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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l  since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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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05월
  • 2000.05.01
  • 1299
4월 13일 오후 4시, 안국빌딩 2층 총선연대 사무실. 그곳엔 개표방송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MBC에서 한국갤럽 박무익 소장의 말이 흘러 나왔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매우 낮아(5시 55분 현재 집계 51.7%) 1,000표 차내로 당락이 결정될 것입니다.” 대표단은 숨죽이며 개표방송을 지켜본다. 출구조사 결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낙선율은 68.6%. 산술적으로만 봐도 총선연대는 성공한 거고, 벽에 붙은 낙선후보의 이름 옆에 ‘바꿔’ 스티커가 부착된다. 오후 8시 30분 총선연대 대표단은 중간논평을 통해 낙선운동의 공을 국민에게 돌렸다. 하루도 발뻗고 지내지 못했을 100일간의 대장정, 이쯤에서 그들은 한숨 돌린다. 김밥과 졸음으로 버텨온 낙선운동, 그 시작과 끝은 이렇다.

김밥과 찐방의 미덕

“야, 이거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너무 하는 구만!”

99년 9월 참여연대, 환경연합, 여성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국회 상임위별로 국감모니터활동을 벌였다. 국감장에서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활동백태를 직접 감시하고 그들의 의정활동을 시민의 이름으로 평가하겠다는 것. 그러나 국감모니터활동은 ‘시민단체가 무슨 자격으로 국회의원의 활동을 감시하냐’부터 심할 때는 욕설, 방청불허조처까지 내려졌다. 연일 신문엔 국감모니터 장소에서 쫓겨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인쇄돼 나왔다. 오죽하면 국감 방청하러 나가는 활동가의 등뒤에 대고 “오늘은 쫓겨나지마!”가 인사가 됐을까. 약 한 달 간의 국감모니터활동을 끝낸 활동가들은 그해 10월 지리산으로 평가MT를 떠났다.

“아예 국회의원을 뽑을 때부터 그가 어떤 정책을 내는지 샅샅이 감시했다가 보고서도 내자고. 기본적으로 시민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국회로 들어가야 되는 거 아냐?”

그들은 상시적 의정감시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고, 국감 때 모아진 각 단체의 연대틀을 4·13총선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막상 세밑이 되자 활동가들은 걱정이 됐다. “낙선운동? 한번도 경험이 없다. 그리고 구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번번이 싸움질을 해대며 민생법안을 처리하지 않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시민운동가들이 감옥 가더라도 몹쓸 국회의원들은 떨어뜨리자!”

환경연합, 여성연합, 녹색연합, 민언련, 참여연대. 일단 5개 단체가 깃발을 들되, 적극적으로 모든 시민단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자, 그리고 제한도 하지 말자. 총선연대 출범 소식이 알려지자 가입의사를 밝힌 수십 장의 가입희망서가 팩스를 마비시킨다. 뜻밖의 일이었다. 심지어는 양돈협회, 양계협회 같은 이익단체도 참여문의를 했다. 그러나 공익의 관점에서 문제가 발생될 소지가 있는 단체들은 제외하고, 2000년 1월 12일 전국 412개 단체의 참여로 ‘2000년 총선시민연대’는 발족된다.

1월초 총선연대는 참여연대 2층 1평 남짓한 거의 창고 수준의 간사 휴게실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러나 전화가 폭주하고, 참가단체가 계속 늘어나면서 장소를 변경, 안국빌딩으로 이주하게 된다. 애당초 총선연대는 각 단체로부터 5만원, 10만원의 분당금을 받아 운영하기로 했고, 최악의 경우 빚더미에 앉을 각오도 했다. 그러나 1월 12일 발족식을 갖은 후부터 24일 ‘공천반대인사 명단 발표’를 할 때까지 매일 1,000만원대의 후원금이 계좌 입금됐고, 총 3억 5,000만원의 시민모금을 거뒀다. 그뿐 아니라 다양한 시민의 후원이 발길을 이었다. 사무실로 김밥을 나르는 사람, 찐빵을 쪄 오는 아주머니, 현금 2,000만원을 기부한 할아버지…. ‘배고프면 총선연대로 가라’는 소문이 돌 만큼 총선연대로 쏟아진 시민의 애정은 이전 시민단체의 활동 속에서 봤던 것과는 달랐다.

