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11월 2019-10-29   941

[읽자] 지나가는 일은 없다 모두에게 남는다

지나가는 일은 없다
모두에게 남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각자의 삶으로 넘어오면 대개 지금 닥친 상황이 가장 큰 고민거리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에게 직접 연결되거나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곳의 사정이 어떠하든 그곳에 얽힌 이들의 삶이 어떠하든, 문제를 종종 떠올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데 애를 쓰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간이란 돌고 돌기에 맞춤한 때가 되면 (당연히 그곳에서는 늘 맞춤한 때이고 이곳의 맞춤한 때는 너무 늦기 일쑤겠지만) 되돌아보고 되새길 기회를 마주하기 마련이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시간을 앞당길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 그곳에 가까워질 수는 있으니, (불행 중 다행에서 멈추지 말고) 모두에게 남은 일을 이제라도 모두의, 지금의 일로 만들어보자고 말을 건네는 책을 만나보자.

 

그때도 지금도 싸우고 있는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 

 

밀양 송전탑 이야기를 건네면 이미 끝난 일 아니냐는 반응이 적지 않을 텐데, 새로운 송전탑 계획이 나올 때 누군가 밀양 송전탑을 떠올린다면, 원자력 발전이나 수도권·지역 이슈를 마주할 때 그곳의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상황과 방향이 어떻든 그 일은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이 책은 그곳에서 살다 그곳에서 싸웠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며 싸우는 ‘밀양 할매’들의 이야기다. 그림 재료가 아깝다며 쭈뼛대던 그들이 색, 얼굴, 몸을 지나 송전탑과 이를 둘러싼 투쟁까지 담아내는 과정을 그들의 그림과 목소리로 전한다. 송전탑 옆에 자신들이 아니라 꽃과 나무를 그리는 그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공감은 하게 될 것이다.

 

참여사회 2019년 11월호(통권 270호)

송전탑 뽑아줄티 소나무야 자라거라 / 글 김영희 그림 밀양 할매 / 교육공동체벗 

 

“예전에는 높은 데 올라서 데모하는 노동자들 보믄 세상에 저런 빨갱들이이 다 있나, 저놈들 때문에 나라 망한다 그랬는데 요새는 그런 생각 안 한다. 오죽하믄 올라갔을까, 오죽 이야기 들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저 높은 데 올라가서 저러고 있을까 싶은 게 똑 내 마음하고 똑같드라카이. 나도 마 송전탑에 올라가가 마 양껏 소리치고 싶으니까이.”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론의 마당에서 누군가의 ‘말’은 계속해서 지워지거나 처음부터 배제된다. ‘탈핵’과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는 ‘밀양 할매’의 ‘말’은 이 마당에서 어떤 자리를 갖고 있을까? ‘밀양 할매’의 ‘말’이 드러날 수 있는 자리,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는 자리가 ‘여기 이 마당’에 있기는 한 것일까? 들어 주는 이 없는 ‘말’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이 땅에 ‘첨탑 위의 말’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목소리’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땅 위에서는 이 ‘목소리’를 들으려는 이들이 없어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외치게’ 되는 것이다.  

– 본문 7쪽 가운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거스를 수 있는 힘 
 

2011년 3월 11일 이후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보며 이날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무엇을 잊지 않을 것인지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곳에 남은 동물의 이야기라거나 여전히 그곳에서 농사를 이어가는 이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기억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결국 그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이해의 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당시 학교 구성원의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초등학교 이야기를 마주한다. 대피할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왜 운동장에서 우리가 여전히 짐작하지 못할 어떤 상황을 겪었던 걸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힘과 그 말을 거스르는 새로운 말의 힘을 연이어 읽어가며 내가 되뇌어야 할 말과 덧붙일 말이 무엇일지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참여사회 2019년 11월호(통권 270호)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 – 쓰나미에 빼앗긴 아이들의 목소리 / 리처드 로이드 패리 / 알마

 

소송에 참여한 가족은 주부, 소목장이, 건설업자, 공장 노동자 들이었다. 아무도 법의학 조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시골 바깥의 이 평범한 사람들이 반대심문을 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시오카가 말했다. “그들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일련의 조사를 잘 따라가며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매우 영리한 사람들입니다.” 요시오카는 설명회를 위해 가족들에게 예행연습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한 적게 개입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때때로 거칠어졌지요., 사람들은 흥분해서 ‘멍청이! 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말들은 법적인 면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대면해 슬픔의 말들을 듣고 죽은 아이들의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을 보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공무원들이 어쩔 수 없이 응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본문 265쪽 가운데 

 

이슈가 사라질 즈음 이슈가 남긴 것들 돌아보기 

 

인터뷰는 의외로 빠른 대화다. 매일 진행되는 라디오에서, 일간지와 주간지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대화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로 단행본을 엮으며 한 발 늦은 대화를 나눠온 이가 있다. 바로 단행본 인터뷰집의 개척자 지승호다. 이슈를 발 빠르게 쫓아가며 해소하는 인터뷰가 아니라 그 이슈가 사그라들 즈음에 은근한 대화로 그 이슈가 남긴 것들을 좇아가는 인터뷰다. 2002년 이후 그가 전한 50여 종의 책은 한편으로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인물들일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역사라 하겠다. 왜 숱한 인터뷰이들이 그의 제안에 응하며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지 늘 궁금했는데, 이번 책은 시원한 해답을 전하며 대화가 왜 그토록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참고로 이번 책에서 만난 인물들은 김승섭, 김규리, 강원국, 목수정, 강용주, 이은의, 주성하, 서지현이다. 

 

 

참여사회 2019년 11월호(통권 270호)

타인은 놀이공원이다 – 두근두근, 다시 인터뷰를 위하여 / 지승호 / 싱긋

 

인터뷰를 하면서 느꼈는데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살았는지 몰랐다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말을 세상에 쏟아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어느 순간부터 자꾸 지금만 보고 있는데요, 물론 과거에서 적당히 벗어나야 하고,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게 맞지만 과거 없이 현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한테 유리한 것만 자꾸 기억하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종종 잊는데요. 인터뷰를 하면서 그게 환기된 부분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리프레시가 됐어요. ‘아하’가 아니라 ‘아, 그랬었지’ 같은 리프레시요. 완성된 인간이라는 건 없어요. 끊임없이 돌아봐도 이 지경인걸요.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덕분에 돌아보게 됐습니다. 깨진 거울로는 사물을 제대로 비출 수 없죠.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을 잘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됐습니다. 

– 본문 179쪽, 이은의 변호사 인터뷰 가운데

 


글. 박태근 알라딘 MD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인문MD로 일했습니다.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으로 출판계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매체에서 책을 소개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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