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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통제의 다른 이름 ‘자기관리’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개그콘서트>에는 ‘성공시대’라는 꼭지가 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일상을 ‘비교분석’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이 꼭지다. 여기서 성공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지런하고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이에 반해 실패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눈 아래에는 짙은 다크써클이 있고 어떤 일에든 집중하지 못하고 옆길로 샌다. 물론 관객의 웃음은 실패하는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 터진다. ‘성공시대’가 가진 극단적 ‘비교’의 형식은 성공하는 이와 실패하는 이로만 나뉘는 우리 시대의 인간분류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매주 직업을 바꿔가며 반복되는 인물 비교가 변함없이 견지하고 있는 유일한 주제는,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그 사람의 자기관리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에게는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는 듯.

‘초식남’ 열풍과 우리시대의 성공 드라마 <결혼도 못하는 남자> 등을 통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초식남’ 현상 역시 자기관리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초식남’이라는 신조어는 사회관계를 중시하고, 여성을 차지하려하며 성공을 향한 저돌적인 돌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전통적인 남성의 ‘육식성’과는 달리 자기 개성을 중시하고, 여성적인 취향을 가지며 성적인 적극성보다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남성들을 일컫는다. 여성이나 친구보다는 자기에게 쏟는 시간과 노력을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초식남’ 현상은 자기관리가 극단화되고 있는 시대의 문화적 경향을 드러낸다. 정확한 시기를 집어낼 수는 없지만 ‘자기관리’라는 단어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아마 90년대 초부터일 것이다. 이 시기는 경제력의 향상과 함께 한국에 본격적인 소비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때이고, 동시에 형식적 민주주의의 등장과 함께 청년세대의 탈정치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때다. 집단적 문화의 쇠퇴는 ‘소비자’의 화려한 탄생을 불렀는데, 소비하는 주체란 기본적으로 개인화될 수밖에 없다. 독재시대에는 국가가 나서서 국민을 ‘관리’했다면, 민주화시대에는 관리의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관리하는가? 자신의 육체, 시간, 자질, 능력 등이다. 요컨대 ‘자기관리’란 곧 개인(자기)이 자신의 육체와 자질, 능력을 어떤 목적에 맞게 통제, 절제, 제어함으로써, 즉 관리함으로써 성공을 이뤄낼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자기관리의 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세지는 것 같다. ‘성공시대’나 ‘초식남’은 자기관리의 강도가 전 시대와는 달리 훨씬 강해진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한 문화현상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스스로 관리하는 기술’ ‘자기관리’의 역사는 자본주의와 함께 해왔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절제와 검소함, 성실성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의 부흥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산업자본주의의 초기에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에서 공장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야 했는데, 이때도 술 마시기, 담배 피우기, 작업장 이탈 등을 엄금하면서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을 관리하도록 하는 자본의 기술이 교회의 설교를 등에 업고 등장하기도 했다.

‘자기관리’라는 개념은 2차 대전 이후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특히 밀튼 프리드만을 위시한 미국의 시카고학파는 모든 사회적 현상을 경제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예컨대 이들에게 개인이란 자신의 자원을 합리적으로 투자하면서 자신을 경영하는 1인 기업이었다. 사회주의를 끔찍하게 여겼던 이들에게는 ‘사회적 연대’나 ‘복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모든 것이 개인의 합리적 자기 경영에 달려있었다. 시장근본주의라고 할 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실현되는 때가 서구에서는 80년대 이후고, 한국에서는 IMF 이후 본격화한다. 요컨대 자기관리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사라지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모든 것이 되는 신자유주의 이론의 핵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약자·소수자=실패한 사람’ 왜곡된 공식 만들어 자기관리에 대한 극단적 강박이 나타나고 있는 이 ‘자기관리의 시대’에는 따라서 관리, 자원, 투자, 경영 등의 단어가 일반화된다. 뚱뚱한 사람은 육체 ‘관리’에 실패한 사람이고, 파산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자원’을 합리적으로 쓰지 못한 사람이다. 교육은 ‘인적자원관리’를 담당하는 일이며, 영어공부와 배낭여행, 성형수술은 자신에 대한 ‘투자’고, 직장인들은 노동자가 아닌 ‘1인기업’으로서 자신을 ‘경영’하는 이들이다. 우리 모두가 경영학자인 셈이다. 자기를 관리하는 것이 신성불가침의 성공법칙이 되는 현상은 사회적 연대에 대한 개념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함께 간다. 성공과 실패가 자기관리에 달려있다면, 실패의 책임 역시 개인이 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복지나 사회적 연대의식이 뚜렷이 있었던 적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는 아예 그것이 없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자기관리 시대에 약자와 패자, 소수자 같은 타자들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 타자들에 대한 체계적 착취가 자연법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은 그래서 당연하다.

내가 나를 통제한다고 해서 내가 진정 자유로운가? ‘자기관리’라는 말은 마치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절대적 자유를 가진 것 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근본주의가 그렇듯, 자기관리에 대한 강박은 또 다른 억압이고 통제다. 그 억압과 통제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해서, 이 시대가 진정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가 가장 강조되는 때야말로 억압과 통제가 도를 넘은 때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며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시대, 여유롭고 삐딱한 이들이 ‘개성적’인 게 아니라 ‘실패하는 사람’의 전형이 되는 시대, 사회 참여보다 학점과 스펙관리가 더욱 중요해진 시대, 개인이 스스로의 ‘품질’을 ‘관리’하며 사는 처참한 삶이 ‘매력’이 되어버린 시대가 우리 시대라면 이보다 슬픈 시대는 없다. ‘자기관리’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우리 삶의 ‘진정한 관리자’는 자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빅 브라더’는 이렇게 언어부터, 문화부터 장악하는 것이다. 노예로 하여금 주인과 ‘같은’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가장 철저한 지배다. 이 언어, 이 문화, 이 지배에 작은 틈을 만드는 것이 절실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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