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910

신문, 재벌·족벌의 독점소유부터 깨야

신문, 재벌·족벌의 독점소유부터 깨야

『조선일보』와 내가 클리어해져야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사주에게 전달돼야 한다." 대한민국 여론을 좌우한다는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주간은 자신의 명예에 앞서 사주와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류 주간이 유독 사주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게 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기자협회보』 3월 30일자는 “92년 대선 당시 ‘YS 대통령 만들기’를 사주가 지시했으나 류 주간은 이에 불응했으며, 방영될 MBC 프로그램에서 본인에 관한 부분을 빼 달라고 MBC 간부에게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류 주간은 이 기사가 허위 날조된 것이라며 기자협회를 상대로 3억 원 손해배상 등 명예훼손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지켜본 언론계 및 법조계에선 의아해 했다. “사주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언론인의 당당한 모습으로 묘사됐는데 무슨 명예가 훼손됐다는 거야? 오히려 명예를 높여준 것이잖아."

그러나 류 주간은 “명확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기자협회측의 대화 요구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또 “소송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당사자들간의 만남은 부적절하다"며 담당 변호사와 상의하라는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지 4개월여 지난 시점에서야 류 주간은 기자협회 관계자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류 주간은 “소송을 취하하겠으니 『기자협회보』를 통해 당시 기사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명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주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고고하고 신념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한 언론인의 실상이다. 류 주간의 소송 건이 마무리된 후 언론계에선 “예상대로 본인 문제가 아니라 사주의 명예훼손 때문에 그랬군"이라는 반응이었다.

생존권이냐? 편집권 독립이냐?

IMF 관리체제 이후 현직 기자들은 편집권의 독립보다 생존권이 우선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언론계뿐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는 것이지 편집권을 놓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과연 경제난 속에서 편집권 독립에서 문제는 나중 일인지 IMF 이전 신문 몇 개만 들춰보자.

96년 7월 22일자 『중앙일보』는 홍석현 사장과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의 회견 내용을 1면과 3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또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10주기 추모식 관련 “이 난국에 호암이 계셨다면…"이라는 기사를 큼직하게 실었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20대 후반인 담당 기자가 과연 호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한숨 지었다. 그런가 하면 『동아일보』는 97년 5월 26일자 2면 3단 기사로 김병관 회장이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보도하면서 6면에는 ‘설립 36 년만에 호(濠) 4대 명문대 부상’을 머리기사로 실었다. 이 기사를 쓴 김재호 기자는 김 회장의 장남으로 현재 30대 초반임에도 경리담당 상무이사를 맡아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80년 5월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국 정부가 전두환 집권에 호의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한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신군부측이 사주의 개인비리를 들먹이며 회사를 언론통폐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으니 미국내 친한파 인사와 긴급 인터뷰해 기사를 보내 달라고 서울 본사에서 요청했다"며 “고민 끝에 인터뷰 기사를 전송했다"고 이 기자는 말했다. “이는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론권력 없어야 편파보도 없다

이밖에도 ‘사주와의 관계’ 때문에 기사화하지 못한 숱한 내용은 책으로까지 출판됐다. 95년 말 윤덕한 전 『경향신문』 정치2부장은 소설 형식을 빌어 『재벌신문』을 펴냈다. MBC 에 출연키도 했던 윤 전 부장은 한화그룹이 『경향신문』을 인수하게 된 과정과 이후 김승연 회장 및 한화그룹과의 관계로 인해 보도하지 못했던 굴욕의 사례를 낱낱이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김 회장이 외화유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을 때 『경향신문』 간부들이 나서서 타언론사에 기사를 쓰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다. 『재벌신문』에는 또 김 회장의 말 한마디에 특종을 날려버리고 느닷없이 기획 시리즈가 연재되는 등 파행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출간 후 하루 이틀이 지나자 교보, 종로 등 대형서점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교보문고의 한 직원은 “상부의 지시로 책을 모두 치웠다"고 말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럴 수도 있는 일’ ‘정권과의 문제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면은 이렇듯 유린당해왔다. 이 과정에서 ‘언론자유’ ‘편집권 독립’을 외친 언론인들은 사주들에게 찍혀 사표를 던져야 했다.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들이 있었기에 언론의 자유는 신장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침내 언론의 권력화로까지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집단의 권력화다.

대선 때마다 제기됐던 언론의 편파보도는 “우리가 권력을 창출한다"는 경영진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97년 15대 대선에서 편집권의 독립은 그래서 더욱 절박했다. 투표 전날인 12월 17일 양대 신문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국민신당의 박범진 사무총장은 분을 참지 못했다. “차라리 신문사 사주가 대통령을 뽑지 그래. 이런 식이라면 국민이 선거할 필요가 없다. 유력 신문사 사주들이 모여 차기 대통령을 낙점하면 되잖아."

