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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3월
  • 2019.03.01
  • 166

투명인간,
그들을 인간답게 하는 음악


Ⅰ 영화 <그린북>과 쇼팽의 <겨울바람>

1962년 미국,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입담과 주먹밖에 없는 백인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하여 남부 투어를 떠난다. 흑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위험한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 <그린북>은 흑인 전용 식당과 호텔이 수록된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을 가리킨다. 예상대로 남부의 인종차별은 심각했다. 피아노에 쓰레기를 쌓아 놓았고(흑인이 연주할 악기니까!) 양복점에서 피팅(fitting)도 할 수 없다 (옷을 산 뒤 수선을 해 줄 수는 있지만!). 돈 셜리는 백인 경찰의 부당한 편견 때문에 구타당하고 철창에 갇히기도 한다.

 

남부 투어의 마지막 연주회 날, 가장 화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공연 30분 전, 그날의 주인공인 돈 셜리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 호텔에서 식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고에서 먹든가, 다른 식당으로 가라고 했다. 음악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기능은 인정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동등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가든 뭐든 흑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 셜리는 분연히 연주회를 거부하고 인근 레스토랑을 찾는다. 이때 레스토랑 주인의 권유로 돈 셜리가 연주한 곡은 쇼팽의 에튀드 <겨울바람>이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영화 <그린북>의 한 장면. 주인공 돈 셜리가 쇼팽의 <겨울바람>을 연주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영화

 

폐결핵을 앓던 쇼팽에게 겨울바람은 매서운 것이었다. 불합리한 차별을 묵묵히 견뎌 온 돈 셜리의 마음에도 ‘겨울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겨울바람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차별에 맞서 자신의 존엄성을 선언하는 소리의 향연이다. 영화에서 레스토랑 손님들은 예상치 못한 클래식 연주에 압도되어 열렬한 갈채를 보낸다. 돈 셜리는 레스토랑 전속밴드와 어울려 즉흥연주를 이어간다. 남부 투어의 대미를 장식한 이 즉흥 연주회에서 사람들은 피부색을 뛰어넘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을 발견한다. 

 

쇼팽 에튀드 Op.25-11 <겨울바람> 

연주 예프게니 키신 

이 동영상을 보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Chopin Winter Wind Kissin을 검색하세요

 

 

Ⅱ ‘투명인간’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예술가의 자유를 갈구했고 인간으로서 존중받기를 원했다. 그는 25살 되던 1781년, 잘츠부르크 통치자 콜로레도 대주교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음악가를 하인 취급하던 봉건질서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해 초 뮌헨에서 오페라 <이도메네오>를 초연한 모차르트는 빈에 머물던 콜로레도 대주교 일행과 합류했다. 대주교가 볼 때 모차르트는 하인 주제에 허락도 없이 1달 이상 무단결근을 한 셈이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불한당, 파렴치한, 배은망덕한 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모차르트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계속 하인 노릇을 해야 하냐”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뒤에 이어지는 모차르트의 말은 그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음을 짐작게 한다. 

“사람들은 제가 음악을 할 때는 다들 찬탄하지만, 돌아서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죠. 대단한 사람 취급을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느 정도 중요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궁정 하인 노릇에 만족했다면 그의 예술혼은 질식했을 것이다. 그는 자유를 요구한 끝에 그해 6월 8일, 콜로레도 대주교의 부관인 아르코 백작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다. 최초의 자유음악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모차르트는 그때부터 세상을 떠난 1791년까지 10년 동안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당대 권력자였지만, 예술이 인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이며 정치권력보다 오래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Ⅲ 류재준의 <진혼교향곡>

작곡가 류재준 씨가 예술감독으로 10년 동안 이끌어 온 서울국제음악제가 올해 난관에 부딪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서울국제음악제의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했다는데, 그 사유 중 하나가 참으로 웃프다. 음악제에서 예술감독의 작품을 연주하는 게 문제라는 거였다. 류재준 씨는 “해외 음악가나 음악관계자가 안다면 농담으로 생각할 만큼 어처구니없다”고 했다. 2008년 폴란드 베토벤 부활절 축제에서 초연되어 유럽 음악계가 절찬한 그의 <진혼교향곡>은 1회 때 폴란드 방송교향악단이 연주했고, 10회에서 폴란드 최고의 연주단체인 심포니아 바르소비아가 다시 무대에 올렸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걸작인데 단지 예술감독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배제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문화예술위원회의 예산 삭감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결국 시민들이다. 서울국제음악제의 로컬 티켓 프라이스 프로젝트(Local Ticket Price Project)는 해외 연주단체를 현지에서 관람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티켓을 제공해 왔다. 그런데 예산이 삭감되면 불가피하게 티켓 가격이 올라가고, 음악회의 문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류재준 씨는 윤이상, 진은숙의 뒤를 잇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글로리아 아르티스 훈장을 받는 등 세계무대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친일 논란이 있는 홍난파 음악상을 거부하는 등 우리 음악계에서 드물게 의식 있는 음악가로 꼽힌다. 박근혜 정부에 밉보여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1호로 고초를 겪었고, 그 때문에 병을 얻어서 3년째 투병 중이다. 이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는 등 예술혼을 불태웠고 지난해 제10회 서울국제음악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그의 활약에 새 정부가 찬물을 끼얹었다니 참담할 뿐이다. 

 

돈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진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강퍅해도 우리 삶을 지탱해 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예술이다. 숭고한 예술에 헌신하는 재능 있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문명사회의 상식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갖춰야 할 이 상식은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더욱 절실해 보인다.  

 

류재준 <진혼교향곡> 

연주 폴란드 라디오 방송교향악단   소프라노 김인혜

이 동영상을 보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류재준 진혼교향곡을 검색하세요

 


글. 이채훈 클래식 음악사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클래식 400년의 산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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