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1083

말단공무원의 도시계획도로소송 9전 9승기

경주시 곳간 지킴이 권혁섭

정식 변호사가 아닌 보통 시민들도 재판에서 충분히 승소할 수 있다고 말하는 한 시민이 있다.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들을 대신해 소송을 진행하는 일도 ‘시민운동’의 하나라고 말하는 공무원 권씨를 만났다.(편집자 주)

“보소, 권 변호사! 서울에서 전화 왔다. 전화 받으소.”

수화기 너머로 황급히 사람을 찾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린다. 일명 ‘권 변호사’로 불리는 이 사람은 경주시청에서 근무하는 8급 공무원 권혁섭 씨(33세). 정식 변호사도 아닌 그에게 이런 별호를 달아주는 까닭은 뭘까. 그건 그가 경주시청 소방도로 건설 업무를 담당하며 관련 민사소송 9건을 변호사 없이 혼자 맡아 모두 승소했기 때문. 현재까지 9전9승인 셈이다. 현재 법원에 계류중인 2건의 소송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그. 법이란 것도 막상 부딪히다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권 변호사’를 만나보자.

“경주시민 혈세 아껴야죠!”

경주시청에서 권씨가 맡은 주요 업무는 시에서 소방도로를 낼 때 시민들과 보상내용을 협상하는 일이다. 이밖에 권씨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그것은 보상금 책정에 이의가 있는 시민들이 소를 제기했을 때 시를 변호하는 일이다. 물론 경주시청에 고문변호사가 있지만 도시과 소송업무는 대부분 권씨가 담당한다.

“시민들이 시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했을 때 변호사에게 의뢰해도 담당공무원에게 소송 내용을 다시 물어 봅니다. 아무래도 변호사보다는 실무자가 구체적 내용을 더 잘 알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변호사에게 소송을 맡기지 않고 직접 합니다. 시의 예산으로 집행되는 변호사 선임료도 알고 보면 다 국민들이 낸 세금이니까 아껴야죠.”

권씨가 보상소송을 맡기 전, 경주시는 소송 한 건당 3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지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씨가 스스로 나서 이와 같은 소송을 맡으면서부터 경주시는 변호사 선임 예산을 책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덕분에 경주시청이 아낀 변호사 선임 예산은 지금까지 3000만 원 정도나 된다. 이 돈은 경주시민 1570명이 무궁화호 일반석을 타고 서울까지 올라올 수 있는 금액이다. 그뿐 아니다. 초등학생 30만 명이 첨성대를 관람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공익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서다

경주시청에서 권씨는 유명인사다. 그를 모르면 외부에서 온 민원인이거나 잡상인으로 취급할 정도. 권씨가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그의 청렴함과 부지런함이 한몫 했다. 경주시청 도시과에 근무하는 박병윤 씨(47세)가 평가하는 권씨는 이렇다.

“우리 ‘권 변호사’는 너무 바빠요. 매일 야근하면서 소송준비 하는 걸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시민들을 위해 일하는 진정한 ‘공복’이라 할 수 있죠.”

권씨가 이렇게 야근을 밥먹듯 하며 소송을 준비하는 이유는 공익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공무원의 입장에서 시를 변호하기보다는 힘들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

“보상 협상을 하면서 저는 시민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합니다. 공무원이기 전에 저도 한 사람의 시민이니까요. 보상금 책정이 잘못되었다면 당연히 바로잡습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보상 대상이 아닌데도 개인적 이익만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공무원은 시민이 내는 세금을 올바르게 사용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씨가 처음으로 소송업무를 맡은 건 1995년이었다. 경주시 동천동에 사는 이모 씨가 경주시에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토지 144평이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며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권씨는 도시과 과장으로부터 소송을 처리할 변호사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소송 내용을 살펴보던 권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도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건 일하다 보니 권씨가 변호사보다 소송 내용을 더 정확하고 자세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식 변호사는 아니지만 조금만 법률공부를 하면 충분히 승소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권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소송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이 때부터 법률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짓’이라며 권씨를 말렸단다. 하지만 권씨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었다.

1998년 경주시 황남동에 사는 손모 씨는 경주시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1995년에 도로를 내면서 보상가격을 30%밖에 못 받았으니까 나머지 70%를 돌려달라는 소송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손씨는 보상금의 30%만 받을 테니 빨리 도로를 내 달라고 시청에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땅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면 잔여지 땅값이 4배 이상 오르기 때문이죠. 시세차익을 노린 거예요.”

이미 다른 지방으로 전근 가 버린 당시 보상담당 직원은 손모 씨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권씨는 시청 문서보관 창고를 샅샅이 뒤져 당시 서류를 찾아냈다. 마을 통장과 소방도로 추진위원장을 찾아가 증언도 들었다. 2000년 8월 31일 대구지법 경주지원은 권씨가 찾아낸 증거들을 인정했고 손모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보상금 받으려 사업자등록증 위조에 협박전화까지

2000년 3월 경주시 인왕동에 사는 이모 씨는 경주시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이씨가 운영하는 의료소매점이 도시계획도로에 포함되므로 자신이 지출한 권리금 1500만 원을 비롯한 3600여 만 원을 보상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그 증거로 사업자등록증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씨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권씨는 주변조사를 통해 도로 인가 당시 그 점포가 의류소매점이 아닌 신발가게였다는 점을 알아냈다. 무엇보다 이씨가 증거로 제출한 사업자등록증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써 2001년 5월 권씨는 9번째 승소기록을 세웠다.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한다’는 원칙을 지킨 권씨의 승소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권씨는 가끔 협박전화를 받기도 한다. 작년 일이다. 당시 보상소송을 낸 이모 씨가 권씨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권혁섭 씨만 잘 대답해주면 되는데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권씨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자 이씨의 태도는 돌변했다. 이씨는 “당신 월급에서 보상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법정에서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와 정반대로 “소송에서 이기면 크게 후사할 테니 좀 잘 봐달라”는 청탁성 제안도 있다. 하지만 권씨는 이런 강권과 유혹에 한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 없다. 시민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 신분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

우리 주변에서 권씨 같은 공무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시민들이 행정기관을 불신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권씨를 만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뇌물수수 소식을 접한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모두 권씨와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경주시청에서 만난 말단 공무원 권씨를 떠올리며 던져보는 생각이다.

박정선영(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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