기자협회는 직접 기자들에게 이 문제를 물었다. 전국 신문·방송사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92%가 ‘편파적인 보도를 보인 언론사가 있었다’고 답했다. 기자들은 이회창 후보 편향으로 『중앙일보』(64%)와 『조선일보』(10%)를 꼽았다. 또 84%는 편파보도를 주도한 집단으로 ‘사주와 경영진’을 지목했다. 놀라운 점은 일선기자가 편파보도를 주도했다는 의견이 ‘0%’였다는 점이다. 그간 불공정·왜곡 보도에는 평기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의견이 8∼10%를 차지했던 점에 비춰 볼때 15대 대선 보도는 기자들 몫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동판매기야. 누르면 바로바로 기사를 쏟아내야 되잖아"라는 정치부 기자의 자조가 아니더라도 편집권은 경영진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음을 쉬이 알 수 있다.

따라서 대개의 기자들은 재벌과 족벌 등 특정집단의 언론소유에 반대하는 의견을 갖고 있다. 앞선 조사에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할 언론개혁 과제로 단연 ‘재벌과 족벌의 언론소유 제한'(59%)과 ‘편집 편성권의 독립'(57%)을 꼽았다. 또한 공표를 전제로 한 언론사 세무조사 실시에 대해 기자들의 79.7%는 찬성한다고 답했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은 17.7%였다. 언론사주와 간부의 재산공개 역시 찬성 의견이 76.8%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20%를 압도했다.

기자 79.7%, 언론사 세무조사하라

언론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재벌·족벌에 의한 신문시장 독과점이나 살인사건까지 부른 신문사간의 판매경쟁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유구조 개선에 관한 논의로 집중된다. 최근에는 최대주주의 지분 한계를 엄격히 제한해 30%(방송법 준용)에서 2.7%(1/전국 일간지수)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등 갖가지 의견이 활발히 제시되고 있다. 이는 공적인 신문에 대한 사적인 지배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느냐 하는 개혁의 주체에 관한 논란이다. 정권교체 이후 현직 기자들과 언론학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집권 초기에 언론을 바로 세워야 YS처럼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언론의 후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YS와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은 대표적인 언론의 피해자이기에 개혁작업을 서두를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적지 않다.

대통령은 언론개혁 의지 있나

김 대통령은 공식 취임 6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 뚜렷한 언론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말』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정부가 앞장서라는 요구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일부 언론에 문제가 있더라도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고 밝혔다. 지방 언론사 사장 20여 명과의 만찬에서 김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언론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불건전하고 불법적으로 언론사를 운영하거나 기자들에게 월급도 안 주는 불미한 행동에 대해선 정부가 철저히 추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준비 안 된 언론 때문에 건전한 언론까지 비판을 받고 있다. 준비 안 된 언론에 대해 강제로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나 스스로 자숙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한겨레신문』 특별인터뷰에서 “언론은 개혁이 제일 늦어지는 분야다. 정부가 언론개혁을 안 하느냐는 불만이 있지만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할 일은 아니다. 언론이 자체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재벌소유 언론의 내부거래를 공정거래법을 통해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개혁을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란 질문에 “정부가 법에 의해 해야 하는 의무다. 공정거래위가 지금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알려진 대로 아직까지는 대통령의 언론개혁 의지가 언론·시민단체에서 요구하는 ‘언론 바로 세우기’ 수준에 크게 밑돌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언론 사정 작업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막강한 저항이 예상되는 만큼 법과 제도를 정비해 건전한 언론 풍토를 조성할 것이라는 언질이다. 그 첫번째가 사이비 언론 퇴출이라는 것.

지난 9월 9일 문화관광부는 행정자치부, 노동부, 법제처, 대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등 7개 부처 국장급 관계자들을 모아 ‘사이비 언론 대책회의’를 열어 사이비 언론이 근절될 때까지 지속적인 단속활동을 펴기로 했다. 이날 결정된 사항은 △‘사이비 언론 수사 전담반’ 가동(경찰청) △시·도별 비리사례 수집(행정자치부) △언론사 임금체불 및 부당노동행위 단속(노동부) △무자격 사이비 언론사 수사 강화(검찰, 경찰) △부실 언론사의 납세의무 준수여부 확인(국세청) 등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두번째 단계로, 중앙 일간지에 관해서는 ABC제도의 강화를 통해 신문 발행부수의 거품을 걷어내 광고와 판매시장을 정상화하는 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언론·시민단체에서 볼 때 이같은 조처는 아직도 미미한 수준이다.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사이비 언론’ 단속은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식이라는 얘기다. 영세한 신문사에서 기자들에게 금품갈취, 광고수주, 이권개입 등을 강요하는 행위는 반드시 근절돼야 하지만 중요 시기마다 여론을 호도하는 거대 신문사에도 죄과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화의 댐’을 건설한다고 국민의 성금을 모으는가 하면, 정주영 찍으면 김대중이 대통령 된다고 여론몰이를 시도한 권력형 왜곡·오보 구조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신학림 『한국일보』 노조위원장은 “정권교체와 IMF체제는 언론개혁 환경의 중요한 변화"라고 말했다. 신 위원장은 “정치·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신문들을 무장해제하기 위한 과제로 사주들의 탈법, 투기 등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 현장에서 내부 고발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다수의 현직 기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언론계가 개혁돼야 한다는 점에 1차적으로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 또한 언론사정, 언론개혁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번 기회에는’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자체 정화 능력을 상실한 언론계에 쏟아지는 눈총이 어느 때보다도 따가운 시점에서 언론개혁의 낯익은 문구가 떠오른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김일 『기자협회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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