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9월 2019-09-01   2915

[만남] 그녀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 정미영 회원

창립 25주년 특별 인터뷰 

그녀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정미영 회원

월간 참여사회 2019년 9월호 (통권 268호)

“딸만 일곱을 둔 서울토박이 집의 막내. 몸소 정직함을 보여준 아버지와 지혜로운 어머니 사이에서 엄하게 자랐다. 세상에 내놓을 만한 빼어난 행적은 아니지만 삶의 의미를 담고자 애썼고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에 책무를 다한 점이 무엇보다 떳떳하다.” 그녀의 책 『멋진 노년의 길을 걷다』 속 ‘정미영’이란 세 글자 밑에 달린 소개 글이다. 1948년생이니 그녀의 나이 올해로 일흔둘. 7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낸 끝에 스스로 ‘떳떳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를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내게 왔다. 

인생의 징검다리, 기부 

자신의 이름으로 된 보험들을 참여연대에 유증한 그녀는 지난 2월 열린 참여연대 제25차 정기총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한 개인으로서 이 사회에 책무를 다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이런 인사말을 남겼다. 

“참여연대 때문에 얻은 게 많아요. 그래서 참여연대가 늘 너무 고마웠어요. 제가 올해 일흔둘입니다. 일흔한 살 생일 때 71만 원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일흔둘 생일에는 72만 원을 하려고요. 일흔셋 때는 73만 원, 그리고 80세가 되면 80만 원, 이렇게 생일 때마다 기부하려고요. 여러분들도 노후에 이런 계획들을 한번 세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런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하게 된 걸까?

“다른 단체보다 참여연대 간사들은 오래 남아 있더라고요. 자꾸 보다보니까 정이 들어가지고 여기 오면 전혀 낯설지 않아요. 1년 만에 와도 아는 얼굴들이 반겨주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런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여기에 뭘 해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70이 넘으니까 내가 나이만큼 뭘 베풀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생각하게 됐고. 80세에 이르면 한 천만 원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냈어요.”

‘현모양처’라는 어릴 적 꿈과 달리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일생은 한 남자와 한평생을 살며 함께 늙어가는 길보다 세상의 빈 곳을 메우는 일과 더 깊게 인연이 닿았다. 그녀의 또 다른 책 『내 인생의 징검다리, 기부』. 이 짧은 제목엔 그보다 더 길고 묵직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어쩌다 보니 제가 희망제작소 기부 커뮤니티인 ‘1004클럽’ 1호가 되었어요. 박원순 변호사님이 사법연수원생이던 시절 제가 법원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땐 얼굴만 알던 사이였죠. 근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희망제작소가 탄압을 받기 시작했어요. 변호사님을 도와주던 기업체들이 정권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 떠나자 재정적인 문제로 많이 힘들어졌죠. 이분을 도울 길이 없나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제게 적금이 만기된 게 있었어요, 천만 원짜리가.”

돈과 함께 직접 쓴 편지를 봉투에 넣어 전했다. 이 돈을 디딤돌 삼아 힘든 시기를 잘 건너가길 바랐던 그녀의 마음. 그 따뜻함은 ‘1004클럽’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준 이들 덕분에 정권의 핍박과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던 단체는 다시 뜻을 곧추 세울 수 있었다.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사실 우리 세대는 사회 전반에서 혜택을 받은 세대예요. 요새 젊은 사람들에 비하면 가진 게 많아요. 집 한 채를 갖고 살았어도 집값이 폭등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진 게 많은 거죠. 물론 우리 모든 세대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젊은 세대에 비해서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그만큼 내어 놓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내가 번 것도 아니고 프리미엄처럼 올라간 것이다 보니 이건 내 거가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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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3일 열린 참여연대 제25차 총회에서 감사패를 받고 있는 정미영 회원 모습 

삶에 의미를 담다

애정을 가진 단체에 보험을 유증하고, 생일날 나이만큼의 기부를 하며, 몇 년간 다달이 부은 적금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 이 쉽지 않은 일들을 덤덤히 해 나갈 수 있는 그녀의 넉넉한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도 모르겠어요. 천성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머니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중3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 이후로 엄마가 살림을 꾸리셨으니까 여유라는 게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어요.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품위가 있는 분이셨어요. 자식들에게 매를 든 적도, 화풀이로 험한 말을 하신 적도 한번 없으셨죠. 불자였던 어머니께 보시普施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불자에게 ‘보시’는 당연히 여기는 실천 행위예요. 그저 평소에 어머니께서 툭툭 던져주셨던 말들이 기억에 남아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서른이 넘도록 혼자 지내는 딸에게 어머니는 물으셨다,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딸은 사회복지와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런 막내딸에게 어머니는 가장 많은 유산을 남겨주셨다. 딸에 대해, 딸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어머니는 그렇게 강한 믿음을 보여주셨다. 

“여상을 졸업하고 경리를 하다 다시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이후엔 사서라는 직업을 얻어 공무원이 되었고 그러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국립사회복지연수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죠.”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은 그녀가 살고자 했던 삶과 꿈의 거대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서울에 사무실을 얻어 노인복지사업을 시작했죠. 굳이 노인과 관련한 일들을 선택한 건 어머니 때문이에요. 그렇게라도 어머니를 기리고 싶었죠.”

불우한 노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 말고는 딱히 노인복지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시작한 일은 요즘 확대되고 있는 요양보호사 제도처럼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직접 방문해 돌봐주는 일이었다. 

