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1월 2012-11-05   2507

[통인] 아웃사이더의 영화, 그리고 사회

<남영동1985> 영화감독 정지영

 

아웃사이더의 영화, 그리고 사회

영화감독 정지영 

 

박유안 기웃기웃 번역가   사진 박영록 사진가 

 

고통의 치유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를 앓는 사람들 중에는 서슬 퍼렇던 공안정국에서 온갖 고문에 시달려 간첩으로 몰린 이들도 있다. 까마득한 옛일처럼 들리는 고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만든 영화가 나왔다. 영화 <남영동 1985>는 올해 초 흥행한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의 작품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거의 모습을 정공법으로 담은 화제작으로, 11월 22일 개봉이 확정된 상태다. 정 감독을 고양에 위치한  영화제작사 아우라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남영동 1985>가 드디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래 고 김근태 장관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데, 주인공 박원상이 연기하는 역할은 김근태가 아니더라.

굳이 김근태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물론 그가 겪은 22일 간의 이야기를 넣었고 그 후일담도 그의 인생 궤적을 따랐지만, 이 영화를 그 한 사람의 고통과 고뇌,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국회의원, 장관이 된 김근태 씨에 비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 처참하게 망가진 다른 고문 피해자도 많다. 그런 피해자들을 많이 인터뷰했는데, 영화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말미에 짧게 밖에 보여주지 못했는데, 그들의 증언을 홈페이지에 다 올려서 국민들이 낱낱이 볼 수 있게 해드리겠다. 

 

고문 장면을 길고도 고통스럽게 묘사하셨더라.  

고문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관객들도 느꼈으면 한다. 시나리오 쓰면서 제일 고민한 게, ‘관객이 그 아픔을 같이할까’였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알량한 민주주의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거쳐 이뤄진 거 아닌가? 그러면, 가만히 앉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보상을 얻게 된 사람들은 그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이게 소중한 걸 알고, 이게 침해받고 훼손될 때 옳지 않다고 나서지 않겠는가.

 

함께 아파해야 함께 지킨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지의 반응은 어땠나? 

생각보다 관객 반응이 뜨겁다. 처음에는 고문이 영화 전체에 걸쳐 다뤄지니까 지겹고 끔찍해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관객들이 같이 아파해주고, 그렇게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울림이 있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영화를 봐주시니 고맙고. 

 

감독님은 ‘진보와 보수가 서로 어우러지는 사회’를 희망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굳이 대선 전에 옛 과오를 청산하자는 민감한 의도의 영화를 개봉하려 하시는가?

대선 전에 완성되어 개봉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대선에 좋은 역할 했으면 한다. 예컨대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본다면, 자신이 말하는 통합과 화해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지 실마리를 얻을 것이다. 과거 반성하겠다, 잘못 인정하겠다고 말만 할 게 아니고, 우리 사회에 엄연히 남아 있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답안을 찾아야 하는 거다. 그건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재심 청구해서 무죄 입증하고 국가 보상 받아야 할 고문 피해자들이, 정작 이 사회가 무서워서 ‘재심 청구를 맘대로 해도 되나’ 하며 움츠러들어 못 나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라도 구제하는 게 진짜 민주주의일 거다.

 

이 영화가 당면한 대선 국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보다 성숙하게 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는 건가? 

이 영화의 목적이 우리 사회의 성숙에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데 기여를 한다면 감독으로서는 보람이 크겠다. 

 

영화의 목적은 무엇으로 두고 작업하셨나? 

인간을 그리겠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인가? 권력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는 것이었다. 

 

자본에 휘둘리는 영화판

 

젊어서 잘 만드는 영화, 나이 들어 잘 만드는 영화가 다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뜻인가? 

사실 한국 영화 산업 환경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대기업 계열 투자회사에서 작품을 선정하는데, 그 실무자들은 대개 젊다. 그런 사람들이 나이 많은 연출자와 소통하며 영화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원로들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검증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을 제쳐두고 젊은 감독들만 대상으로 누가 우리 영화를 잘 만들까를 논하고 있다. 어떤 해는 신인감독 데뷔율이 50%를 넘는다. 그렇게 데뷔한 감독들이 첫 영화를 흥행시키지 못하면 다시 기회를 얻기 힘들다. 좋은 재목들을 버리고 아직 미완의 재목들을 가져다 쓰고선 또 버리고…….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좋은 재목이 될 인재들을 왜 섣부르게 미리 뽑아 쓰고선 모가지를 댕강 잘라버리느냐, 그런 실태가 안타까워 한 말이었다. 

 

남영동 1985

 

<부러진 화살> 흥행 이후에 제작 환경의 변화가 있었나? 후속작 투자가 순조로워졌다든가. 

