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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3월
  • 2019.03.01
  • 272

특집3_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법 앞에
불평등한 조선인 

글.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3·1운동 당시 유죄판결 대부분은 보안법 위반

3·1운동 이전까지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에 선정을 베풀어 문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영국·미국 등 열강에 선전해 왔었다. 그런데, 그들이 문명화시켰다는 한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항일 독립 운동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일본은 운동을 초기에 주도한 종교계·학생계 대표 48인을 내란죄로 몰아 무기징역 또는 3년 이상 징역에 처하고자 했다. 경성지방법원의 담당 예심판사는 이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경성지방법원(오늘날의 서울지방법원)이 아니라 고등법원(오늘날의 대법원)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하여 고등법원으로 넘겼다. 그러나 이 사건의 예심종결 결정서를 받은 고등법원은 이 사건이 “폭동을 수단으로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라고 교사한 목적”이 없으므로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관할 재판소를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다. 

 

사건은 다시 경성지방법원으로 돌아가서 1920년 7월 16일 첫 공판이 열렸다. 그런데 변호를 담당한 허헌 변호사가 고등법원은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한다”고 했을 뿐, “경성지방법원으로 사건을 송치한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재판을 열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논쟁이 오가고 담당 재판장 다치카와는 결국 기소를 받지 않겠다고 판결하였다. 이에 불복한 검사가 경성복심법원(오늘날의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고 경성복심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 대부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내란죄가 아니라 「출판법」 「보안법」 위반죄로 최소 징역 1년에서 최대 징역 3년형을 받았다. 3·1운동 과정에서 체포되어 검찰로 송치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7천 8백여 명 중에도 70%가 「보안법」 위반, 24%가 형법의 소요죄 위반으로 처벌되었다. 

 

이렇게 보면, 1910년대의 재판은 오늘날과 같이 엄정한 법리 논쟁을 수반하면서 이루어지고,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은 듯하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때 한국을 식민지가 아니라 규슈, 홋카이도와 같은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다고 선전하였기에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은 법체계 하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는 듯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3·1운동 관련 처벌에 가장 많이 적용된 「보안법」 일부(왼쪽)와 1920년 민족대표의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일부(오른쪽) 

출처 국가기록원

 

 

일본과 같으면서도 같지 않았던 형사재판

그러나 일본은 한국을 일본 영토라고 하면서도 조선인에게는 기본권과 참정권, 권력 분립 등을 규정한 일본 헌법을 실시하지 않았다. 한국의 문명 수준이 일본에 비해 뒤떨어지고 풍속이나 관습도 다르기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국민으로 동화될 때까지는 차별적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형사·민사 관련 법률도 특별 조항을 두거나 일본과 유사하면서도 법체계가 다른 법령을 실시하였는데 형사재판과 관련해서는 「조선형사령」 「범죄즉결례」 「조선태형령」 「경찰범처벌규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법령은 일본과 다른 규정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조선인을 차별대우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예심판사의 권한에 속하는 수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17년 상영된 영화 <박열>에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 국왕을 폭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된 박열에 대해 예심을 진행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때 예심판사는 박열과 그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심문실에서 접견하게 하고 두 사람이 다정하게 포옹하는 사진까지 찍게 할 정도로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심제도는 해방 후 폐지되었지만, 원래 예심제도의 목적은 그처럼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예심판사가 아니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예심을 담당하여 강제 수사나 물건 압수를 했고, 그들이 작성한 예심결정서와 피의자 신문서 등이 재판에서 절대적인 증거로 수용되었다. 게다가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할 수 있었다. 일본 검찰과 경찰관은 이를 이용하여 피의자를 1∼2년간 장기 구금해 두고 고문을 자행하여 그들 입맛에 맞는 진술을 받아내었다. 해방 후 예심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이 같은 수사 관행은 대한민국의 검찰·경찰에 그대로 계승되어 장기 구금과 고문 수사가 자행되는 바탕이 되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1908년 당시 조선고등법원, 경성공소원, 경성지방법원의 모습. 오늘날 종로2가 제일은행 본점 자리

 

가혹한 법 적용과 오늘까지 이어져온 악법들 

한편 「범죄즉결례」 「경찰범처벌규칙」 「조선태형령」은 삼위일체로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옥죄었다. 「범죄즉결례」는 구류, 과료, 벌금, 태형에 처할 죄는 재판소까지 가지 않고 경찰서 또는 경찰분서장을 맡은 헌병장교가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증거를 조사한 후 즉시 판결을 선도하는 즉결심판 관련 규정이다. 즉심 대상 범죄는 형법이나 기타 법령에도 많이 규정되어 있지만, 대표적으로 「경찰범처벌규칙」에 87개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항목은 언론·집회, 관권 도전, 위생 문란, 공공건조물·사유물 침해, 사회질서·도로교통 교란, 경제 질서 교란, 부랑 행위, 무허가 의료, 맹수·가축류 방치, 방화·화재 등이다. 이 중에는 오늘날의 경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도 있지만, 단체 가입 권유, ‘불온’ 문서 등의 게시·낭독·반포, 관공서 소환 불응, 경찰관서의 지령·명령 위반 등의 행위도 있어, 조선인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저촉되면 경찰서로 끌고 가 즉결 심판을 내릴 수 있었다. 

 

태형은 위와 같은 경찰범, 3개월 이하의 징역·구류, 1백 엔 이하 벌금·과료에 처해야 할 자 중 거주가 일정하지 않거나 재산이 없다고 인정될 때 실시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태형이 1880년에 폐지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대한제국기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일본은 막대한 감옥 경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국에서 태형을 폐지하지 않고 가능하면 구류·징역보다 태형을 선도하도록 하였다. 1910년대 태형이 가장 많이 선도된 범죄는 도박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이 절도·강도, 삼림령 위반, 사기·공갈, 살인·상해, 경찰범 순서였다. 

 

1910년대 내내 즉결심판을 하거나 조선인을 단속 체포한 것은 헌병경찰이었다. 이들은 법률 소양이 거의 없이 범죄 즉결과 민사 소송 등 사법관 직무를 행하였는데, 한국어·풍속·관습을 모르는 자가 태반이었다. 헌병경찰은 조선인에게는 무단정치의 상징으로 일본 국내의 언론인, 정치가들에게도 개혁 대상이었다. 

 

이러한 차별 외에도 1907년 제정된 「출판법」 「보안법」이 조선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출판법」은 “국교를 저해하거나 정치체제를 변혁하거나 국헌을 문란하는”, “외교와 군사 기밀에 관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하는” 문서와 그림을 출판하는 행위를 처벌하였다. 「보안법」은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론과 행위, 또는 타인을 선동, 교사, 사주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를 거주지에서 축출하거나 태형 또는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기본권 억압은 1925년 「치안유지법」에 의해 보완되어 조선인의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즉,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을 가진 단체나 개인을 무조건 처벌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경찰·검찰은 위의 목적을 입증하기 위해 위에 열거한 특별 규정을 이용해 무기한 장기 구금과 고문을 통해 수많은 학생·노동자·농민의 민족해방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억압 통제하였다. 

 

「치안유지법」은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억압 통제해 오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을 가진 단체나 개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법률 모두 ‘목적’만 입증하면 되기 때문에 무자비한 고문과 장기 구금을 통해 피의자로부터 ‘목적이 있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 되었던 것이다.  

 

 

 

특집. 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2019년 3월호 월간참여사회 

1. 보통사람들의 3·1운동 조한성

2. 유관순의 친구, 유관순의 동지 장영은

3. 법 앞에 불평등한 조선인 도면회

4. 같은 경험, 다른 기록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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