“이윤 같은 건 생각지 않고 연회비 정도만 받았어요. 서비스를 이용하는 분들의 반응도 무척 좋았고, 이전엔 없던 사업을 하다 보니 언론사들의 주목도 많이 받았죠. 근데 그렇게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IMF 사태가 터졌어요.”

또 다시 소중한 인연을 만나다

“무척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말씀을 못하시는 노인들은 눈빛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기도 하고…. 그렇게 6년간 해 오던 일을 그때 접어야 했죠.”

어머니의 유산 중 일부로 양평에 땅을 사 둔 것이 있었다. 언제가 이 땅을 터전으로 노인복지사업을 본격적으로 일궈보리라, 그런 꿈이 깃든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원예치료사 자격증까지 따가며 11년 동안 그곳을 가꾸고 관리했다. 

“그 땅을 굉장히 예쁘게 가꿨어요.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면서 노인복지에 원예치료를 접합해서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도 생각했는데. 근데 혼자서 노인복지 사업의 토대를 만들어간다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돈도 너무 많이 들어가고. 양평군청에 문의를 해봐도 정부가 지원하는 복지 사업만 권하더라고요. 그런 사업은 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 끝에  그 땅을 기부하기로 마음먹었죠. 어차피 사회 복지도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계획한 일이었으니까 꼭 노인 복지 사업만을 고집할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순간 떠올린 사람이 바로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변호사였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았고 연수생 시절 인연을 기억하던 그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등기부등본을 건네며 변호사님이 이걸 맡으셔서 좋은 데 쓰시면 좋겠다, 그렇게 기부약정식을 하게 되었어요.”

그와 만난 날 그녀가 건넨 것은, 막내딸을 향한 어머니의 굳건한 믿음과 세상을 향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그녀의 염원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인연은 다시 이어졌고 그녀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시민단체 쪽으로 흘러갔다.  

“지금 기부하고 있는 단체는 한 18곳 정도예요. 한 달에 후원금만 30만 원 정도 나가죠. 제가 남들보다 더 여유가 많아서 기부를 하고 후원을 하는 건 아니에요, 주위를 둘러보면 여유가 있어서 기부를 한다기보다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나이가 60~70대인데도 후원하기 위해 노동일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그런 분들 보면 정말 너무 감동적이에요.”

외롭고 고단한 인생에서 나와 뜻이 맞는 이들과 단체를 만나 그들을 후원하고 응원하는 일. 그녀는 그 일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어떤 단체의 지향점이 나의 가치관과 딱 맞아떨어질 때, 그곳에서 개인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열심히 해내줄 때 굉장한 위로를 받죠.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연들도 너무 반갑고요. 나는 하나를 줬는데 오히려 여러 개를 돌려받는,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일은 그런 일이라 생각해요.”

기부와 후원이 가진 의미에 대해,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기부와 후원을 하는 시민들을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녀는 길게 이야기했다. 오랜 경험과 지혜에서 퍼 올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시베리아에 살고 있다는 한 소수 부족을 떠올렸다. 

시베리아 남쪽 끝 투바에는 카라하크 족이 산다. 그들의 수량 개념은 실제 개체 수나 부피와 아무 관련이 없고, 어떤 물건이 땅을 얼마나 많이 덮을 수 있는가 하는 것하고만 관련이 있었다. 그들에게 수량이란 측량의 개념이 아니라 배열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물물교환에서도, 개인이 필요한 것 이상은 얻으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계량 기구는 불필요했을 터다. 그들은 남들과 똑같은 집 한 채를 짓는 데 필요한 목재 그 이상은 가지려 하질 않았다. 

리처드 와이릭 『너의 시베리아』 중에서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카라하크 족의 영혼이 눈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시베리아의 광활한 들판을 끝까지 하얗게 뒤덮은 눈을 보며 그들은 ‘많이’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을 배워나갔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남들과 똑같은 집 한 채를 짓는데 필요한 나무 그 이상의 것은 지니려 하지 않는, 눈처럼 거대한 영혼을 가진 또 한 명의 사람을 나는 만났다. 

삶은 채우기보다 비우는 것  

“혼자 산 지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혼자 산다는 건 무수한 것들에 저항하고 부딪혀야 되는 일이에요. 요즘 젊은이들 중엔 혼자 사는 이들이 많잖아요. 그들 중에는 그런 삶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동안 혼자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어요.”

평생 딱 세 권의 책을 내고 싶다는 그녀. 그녀의 첫 책 『멋진 노년의 길을 걷다』를 다시 펼쳐 마지막 문장을 읽는다. “남은 인생의 길목에서 좋은 도반으로 거듭나는 면모를 지니도록 마음을 일구겠습니다.” 그 옆엔 그녀가 직접 찍었다는, 함초롬하게 고개를 숙인 자줏빛 할미꽃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러고도 책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고마운 사람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제목 아래로 70여 년간 그녀가 맺어온 감사한 인연들이 줄을 잇는다. 

박원순 변호사로 시작하는 그 리스트엔 시민단체 사람들, 작가, 교수들의 이름과 더불어 양산네 아주머니 댁, 이름 모를 옆집 할머니, 약사 아저씨, 포클레인 기사, 어릴 적 동무들도 나란히 적혀 있다. 남들과 똑같은 집 한 채를 짓는 데 필요한 것만을 남기는 삶, 채워가기 보다 비우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인생. 그 끝에서 그녀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바로 이 이름들이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제목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따온 것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9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이한나 미디어홍보팀 간사

녹취. 조연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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