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1-02월 2019-01-03   1844

[특집] 대학 카스트제도 맨 아래, 대학원생이 있다

특집 3_우리들의 일그러진 대학

대학 카스트제도 맨 아래
대학원생이 있다

글. 신정욱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사무국장

 

 

교수들의 비위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될 때마다, 대학들은 언제나 특정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하곤 꼬리만 잘라버린다. 남아있는 교수들은 일부의 문제를 전체 집단의 문제로 확대해석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그 누구도 왜 이런 사건이 교수 집단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지, 잊을 만 하면 사회적 이슈가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조직에서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결국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교수들의 권한이 지나치게 과한 점, 권한이 권력으로 외화 됐을 때 제대로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 핵심 문제라 본다. 따라서 교수라는 직책의 권한, 이에 내재된 권력을 심도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도교수, 학과장, 연구프로젝트 책임연구원, 보직 교수 등이 그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에 한계를 부여하고, 견제와 감시 장치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교수들 스스로에게 자정의 역할을 마냥 기대할 수만은 없다. 교수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비정규직교수, 학생 단위 구성원들이 집단화되어 주체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학에 얼룩져있는 각종 갑질, 비리와 성폭력 등의 폐단을 온전히 도려낼 수 있다.

 

교수는 교육자ㆍ연구자이지 ‘사장님’이 아니다 

이공계 교수들 상당수는 대학원생 노동 문제가 쟁점화될 때마다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학업에 전념해야 할 대학원생들이 괜히 ‘노동자 정체성’ 운운하며 ‘본전’을 요구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의 본분’을 언급하며 학생들이 현 체제에 순응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묻고 싶다. 교수란 무엇이며 그 본분은 무엇인가? 나는 교수가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대학에 고용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의 프로젝트 기반 시스템 위에서 교수들은 마치 ‘중소기업 사장’처럼 굴고 있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영업을 하고 인력을 채용ㆍ관리하고, 연구 성과를 담보로 예산을 받아오는 일련의 과정이 충분히 문제적인데도, 왜 정작 교수들이야말로 스스로 ‘사장님’이 되어버린 현실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학생들이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명징하다. 실제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움의 대가로 이미 등록금을 지불했는데도, 왜 학업으로 위장된 노동이 지속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교수들은 ‘교육자’나 ‘연구자’가 아니라 ‘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가? ‘교수의 본분’을 벗어나게 하는 현 시스템을 타파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❶

 

대학 내 또 하나의 권력 ‘보직 교수’ 

총장이 대학을 대표하는 권력이라면, 보직 교수들은 정무직 직원쯤 된다. 이 주장은 교육기관이어야 할 대학이 하나의 정치판으로 전락했음을 전제한다. 사립대학들은 이사회를 중심으로 특히 더 정치화되어 있다. 따라서 소위 ‘교수들 간에도 위계가 있다’, ‘저 교수는 총장 라인이다’ 같은 말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일개 학생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재단과 격렬하게 투쟁했던 상지대, 동국대 학생들의 사례를 참고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보직교수들은 대학 내 각종 의결기구에 참여하고 있고 각종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다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 전문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할 ‘인권센터’의 장을 보직교수가 맡는다든지, 가해교수를 징계하는 사건에 동료 교수가 징계위원으로 참석한다든지 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어떻게 제 식구를 감싸는 판결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갑질과 성희롱, 연구비 횡령 등의 혐의가 드러난 교수가 고작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 피해는 왜 고스란히 학생들이 뒤집어써야 하는가? 원론적으로 ‘보직교수’라는 직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나는 사실 우리 사회가 이 지점부터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대학원생들의 현실을 그려낸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의 한 장면. ‘착각하지마, 우린 학생이 아니라 노예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출처 고려대 대학원 총학생회

 

패러다임의 전환은 ‘대학원생 노동자성’ 

‘대학원생 노동조합’이라는 이 생소한 조직은 최근 대학가의 논란거리다. 오죽했으면 대학원생들이 노조까지 만들었을까 하는 주장에서부터, 노동자성 주장하려면 취업을 해라는 주장, 노조의 설립취지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참 다양한 반응들이 공존하고 있다. 

 

일면에서 ‘대학원생 노동조합’은 교수 권력 구조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조는 대학원생들이 처해있는 구체적인 노동 현실에 기반하여 설립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학원생 노조는 노동자로서 대학원생의 권익보호와 자유롭고 평등한 학생-교수 관계 확립, 양자 모두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대학원생 노조는 그 명칭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대학원생이 어떻게 노동자인가?”가 대표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이는 조교(행정, 연구, 교육), 이공계 학생연구원, 학회 간사, 대학 강사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대학원생의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각종 잡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학생’ 신분이라며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반기는 건 결국 대학 자본과 이에 유착해 있는 일부 교수 집단이다. 대학들은 노동법을 회피하고도 학생들을 대학 행정의 빈 곳에서 마구잡이로 소모할 수 있으며, 교수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활용하여 다른 인간을 쉽게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지금은 인권이 보편적인 이념이 된 21세기이다. 

 

대학원생 노동조합은 분명 대학원생들의 이런 구체적 노동 현실을 감안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노동이 있다면 이를 수행하는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학생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여전히 정치쟁점화에만 머무는 시도에 대해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대학원생 노예’라는 자조적인 말이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마치 노예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꼴이기 때문이다. 

 

 

강조하자면 교수 집단 전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거듭 반복되고 있는 비위 교수 사건의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자는 취지이다. 분량의 제한 상 자세히 풀어쓸 수 없었기에 다소 아쉽지만, 다만 이를 계기로 교수들이 갖고 있는 ‘권력’의 문제가 추후 자세히 논의되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모색으로 확장될 수 있길 바란다. 그 무엇보다 근대적인 사제관계를 걷어내고, 학문을 연구하는 동지이자 각자의 위치에서 노동하는 동지의 관계로 재편되기를 바란다.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❶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현 제도 하에서는 교수가 사용자처럼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나 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사용자로서 교수의 권한을 대학 또는 국가기관으로 이행하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곧 학생노동자와 대학 본부 간 노사관계로 재정립해야한다는 입장이다.



 

 

특집우리들의 일그러진 대학 2019년 1-2월 합본호 월간 참여사회 

1. 어느 교수의 부끄러운 고백 서영표

2. 그들이 대학을 사유하는 법 김정인

3. 대학 카스트제도 맨 아래, 대학원생이 있다 신정욱

4. 개정 강사법 논란, 누구의 책임인가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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