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2월 2007-02-01   1094

기억보다는 현실이, 문제의 중심에는 미국이

2003년 7월 22일 당시 바그다드 내에 있던 나는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총소리에 깜짝 놀랐다. 엄청난 소리로 판단하건데 산발적으로 계속하던 교전의 수준이 아닌 듯해서 당시 같이 있던 활동가들과 숙소 옥상에 올라가서 주위사방을 살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수천, 수만 발의 예광탄(주로 야간용으로 불빛이 보이는 탄환)이 하늘로 쏘아 올라가고 있었다. 바그다드에서의 생활이 두 달 조금 안 되었던 나에게는 전쟁이 다시 터지는 줄 알았다. 다음날, 주변 친구를 통해서 어제 상황이 사담 후세인(이하 사담)의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가 미군에 의해 사살당한 것을 축하1)하기 위한 축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축포는 그 뒤 2003년 12월 14일 미군에 의해 사담이 티크리트 한 농가에서 생포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직후에, 그리고 2004년 8월, 그리스 올림픽 때 이라크 축구대표팀이 4강에 올랐을 때 다시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은 흘러 사담이 체포된 후 3년이 지난 2006년 12월 30일 사담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 모습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라크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알려졌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2007년 1월 10일,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TV를 통해서 ‘새 이라크 정책’을 발표했다. 주 내용은 테러리스트들이 이라크를 산산조각 내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한 미군의 수가 부족해서 2만 명 정도 더 늘린다는 것이다. 세계의 언론은 사담의 교수형과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 이런 저런 분석과 전망을 내 놓았지만 직접 당사자인 이라크인과 그 주변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의 의견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 TV를 통해 이라크 사형집행을 보고 있는 이라크인들

이라크를 혼란에 빠지게 미국, 사담보다 더 싫어

이라크 자유의회 (IFC)2)의장이자 이슬람의 정치참여를 반대하는 사미르 아딜 씨는 사담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후 곧바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번 사담의 사형은 미국과 이라크 내 종파 그룹의 이라크 범죄와 2003년 3월 19부터 계속된 655,000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 대규모의 난민과 막대한 이라크 사회 파괴, 이라크 정부와 미국의 이라크 재건 실패에 대한 이라크 민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또한 “사담 후세인의 처형은 마피아 갱단이 조직의 뜻을 거부하는 조직원을 처형하는 것과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이라크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사담과 그의 관계자들, 그리고 부시와 블레어, 이라크 종파들의 우두머리가 함께 죗값을 치루지 않고서는 이라크에서 자유와 권리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미국의 새 이라크 정책에 대해서는 “실패한 이라크 정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비참한 계획이다. 이라크 전역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라크 바그다드 알 후리야에서 거주하는, 소위 말하는 수니파3)인 살람 가드반씨는 친형이 사담 정권시절 처형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사담의 악행에 대한 댓가로 그를 사형시키는 것은 반대했다. 오히려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새로운 이라크 정책에 대해서는 미국이 종파 간 싸움을 부추기고 있고 그것을 다시 군사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라크인들 간의 전투가 멈추고 그 각 종파의 지도자들이 결심할 때 이라크 평화가 올 것이라 했다.

죄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미국’이 아닌 ‘신’이 할 일

▲ IFC 의장 사밀 아딜

그렇다면 소위 시아파라고 불리는 이라크인들의 의견은 어떠할까? 시아파인 알리(바그다드 기술 대학 앞에서 컴퓨터 상점 운영) 씨는 사담 때문에 고향에서 바그다드로 강제 이주 당했다. 가족 중 일부가 사담 시절 실종 되어 사담이 잡혔을 때 너무 기뻐했고 처형되기를 바랐지만 이드 알 아드하4) 전날 사담이 사형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슬림으로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또 “사담시절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보다 좋았다. 미군이 이라크의 치안과 질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시아 무슬림이자 난민으로 이라크 국경국인 요르단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아핫메드 엄마는 시아파임을 강조하며 “사담의 처형은 더러운 범죄”라고 비난했다. “나는 시아파 여인이지만, 우리는 모두 무슬림이고 사람들의 죄를 판결할 수 있는 존재는 미국이 아닌 오직 신뿐임을 알고 있다. 나는 사담처형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라크인들이 아니라 단지 대리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자유, 기름, 집 그리고 권리…….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존엄조차 없다.”

