대표를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일본은 ‘문명 세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강렬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는 치욕스러운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서양 열강에게 3.1운동은 억압받는 약자의 정의로운 항거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또한 수많은 한국인의 희생은 인도적 차원에서 공감하고 분노해야 할 비극이 아니라, 일본을 압박할 수 있는 절호의 외교 카드였다.    

 

 

위기의 중국, 한국인의 투쟁에 자극받다

 

중국도 국망의 위기감 속에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것은 일본의 산둥반도 장악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빼앗은 산둥반도를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3.1운동이 터진 것이다. 

중국인은 한국인의 독립 투쟁에 환호했다. 베이징대 교수 천두슈는 3.1운동에 대해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한 동시에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을 갖추어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조선인과 비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중국의 무기력한 현실을 개탄했다. 베이징대 학생 푸쓰녠은 3.1운동의 교훈으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비폭력 혁명이었다는 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한 혁명이라는 점, 순수한 학생 혁명이라는 점 등을 꼽았다. 그리고 중국인의 무장해제된 정신 상태를 맹렬한 비판했던 그는 마침내 5.4운동을 이끌어냈다. 1919년 5월 4일에 뿌려진 <베이징 학계 전체 선언>에는 3.1운동에 대해 이런 언급이 나온다. “한국인은 독립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이렇게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던 중국인들은 일본의 잔혹한 탄압보다는 3.1운동을 비폭력의 거족적 투쟁으로 승화시킨 한국인의 저항 정신에 관심을 보였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1919년의 봄, 한국인에게는 격동과 감동의 시간들이었지만, 세계는 자신의 처지와 이해관계에 따라 달리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의 태도는 어땠을까. 일본 언론은 3.1운동을  “일부 종교인의 선동에 의한 폭동”이라고 보도하면서 무력 탄압을 비호했다. 조선인을 ‘폭도’라 부르며 일본인의 피해를 과장해 보도했다. 하지만,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인 민간인은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김정인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