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2020년 07월
  • 2020.07.01
  • 523

제주청년 양용찬
“제2의 하와이보다는…” 

 

 

제주도민 없는 ‘제주도개발특별법’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 이후 청년들의 희생에 더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까지 감행되었던 공안정국 속에 31년 만에 부활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3당 합당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던 민자당이 전국적인 압승을 거뒀으나, 제주도에서만큼은 민자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 이면에는 당시 중앙정부와 민자당 주도로 졸속 추진되던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무소속 후보들의 당선이 자리해 있었다.

 

1991년 5월 공개된 이 법안은 ‘제주도 2차 종합개발계획’과 함께 땅 주인이 팔고 싶지 않아도 법적 매입을 가능하게 하는 ‘토지수용권’ 등의 독소조항을 포함, 제주도민은 철저히 소외된 상태에서 진행됐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외지의 집권자들은 한결같이 제주를 관광과 개발을 위해 존재하는 섬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겨왔다. 그들의 등에 올라탄 경제적 이익 앞에, 자연을 훼손하고 농촌 토박이들의 사회를 해체시키는 일은 늘 부차적 문제였다. 

 

양용찬은 제주 남쪽 물웅덩이가 많고 커다란 팽나무들이 지키는 서귀포 남원읍 신례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 중 셋째로 속 깊은 아들이었던 그는,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형제 중 첫 번째 대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제주도민이 농업에 종사하던 당시 현실 속에서 그는 전역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타일공으로 밥을 벌어먹으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7-8월 합본호 (통권 277호) 

양용찬1966~1991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제랑 일어납서> 중에서 ©미디어열매

 

관광지 이전에 누군가의 삶의 터전인 제주

1991년 당시는 동구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협정 등 블록화로 세계사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루과이라운드UR❶ 농업협정은 한국 농민들에게 많은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양용찬은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의 농민사랑모임 대표를 맡으며 2년 동안을 제주의 농업과 지역 문제를 알리는 데 헌신했다. 

 

스무 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희생이 이어졌어도 변하는 것이 없던 1991년의 현실 속에서, 양용찬은 농협 연쇄점에서 수입 오렌지로 짠 주스를 보고는 판매 중지를 요구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돌렸다. 이렇게 작은 배신감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일들은 사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양용찬은 그런 일을 마주칠 때마다, 자신과 농민들을 지킬 사람들은 자신밖에 없다는 절박함과 위기감에 닿았을 것이다. 

 

같은 해 11월 7일 저녁, 일을 마치고 작업복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청년회 사무실로 들어온 그는 사무실에 있던 회원들에게 목욕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선 곳은 청년회 건물 옥상이었다. 그는 유서를 남긴 채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투신했다, 지나가던 사람의 신고로 서귀포 의료원으로 급히 옮겼지만 8시 30분경 숨을 거뒀다. 

 

“(…)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도를 원하기에 특별법 저지, 2차 종합개발계획 폐기를 외치며 또한 이를 추진하는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이 길을 간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삶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작별 인사도 담겨있었다. 그의 희생 이후 법 제정 반대 여론은 더욱 드세게 번져나갔지만, 제주도개발특별법은 그해 말 민자당 의원들의 단독 상정으로 통과되었다.  

 

제주는 지금도 여전히 과잉개발과 과잉관광에 몸살을 겪고 있다. 강정 군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해군기지가 세워지고, 제주 신공항 건설 문제로 지역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그러는 사이 쌓여가는 쓰레기와 관광객들에게 맞춰 치솟은 물가는 아름답고 자비로운 섬 하나가 받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시험하는 중이다. 제주 송악산에는 고층 호텔이, 선흘리 주변에는 테마파크가 들어서는 등 관광과 개발 계획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고,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고, 비자림로의 삼나무가 쓰러질 때마다 그의 이름이 불리고 있다.

 

월간참여사회 2020년 7-8월 합본호 (통권 277호)

비자림로 확장공사가 재개된 가운데 삼나무 벌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제주新보

 

❶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각료 회의에서 시작해 1993년 12월 8차에 타결된 다자간 무역협상을 가리킨다. 자급자족 농업 중심이던 한국의 생산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목차] 참여사회 2020년 7-8월호 (통권 277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참여와 행동에 동참해주세요
참여연대 회원가입·후원하기
목록
닫기
닫기
제목 날짜
[소개] 2020년 참여사회 필진이 독자 여러분께 2020.03.02
[안내] 참여사회 '생활의 광고' 싣습니다 2017.04.27
[안내] 참여사회 정기구독 신청 2017.02.01
[목차] 참여사회 2020년 7-8월호 (통권 277호)   2020.07.01
[여는글] 주마간화 走馬看花   2020.07.01
[특집] 호모콘스무스를 위한 변명   2020.07.01
[특집] 비대면 소비 속 위태로운 노동   2020.07.01
[특집] 이커머스 시장의 과당경쟁과 불공정거래행위   2020.07.01
[특집] 다치고 병드는 물류센터 노동자들   2020.07.01
[특집] 택배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 과제   2020.07.01
[만화] 이럴 줄 몰랐지 <연이의 방>   2020.07.01
[역사] 제주청년 양용찬 “제2의 하와이보다는…”   2020.07.01
[여성] '화려한 지옥'에 흑인이 필요했던 이유   2020.07.01
© k2s0o1d4e0s2i1g5n. Some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