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1월 1999-11-01   1267

직업? 시민운동가!

잘은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랬다고 한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창녀촌에 가서는 창녀들과 어울리고, 나병 환자촌에 가서는 환자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아픔을 나누었으며, 로마 병사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는 해방의 참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격동의 8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젊은이들은 이른바 변혁운동의 길에 나섰다. 우리는 이것을 민족민주운동이라고 불렀고, 후일 시민운동이라는 단어가 우리들 주변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할 때 시민운동과 대별되는 개념으로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러한 것 같다.

필자도 당시 시대의 흐름에 맞게 근본적인 변혁운동에 몸을 던졌고 시민운동이 빛을 막 발하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까지도 나는 민족민주운동가였다. 시민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참 미안한 얘기지만 난 그것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못했고 나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치열한 운동과 고민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일산에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20만이던 인구가 80만을 넘는 대규모 도시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지역운동 차원에서 고양청년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자주민주통일운동을 지역차원에서 진행시켜 보자는 대강의 취지를 갖고 출발했다. 고양환경운동연합, 고양여성민우회, 참교육학부모회, 고양시민회 등 이른바 시민운동하시는 간부들과 매일 살다시피 하면서 지역의 여러 현안에 대해 치열한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준농림지에 숙박시설을 지을 수 있게끔 한 조례안이 시의회에서 통과되던 올해 5월 말경부터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어졌고, 시민운동단체들도 자연스레 이 사안에 모든 힘을 집중하게 되었다. 고양청년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청년회는 젊고 집행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어 실무적인 일을 거의 도맡아 하다시피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언론을 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내 얼굴도 종종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게 되었다. 모 일간지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는 도중 “박 회장님은 직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내 직업이 무엇일까’ “그러면 시민운동가로 하죠” “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직업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기자가 만들어 준. 다음날 신문을 본 많은 후배와 동료들이 전화를 해서 “시민운동가님 안녕하세요”라는 농을 해댔다.

대부분 지역의 사안은 지역의 기득권 세력과 비 기득권세력간의 대결이다. 이번의 준농림지 경우만 보더라도 땅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대립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환경 비친화적인, 지속가능하지 못한 개발을 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이다. 합리적 시장과 유통을 가로막고, 부를 집중시켜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시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이다. 모순을 타파하는 운동은 그 현상이 다를지라도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공통적으로 흐르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현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의 비상근 기자로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전국연합의 상임의장 오종렬 님은 가끔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상은 깊게! 표현은 낮게! 실천은 길게!”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말과 몸짓, 그리고 모든 것을 대중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다가갔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거창한 사상은 있으나 이를 같이 실현한 대중이 없으면 그것은 허풍에 불과하게 된다. 표현은 과격한데 같이 할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한번 과격한 실천은 누구나 하는데 평생 지속하는 실천은 아무나 할 수 없고, 그런 일회성 실천에 대중은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시민운동가라는 직업이 자랑스럽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범 고양청년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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