공중전화까지 끊어도 새어나간 보안

공천반대리스트가 발표되기 전날인 1월 23일, 100인유권자위원회 및 상임공동대표단을 비롯한 총선연대 임원들은 공천반대인사 심의와 확정을 위한 합숙회의를 성가수녀원에서 가졌다. 이때 총선연대 공보국장 김타균 씨(33세)는 잊지 못할 일화를 기억하고 있다.

“밤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일부 기자들이 ‘담치기’하면서 과열취재경쟁을 하는 거예요. 그 리스트를 누가 먼저 쥐느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진짜로 휴지통 뒤지고 돌아다녔다니까요. 아마도 그후에 총선연대에 파쇄기가 등장한 걸로 압니다.”

총선연대의 언론방침은 대변인 공식브리핑을 통해 공지한다, 대외비는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예고성 보도자료는 내지 않는다 였다. 3개월간 토요일을 빼고 나머지는 거의 매일 기자브리핑을 통해 일정을 공유했다. 청와대와 국회도 이런 하드트레이닝은 없다고. 실제 총선연대운동 과정에서 종로서 기자들도 ‘화려한 등장’을 많이 했다. 1면 톱 혹은 정치부 기사를 쓰게 되면서 1진, 2진 사회부 기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단다.

“안국빌딩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서 낙천리스트 선정을 위한 기초회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커피숍에 들어갔더니 회의하는 총선연대 관계자를 빼고 나머지는 다 기자들인 거 있죠. 벽마다 들러붙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더라구요.” 이뿐 아니다. 2진 기자들은 김타균 국장의 입을 빌어 한마디라도 더 들어보려고 밥 먹고, 술 마시고, 2차를 기자실로 정해 데려가서 “몇 명 규모로 낙천리스트 발표하냐, 숙박은 어디서 하냐, 낙천리스트 선정을 위한 대표자회의는 어디서 하냐?” 등등을 거의 ‘취조’ 수준으로 묻기도 했단다. 그때마다 그는 “알아도 모른 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다고. 지금에 와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쓰고 싶은 심경이라며 김 국장은 웃는다.

“저는 이번 총선연대운동에 기자들도 함께 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같은 30대로서 한국사회를 걱정하며 토론하고, 운동에 조언도 했죠.”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하나. 총선연대가 항상 철통 같은 보안 속에서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2월 2일, 2차공천반대자 리스트 발표했을 때의 믿을 수 없는 사건 한 가지가 기록될 만하다. 명단빼내기를 시도하는 기자들의 집요한 노력 때문에 총선연대는 늘 긴장해 있었다. 때문에 의정부 한마음수련원에서 2차 낙천대상자를 선정할 때, 핸드폰도 다 수거하고, 바깥출입을 봉쇄하고, 공중전화도 끊어놓고, 핸드폰수신방해작동기까지 대동했는데, 보안이 새어나간 것. 늘 자료집 발간을 도맡아 온 을지로 세진인쇄소에서 리스트를 제본하던 담당자는 MBC 아침뉴스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아무도 모르게 갖고 나온 명단이 아침 7시 40분, 앵커의 입으로 또박또박 불려지고 있었던 것.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누군가가 뉴스진행 시간에 맞춰 앵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고, 윗라인을 통해 전달됐다는 얘기, 도청설, 총선연대 내부에서 전달, 기계를 동원한 방법 등 온갖 이야기들이 마구 나왔지만, 설득력을 가질 만한 게 없었어요. 지금도 그게 너무나 궁금합니다.”

김타균 국장은 그때의 어이없음을 말로 다 표현 못 하겠다는 투였다.

거만한 유착설과 굴욕적인 ‘잘봐달라’

낙천리스트 발표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기자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치인들의 소명백태는 말할 나위없이 가관이었다. 자료조사팀 이강준 간사의 말을 들어보자.

