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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9년 12월
  • 2019.11.28
  • 530

김지영 씨와 동백이, 
그리고 향미들 

 

‘알파걸’을 꿈꿨으나 ‘맘충’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

뉴밀레니엄 20년을 맞게 되는 올겨울,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가 동아시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과 각자도생 등 이 시대의 비극이 연예, 결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남성청년으로 일컬어질 때, 이 밀레니얼 세대 여성의 텅 빈 얼굴이 나타났다. 멈추지 않고 고군분투했지만 어떤 자리에 멈춰버린 여성들은 ‘김지영 씨’의 모습에서 자신의 표정을 찾아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지만 이전 세대보다 못 살게 된 청년들의 현실. 그러나 여성 청년들은 다시 유사 이래 최고, 심지어 남성들보다 높은 대학진학률에도 불구하고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삶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임신과 육아 등의 이유로 경력단절을 겪는다.

 

바야흐로 ‘알파걸’을 꿈꿨으나 ‘맘충’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여성들에 대한 공감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반복된 이웃집 소녀들의 첫사랑 찾기는 이제 더 이상 환영받지 않는다.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❶ 혹은 대중화 이후, 이들 밀레니얼 이후의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비혼과 비출산을 다짐하기도 한다. 이제는 불가능해진 사회안전망을 따뜻한 가부장 중심의 핵가족에서 찾으려는 노스탤지어도 시효를 다했다. 소설 속 가정적인 남편 ‘김대현 씨’가 원하는 단란한 삶은 가정을 담당하는 김지영 씨에게는 공허한 일상의 연속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원래 김지영 씨는 가부장의 씩씩한 ‘개딸’인 동시에 탈정치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주목받던 ‘촛불소녀’이자 ‘배운녀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이들과 그 후신들이 민주주의 완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호전적인 목소리를 높여왔던 것이다. 나의 가족이거나 혹은 옆집 이웃일지도 모르는 이 여성들이 온라인 혹은 광장으로 모이고 또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페미’인지 ‘메갈’인지 모를 존재가 됐다. 그리고 단지 이들만이 2016년 강남역 살해사건이라는 또래 여성의 죽음에서 여성혐오에 의한 페미사이드Femicide❷를 알아챘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12월호(통권 271호)

KBS 드라마 <동백꽃 필무렵>의 한 장면 ⒸKBS

 

자신의 이름대로 살아갈 수 없는 여성들

그래서 나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등장인물 ‘향미’(손담비 분)를 떠올린다. “불타지 않는 마녀는 없다”고 말하는 연쇄살인범에게 주인공 ‘동백이(공효진 분) 대신 죽임을 당한, 그래서 지금도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인물, 향미를 생각한다. 좋아하는 ‘짜글이에 소주’를 요청해놓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향미를 기다린다. 동백이와 향미는 둘 다 ‘옹산’이라는 유사 ‘씨족’사회에 속하지 않는, 근본 모를 외지여성들이다. 그러나 손목과 웃음은 팔지 않고 오로지 술만 판다는 동백이와 달리 향미는 ‘민간인’이 아니었다. 공짜 술을 위해 손님상에 앉기를 마다하지 않는, 과거 섹슈얼리티를 거래하는 업종에 종사했던 여성이다.

 

그래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백이와 달리 향미는 자신이 부양했던 동생에게조차 “누나 뭐 하고 사는지 대충 안다”며 부정당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동명의 꽃말처럼 모두가 동백이를 사랑하지만, ‘물망초’라는 이름의 술집 딸이었던 향미는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물망초의 꽃말과 달리 쉬이 잊히는 존재다. 옹산에 정착해 살고자 하는 동백이와 달리, 향미에게는 그곳이 어디든, 결국 가보지 못한 자신의 이상향 코펜하겐을 가기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이다. 다들 향미를 단편적으로만 기억할 뿐이고, 그의 진짜 ‘고운’ 이름은 죽음 이후에야 짧게 드러난다. 그리고 동백이를 둘러싼 로맨스가 온 동네에 회자됐던 것과 달리, 향미의 스캔들은 지뢰 밟은 것처럼 여겨진다. 

 

스스로를 ‘비단’이 아니라 ‘삼베’라고 말하는 향미. 그녀처럼 원래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여성들은 누구일까. 오로지 비슷한 처지의 동백이만이 밥상을 나누고 장례를 치러줬던 이 여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아직도 여전한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를 둘러싸고 김지영 씨처럼 정상가족을 이뤘으나, 아무도 모르게 삶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동백이처럼 누구에게나 이름만으로 낮춰 불리지만, 하마처럼 굳건하게 살아가는 한부모 가정의 여성도 있다. 이들 여성서사의 연쇄에 이제 향미들의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까.

 

‘여성서사’의 연쇄를 바라며

드라마 <시그널>(2016)과 <라이프 온 마스>(2018)에서 첫사랑의 시절로 회자되는, 그나마 살기 좋았다며 ‘응답하라’던 바로 그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쇄살인 사건이 드러났다고 했다. 오늘날 여전히 강력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이틀에 한 명 꼴로 친밀한 관계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 위협을 받는 여성들이 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사바하>(2019)에서는 특정 나이의 여아들이 주술적 이유로 살해되는 것을 그리기도 했다. 이는 초음파를 이용한 태아 성감별이 가능해진 이후, 남아선호로 출생성비가 극도로 불균형했던 현실과 연동될 것이다. 그리 먼 시기도 아닌 가까운 과거의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혹은 통째로 사라졌다.

 

그처럼 공동체 안팎에서 이름 없이 존재한 많은 ‘향미들’은 그래서 죽음으로써만 드러날 수 있었고 역사를 가진 의미 있는 온전한 개인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단지 시체1, 시체2, 시체3으로 등장하거나 죽음 앞 공포의 순간에 박제된 피해자들로만 소구되어 왔다. 그러나 ‘김지영 씨’에 이어 ‘동백이’, 그리고 그 옆에서 ‘향미’의 서사가 나란히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있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너도 나 잊지 마. 엄마니 동생이니 다들 나 제끼고 잘 사는데, 너 하나는 그냥 나 좀 기억해주라. 그래야 나도 세상에 살다 간 것 같지.”향미들의 목소리에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다. 더 많은 여성서사가 보다 멀리 엮여나가기를 바란다. 

 

2015년 전후로 대한민국의 페미니즘 붐업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고안한 개념. 동명의 논문과 단행본이 있다

여성을 뜻하는 ‘female’과 살해를 뜻하는 ‘cide’의 합성어로 여성혐오적 살해, 동기와 이유가 여성이라는 점만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뜻함 

 


글. 류진희 원광대 HK+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다. 탈/식민 서사, 장르, 매체를 횡단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관심 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소녀들』, 『그런 남자는 없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을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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