사담 정권 시절 두 형을 잃고, 미국이 바그다드 점령을 마친 후 힐라5) 공동묘지에서 형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던 시아 무슬림 카심 알리 씨는 사담이 죽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라크에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8개월 동안 일거리가 없는 상태이다. 주변 친척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 아핫메트 엄마. 이라크 난민으로 현재 요르단에 거주.

후세인, 집단학살의 원흉인가 영웅인가

1988년 사담 정권이 이란 국경지대이자 쿠르드지역인 할랍챠에 화학무기를 사용할 때, 가족들 전부를 잃고 자신도 폐를 크게 손상당한 쿠르드인 카밀 카디르 씨는 “사담의 사형집행은 공정하다”고 한다. “사담은 재판 없이 쿠르드인 오천 명을 죽였다. 그러나 지금 일부사람들은 그를 위해 정의를 외친다. 그렇다면 사담에게 화학무기의 재료를 공급했던 해외 친구들과 사담을 지지했던 서구 정치인들의 정의는 우리가 죽을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사담에게 화학무기를 제공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의 반응이 어떨까? 미국은 레이건 정부 당시 탄저균, 보톨리누스균, 웨스트 나일 바이르스를 포함한 병원균 배양법을 사담에게 넘겨주었다고 증언했고, 조지 부시 정권은 이중 용도의 기술과 ‘이라크 정권이 훗날 핵미사일 및 화학 무기를 위해 사용했던 물질’을 수출하도록 허가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미국은 또한 이번 사형의 직접적인 이유인 1982년 두자일 쉬아파 마을 학살과 1983년 쿠르드족 바르자니 부족 학살 사건, 그리고 재판 심리 중이었던 1988년의 할랍챠 쿠르드 지역 학살 사건등은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 이 당시 이라크의 최대 우방은 미국이었고 실제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당시 군사 정보국을 지원했고, 무기구매를 위해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식량보조금 50억 달러와 수출차관 보증금으로 역시 현금으로 변경가능 한 25억 잘러, 그리고 직접 수출 보조금 1억 4천 1백 만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실질적인 이라크 군의 무장에 큰 역할을 했다. 더구나 미국의 정보국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계속 정보를 수집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사담의 비인도적 범죄를 모르고 있었을까? 이란-이라크 전쟁당시 실질적인 이라크 군의 무장에 큰 역할을 했다. 더구나 미국의 정보국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계속 정보를 수집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사담의 비인도적 범죄를 모르고 있었을까?

사담 후세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인연은 조금 특별하다. 사담 후세인은 1991년 1차 걸프전 당시 이스라엘에 39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가족들에게 이슬람 복지기구에서 모인 자금을 정기적으로 보내주었다. 팔레스타인 난민 2세로 요르단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있는 오스만은 “사담은 자말 알 나세르 대통령6) 이후 “미국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서 ‘아니오’를 외쳤던 유일한 대통령이다. 사담에 대한 일련의 재판과정은 코미디고 연극이요, 기만과 거짓말의 각축장이었다. 만약 (사형집행을 반기는 사람들)이 정의를 외치고 싶다면 그들 자신부터 정의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라크와 레바논, 팔레스타인에서 대량학살을 만든 전쟁범죄자들이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이라크 점령이 모든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사담의 재판자체가 비인도적인 범죄임을 잊고 있는가? 나는 그가 저지른 범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담은 우리 팔레스타인들에게 사담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더 큰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후세인의 모습은 아랍인과 이라크인들 영혼과 가슴에 깊이 박혀 있다.