“세간에 알려진 사실 중 그릇된 게 있으면 소명해달라, 이런 공문을 보냈는데 답변한 소명자료로는 소명이 안돼요. 증거가 되지. 김중위 씨의 경우 국회 속기록을 보내왔는데 속기록 중 네모 박스를 쳐서 검찰에게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복사된 속기록을 박스 안만 봅니까? 박스 밖으로 드러난 발언들은 모두 권인숙 씨 성고문관련 발언들이에요. 이뿐 아니에요. 이건개 씨, 그는 슬롯머신사건 관련자인데, 일간신문에 자기가 낸 광고를 일반 간사들에게까지 다 보내 허위사실 유포 운운해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 돈내고 한 광고로 무죄의 정당성을 얘기할 수는 없는 거죠. 박철언 씨, 그 역시 슬롯머신관련인데, 터무니없이 의정활동 보고서를 보내요.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자료로 뭘 판단하라는 건지…. 또 이종걸 변호사의 경우 납세실적을 갖고 후보자 정보공개를 했는데, 매번 가져오는 자료마다 탈세혐의가 더 명백해지도록 만들었어요. 무엇보다 제일 황당한 건 정치인들이 TV에 나와서는 거만하게 음모론, 유착설을 말하지만 뒤로는 보좌관, 지인을 동원해서 저희를 찾아와 ‘선정됐냐’, ‘잘봐달라’, ‘부탁한다’는 거예요. 이런 게 너무 웃겼어요. 아마 공천반대자 중 부지기수가 여기에 해당될 걸요?”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도 정치인들로부터 시달리기는 마찬가지. 그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친분을 이용, 또는 직접 전화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 자료까지 보내 ‘나만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단다. 실제 그는 낙천자리스트를 선정할 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토론을 통해 명단이 확정돼 가는 과정을 보면서 역시 ‘민주주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단다.

“지역정서로 봐서 나쁜 놈, 명확한 기준과 객관적 자료 없이 이걸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표결방법에 관한 표결까지 하게 되더라구요.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이 넘는 대표단이 모여 그런 결정과정을 거치는 것이 참으로 위대해 보였어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만, 치열하게 토론하고, 따지고, 험악한 상황으로까지 가도 운동하는 사람들의 기본 기가 있으니까 신뢰로 전체운동의 대오가 지켜지더라는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부족한 점을 많이 발견한 계기였습니다.”

노동운동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

1월 30일. 제1차 시민행동 국민주권의 날 선언대회를 서울역에서 가졌다. 솔직히 시민단체의 캠페인이란 건 노동자·학생·농민 민중대오의 집회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어떤 때는 캠페인 참가자보다 기자들이 더 많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이전의 시민단체 캠페인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1,000단위 집회도 쉽지 않은 터에 3,000명의 인원이 역 광장을 가득 메운 것. 활동가들도 놀랐다. 지나는 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것은 물론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는 동안 점점 불어나는 행렬을 보면서 활동가들의 가슴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1월 28일경부터 불어닥친 음모론, 유착설 등이 총선연대 활동을 한풀 꺾었다. 또 2월 내내는 전국 곳곳에서 공천철회 소송 원고인단 모집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다 선관위와 충돌한다. 실제 총선연대운동의 쌍봉이랄 수 있는 두 번의 피크, 낙천자리스트 발표와 낙선자리스트 발표를 제외하면 총선연대운동은 모두 하강국면에 돌입한다. 412개 단체가 시작해 1,000여 단체로 마무리 됐지만, 실제 그 운동의 동력으로 그들이 충분히 이끌어지고 있는가, 또 하나 운동의 외연을 진보진영까지 확장할 수는 없겠는가. 두 가지 고민 속에서 번민하게 된다. 이때 총선연대 지도부는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전국민적 운동으로 키워내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노동조합과 농민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 먼저 민주노총. 그들은 16대총선의 입장을 민주노동당 지지로 정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21개 지역구에서만 후보를 내기 때문에 공익노련, 사무노련, 언노련 등 업종별로 제각각 다른 지역에 사는 조합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한 조직 내에서 선거전략과 정책을 정하는 데 두 가지 입장을 취하는 건 곤란하다”는 말로 총선연대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러나 총선연대는 총선이란 중요한 정치국면에서 노조의 정치참여도 합법화된 마당에 지도부가 좀 유연한 결정을 내려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이밖에 농민조직과 빈민조직도 성사가 안 됐다. 그나마 청년·학생 조직은 총선연대활동을 인정, 독자적으로 활동해나갔다.

둘째, 서울 중심의 중앙이 공중전에 한계를 느낀 지도부는 지역에서는 지상전을 펴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초기 논의부터 판을 크게 읽지 못한 총선연대는 결의된 몇몇 단체로부터 시작해 중앙의 공중전을 지역의 지상전으로 만들기에는 여전히 힘의 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이 운동이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특히 언론에서는 ‘수치로 접근해 시민운동을 점수매기기’할텐데, 결합된 500여 단체에게 만일의 실패에 대비해 정치개혁운동 차원에서의 의미전달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리고 이 운동의 에너지를 어디로 가져갈 것인가도 중요한 화두로 끊임없이 제기됐다.

