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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12월
  • 2017.12.04
  • 32

적폐청산의
한 해를 보내며

 

글.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남북관계사, 한중일 역사인식 문제 등을 매개로 역사적 관점에서 동아시아평화문제를 해명하고 전망하는 데 관심이 많다.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1948~1961』, 『한일근현대 역사논쟁』 등의 저서가 있다.

 

 

2016년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를 뽑았다. 이 신조어는 탈진실, 비진실 또는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뜻을 지녔다. 옥스퍼드는 이 말을 “객관적 사실보다는 감정이나 개인의 신념이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탈진실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Brexit)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라고 설명했다. 브렉시트 선동자들과 트럼프에 관한 가짜 뉴스가 대중을 유혹했고, 이들 가짜 뉴스는 SNS를 타고 급속히 퍼져 나갔다. 대중들은 뉴스의 진실을 따지기보다는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기성 거대 언론보다 자신이 선택한 뉴스를 더 신뢰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정치적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 년 내내 지속된 탈진실 현상과의 투쟁

미국과 영국의 탈진실 현상은 한국에서도 촛불시위와 그에 대응한 시위의 과정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거짓정보를 생산해 ‘태극기 부대’를 선동했다.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세금도둑’과 같은 가짜 뉴스가 만들어졌고, 유족들에게 터무니없는 금액이 지급된다는 거짓 뉴스가 판을 쳤다고 한다. 사건의 시발점이 된 태블릿 PC는 등장 직후부터 조작설과 실제 주인은 따로 있다는 거짓 선동의 단골 메뉴였다.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일했다는 한 여성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양심선언’까지 했다. 급기야 국정감사장에서 한 국회의원은 그럴싸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조작설을 주장했다. 

 

이 같은 ‘정보’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죄’, 또는 ‘진보는 믿을 수 없는 빨갱이’라는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 최신의 ‘과학적’ 정보가 되었다. 그 ‘정보’는 전파될수록 또 다른 신념이 되고, 그 신념을 받아들인 사람은 또 다른 정보와 신념을 생산하는 주체가 된다. 범죄 수사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있어 절대적 권위를 가져 왔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무조작 판정은 이미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신념과 거짓 정보가 뒤엉켜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상태에 이른 이들에게 언론은 오히려 거짓 정보를 생산하는 도구로 여겨진다. 오로지 집회 현장에서 생산되는 새로운 ‘정보’와 SNS를 통해 전파된 거짓 뉴스가 그들에게는 진실이 된다. 이에 대응해 몇몇 언론은 ‘팩트 체크’, ‘사실은’ 같은 제목의 뉴스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정치인들과 시중 소문의 진실을 규명하려 애를 쓴다. 과거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주요 언론의 뉴스를 스스로 재검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언론 현실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그나마 다행히 촛불 정국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정치권력은 ‘적폐청산’을 내걸고 진실 추구를 선언했다. 그것은 지난 권력에서 감추거나 왜곡되었던 진실에 대한 대중적 갈망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 맞서 적폐청산은 곧 ‘정치보복’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지난 대선 기간 수많은 거짓 ‘정보’를 생산했던 ‘댓글 공작’의 진실을 밝히는 일, 또는 부당하게 사용된 ‘특수 활동비’의 수혜자들을 가려내는 일이 어떻게 정치보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진정한 적폐청산은 자기 성찰로부터

적폐청산은 좁은 범위에서는 관행처럼 묵인되어 온 권력층의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바로 잡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그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정치보복’이라는 논리가 일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밑바탕에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거나, 정치인들은 모두가 부패했을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작용하고 있다. “떡을 만지면 손에 콩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거나, 큰일을 하다 보면 작은 비리는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짙게 깔려 있다.

 

국제투명성 기구가 2017년 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청렴도 면에서 100점 만점에 53점을 받아 세계 176개국 중 52위를 기록했다. 1995년 부패인식지수 조사 이후 최하위 순위였다. 게다가 이 결과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기 이전인 2014년 11월부터 2016년 9월 사이의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소위 말하는 ‘적폐’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시위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패에 대한 저항이었고, 가려진 진실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럼에도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나 ‘보수궤멸 작전’으로 이해하는 탈진실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외세에 의해 좌절된 시민 혁명의 꿈, 일본의 지배와 친일 권력의 지배, 해방 이후 독재 권력과 군부권력의 오랜 집권이라는 역사를 거치면서, 책임지지 않는 정치를 묵인해 온 탓은 아닐까? 진실 찾기를 위한 저항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 믿어버린 탓은 아닐까? 독재와 부패와 싸우면서도 어느 사이 그 부패와 독재를 익혀 버린 탓은 아닐까? 진영논리에 갇혀 내 편의 잘못에 눈감아 버린 탓은 아닐까? 삶을 지탱할 도덕성을 청문회에 등장한 정치인의 몫으로 돌려버린 탓은 아닐까?

 

신연희

신연희 서울특별시 강남구청장이 자신이 속한 그룹 채팅방에 올린 가짜 뉴스

 

물론 그렇다고 어찌 탈진실 현상이 개인의 잘못만이겠는가. SNS의 거짓 정보를 아무런 검증 없이 대중 영합적으로 기사화하는 기성 언론의 책임이 먼저임이 틀림없다.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를 자신의 SNS에 싣고도 “누군가 올렸길래….”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인들의 잘못도 그에 못지않다. 그럼에도 거짓 정보를 믿고 특정인을 지나치게 비난해 버린 후 반성하기를 되풀이하는 세태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임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적폐청산은 가짜 뉴스와 가짜 정보를 걷어내고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정보가 자본이 되어 버린 한국사회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또한 그것은 나도 모르게 거짓 정보의 재생산자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얼마 남지 않은 2017년이 탈진실의 함정에서 벗어난 2018년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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