▲ 2003년 5월 바그다드 인근 힐라지역의 대규모 집단매장지. 이곳에서 카심 알리 씨도 시신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독재자, 그리고 더 큰 독재자

사담의 사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해 보면 앞서 모든 이들은 사담이 독재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가 죽음을 불편하게 하는가? 첫 번째는 사형제도 그 자체일 것이다. 세계의 많은 인권단체들은 사형집행에 대해 심각한 불편을 드러냈고, 사형제도 폐지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에서도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법 집행, 적용의 형평성 때문이다. 비인도적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 거꾸로 전쟁을 일으켜 사담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형을 집행한 사실 앞에서 국제법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었다. 사담은 비인도적인 범죄와 전쟁범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미 걸프전 당시 만 오천 명의 사상자, 그 이후 13 년간의 경제 봉쇄로 약 200 만 명 가량의 이라크인들이 사망하고 그 중 5세 미만의 어린이가 약 60∼70여 만인 미국의 범죄는 처벌은 고사하고 거꾸로 전쟁을 일으켜 사담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형 집행한 당사자인 사실 앞에서 국제법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었다. 더군다나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지금까지의 점령으로 인하여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65만 명이 사망하고 지금도 매일 수백 명이 사망하고 있는 이라크의 현실 앞에서 벌어진 사담의 처형은 뭐라고 해야 할 것인가?

▲ 미군들이 팔루자 지역을 공습한 후 저항세력들을 포박하고 있다

축포는 멈추고

2003년 12월 사담이 잡혔을 때 바그다드 곳곳에서 목격된 축포는 2006년 12월 사담이 처형당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루 평균 사망자 200∼300명, 국내외 난민 370만 명, 매일 이라크 인근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등지로 떠나는 수천 명의 피난 행렬, 수배에서 수십 배가 오른 물가, 50%에 가까운 실업률, 산유국에서 정작 사용할 기름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등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절망적인 사실들로 대체되었다.

이 절망을 이라크인들에게 선사한 미국은 인류의 ‘정의’를 위해 사담을 붙잡고, 재판을 했으며, 끝내는 사형시켰다. 이라크인들은 과거 사담 시절의 억압과 탄압을 기억하면서, 또 사담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순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미 점령시절을 살아내고 있다. 이 현실의 고통은 기억속의 고통을 이미 뛰어넘어, 현재 수백만의 이라크인들이 난민이 되어가고 있다. 사담은 죽었고, 이 사실은 대부분의 이라크 뉴스가 그렇듯이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갈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인들의 고단한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의 모든 과정 속에서 미국은 때로는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여전히 정의와 평화를 떠들고 있다. 2007년 새롭게 증가된 미군들로 인하여 더 악화될 것이 없을 것 같은 이라크는 더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 뻔하다. 모든 이라크 문제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1)이라크에서는 결혼식 등 축하할 일이 생기면 하늘에 대고 총을 발사하는 전통이 있다. 점령이 시작이 되고 최근까지 결혼식 축하발포를 오해한 미군이 결혼식장에 발포를 해서 수 많은 사상자가 나곤 했다.

2)이라크 자유회(IFC)의 단체는 이라크 내 여성단체, 노동조합, 지역단체들의 연대체로서, 미국의 점령반대,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이 목적이다. 한국에도 의장 사미르 아딜이 2006년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고 현재 IFC 한국 지원모임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다.

3)이라크인 들 중 다수는 자신이 쉬아파로 수니파로 나누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무슬림은 하나일 뿐이다. 이라크 내에서 쉬아, 수니로 나누어진 것은 미국 점령이후부터이다. 이라크 인들을 종파로 나누는 것은 지극히 외부인의 시각”이라 말한다.

4)희생제라고도 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라마단 단식기간 이후 벌이는 축제인 이드 알 피뜨르와 함께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다. 이슬람신도의 의무인 순례(하지)의례의 마지막 의식으로 가축(주로 양)을 제물로 바치며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 3일간 계속되며 이 기간 동안 친척들을 만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

5)바그다드 외곽 지역으로 사담 정권 당시 처형 당했던 사람들의 시신이 묻혀있던 곳이다. 당시 수백구의 시신이 포대에 싸여진 채 땅속에 묻혀 있었다.

6)이집트 대통령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여 미국, 영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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