표를 위해서라면 도덕성도 버리는 정치인

3월부터는 지상전의 과제가 핵심적으로 대두됐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게 ‘유권자약속 227만 표 모으기 운동’. 이것은 3단계 전략을 갖고 있었다. 첫째, 부문·지역에서의 배지달기 명예유권자증서 나눠갖기. 이는 서울지역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캠페인이었다. 둘째, 벤처인의 날, 금융인의 날, 교사의 날, 택시기사의 날 등 이벤트 유권자약속운동 릴레이. 이는 사실 잘 안 됐다. 셋째, 4월 3일 낙선자 명단발표 후 적극적으로 낙선운동으로 결합하는 것.

3월 20일부터 1주일간 지속된 ‘희망의 정치를 위한 전국버스투어’는 지역민심을 파악하기 위한 좋은 활동이 됐다. 장원 대변인은 가는 곳마다 아줌마부대를 만들어냈고,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과 함께 다니던 한 활동가는 지역의 한 할머니로부터 “몇 번이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호응이 높았다. 그러나 영남권에서는 만나는 시민마다 “대안부재”를 논하며, “누굴 찍으란 말이냐?”고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어차피 DJ는 호남정권인데 우리가 그를 찍어야 하냐는 것이 핵심적 주장. 총선연대 일선 활동가들은 다음 총선에 혹시라도 총선연대 활동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부산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자’는 다짐을 할 정도로 영남권 내 지역구도의 벽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4월 3일 낙선자리스트가 발표된 후 낙선후보들의 반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수도권 중심으로 살펴보면, 일단 부천 원미을의 이사철 후보측과의 공포의 송내역 사건. 4월 10일 이미 송내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400여 명의 이사철 후보 지지자들과 선무방송차량은 총선연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소복을 입은 이 후보의 어머니는 ‘대통령님, 우리 아들 이사철 죽이기를 제발 중단해주세요--문정열 올림’이라 쓴 피켓을 갖고 다니며 총선연대 최열 대표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뿐 아니라 선거운동원들은 낙선버스와 트럭에 전시된 총선연대 게시물들을 다 뜯어내고 당장 물러가라고 외쳤다. 10분 만에 모든 게시물을 뜯긴 총선연대 차량은 부천을 빠져나와 인천으로 가려했으나 이사철 후보측 차량들이 가로막아 빠져나오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간신히 빠져 나왔을 때 마주친 두 진영이 있었으니 이사철 후보와 최열·박원순·정강자·지은희 대표단이었다. 이사철 씨는 대표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고, 경기4 조584× 이사철 후보측 차량은 인천 남동공단 입구까지 총선연대를 쫓아와 욕설을 퍼부으며 분풀이를 해댔다.

김중위 후보측은 총선연대 ‘바꿔’ 스티커와 비슷한 모조품을 제작해 지역주민들의 차량 백미러에 부착시켰다. 4월 13일 새벽 6시까지 총선연대 활동가들은 김중위 후보측이 붙이고 다닐 법한 지역에 매복, 그들을 찾아내려는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활동을 현장에서 겪은 대표단들의 일성은 “살면서 참 여러 경험한다”로 압축된다. 막판에 몰린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시민단체 정도는 쉽게 음해하려 하는구나에서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밤의 질주를 하며 어스름 새벽을 맞은 총선연대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100일을 보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00일간의 전투. 요즘도 총선연대 활동에 하루만 동참했던 사람이라면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사실 총선연대 활동은 각 단체들의 무리를 감내해야했다. 특히 여성연합의 경우, 임신한 활동가의 조산사태가 있었고, 저혈압인 활동가가 끝내 쓰러지는 일을 겪었다. 환경연합은 창립부터 지금까지 회비 한번 안밀리고 활동해온 회원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비판하고 탈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총선이 지나고 16대 국회가 구성중이다. 고배를 마신 낙선후보들은 총선연대로 고소고발을 해올 거고, 그래서 총선연대 운영국은 시민성금 중 2,000만원을 소송비용으로 남겨 두었다. 총선연대가 사용하던 집기는 50% 할인해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고, 지금 안국동 4층과 2층 총선연대 사무실은 비어 있다. 전쟁 같은 100일을 보낸 총선연대 사람들은 이제 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기에 총선연대에 남은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이 운동의 성과와 과제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지도부와 국실장급 간부들은 해단식을 마치고 대전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부터 다시 이 문제를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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