<부러진 화살> 성공했다고 <남영동 1985>에 돈 댈 사람 아무도 없는 거, 이게 한국 영화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행히 <부러진 화살> 흥행으로 돈을 벌어 저예산으로 직접 <남영동 1985>를 제작할 수 있었다. 사회 정치적 소재는 사람들이 뉴스로 때우지, 굳이 극장까지 가서 안 본다는 미신이 영화판에 있는데, 그건 그들 얘기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두개의 문> 등으로 이어지는 수요가 있는데도 영화 산업에 반영을 안 시켜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활동을 하시면서 청와대 앞 1인시위 등 앞장서서 역할을 하셨다

분명히 해야 할 말을 사람들이 안해서 내가 해버렸다. 그랬더니 옆에서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이 네 말이 맞다며 같이 나섰고, 그러다 보니 내가 영화 운동의 주역 아닌 주역이 되어 있더라. 영화 만들 때도, 내가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1985>를 만든 건 아니다. ‘왜 이런 걸 안 하지? 이런 게 재미있는 거 아냐?’ 그런 나의 캐릭터가 작용한 거다.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준 내공은 어떻게 다지신 건가?

내공이 아니다. 타고난 거지. (웃음) 청소년기에 신구문화사의 전후문학전집을 많이 읽었다. 참여문학 대 순수문학 논쟁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내가 참여문학을 옹호하고 있더라.  

 

책을 많이 읽으셨나 보다.

대학생 땐 노느라 책을 별로 안읽었다. 아, 요즘 학생들 끔찍하게 불쌍하다. 내가 좋아하는 홍세화 선생 말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산다”는 게 있다. 어릴 땐 대학 가려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 가선 취직하려 공부하고, 취직하면 진급하려고 열심히 일하고, 재산 좀 모았다 싶으면 애들 위해서 또 정신없이 일하고, 그렇게 만날 내일을 위해서만 사는 거다. 

오늘을 충분히 즐기고 오늘을 알차게 잘 살 때 내일이 있는 거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면서 만날 내일만 생각하다 보니, 엉뚱하게 과거는 잊어버리자고 우기는 사람들도 나오는 거 아닌가. 

 

양극화는 줄이고, 다양성은 지켜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 

단연 교육이다. 학교에서 학생들 만나보니 활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항상 걱정을 하고 있다. 고생해서 대학에 들어왔으면 이제 내가 사회에 나가서 뭘 할까를 고민하고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저 스펙 쌓고 취직 준비만 한다. 이게 뭐냐. 이래서 어떻게 인재를 키운단 말인가.

영화 하다가 MBC에 스카우트 되어 1년 정도 들어가 일했다. 당시 드라마 제일 잘 만들던 PD가 김종학, 고석만 둘이 있었는데, 소위 ‘SKY’(서울대-고대-연대)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송국 들어가보면 입사 시험 방식이 그렇다보니 학벌 좋다는 애들이 대다수다. 선발 방식이 잘못된 거다. 

 

영화판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한데, 어떤 문제가 있나.

누가 대기업에 줄 잘 서느냐를 다투는 분위기다. 투자, 제작, 배급, 상영, 상영 후 부가가치 산업까지 대기업이 다 독점한 상황이어서 대기업에 줄 서지 않으면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도태되기 십상이다. 올해 한국 영화 점유율이 70% 가까이 되는데, 이런 구조적 모순 속에서 한국 영화 호황이 오니까 더 염려스럽다. 그런 모순적 시스템이 한국 영화를 발전시켰다고 오해할까봐 말이다. 

대기업의 힘이 강하면 영화계 내부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다양성은 훼손된다. 자본이 선호하는대로 만들어 갖다 바치기 시작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다. 대기업의 힘을 견제하는 시스템이 나와야 한국 영화가 살 수 있다. CJ 같은 대기업이 1등 하겠다는 생각에만 젖어 덩치를 키우는데, 그러다간 자기도 죽고 영화계도 죽는다. 누구는 떼돈을 벌어 건물을 몇 채나 사는데, 어떤 영화 관계자는 생활고에 자살을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남들보다 더 고민하고 한발 앞서 발언하는 영화감독 정지영. 책상 위에 읽다가 엎어둔 책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똑똑한 바보들>. 쉬운 길, 편한 길을 두고 “나 스스로에게 쪽 팔리고 싶지 않다”는 원칙을 지키며 일해왔다는 정지영 감독이야말로 똑똑한 바보가 아닌가. 사회성 짙은 주제로 꾸준히 우직하게 영화화하는 그가 적지 않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반가운 이유다. 

만사가 거대 자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대, “좋은 글 나쁜 글을 분간해야 하듯, 좋은 영상 나쁜 영상을 가려낼 안목”을 교육해야 한다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는 우리의 이 알량한 민주주의를 보다 낫게 하도록 관객을 부추긴다. 지난해 <부러진 화살>이 그랬고, 이번 <남영동 1985>가 그럴 것이다. 

 

<남영동1985> 영화감독 정지영

 

 

글 박유안

‘바람구두’라는 출판사도 하고 있지만, 요즘은 연애, 여행, 혁명, 참선 등 일 아닌 다른 온갖 것들을 읽고 쓰고 옮기는 일에 더 재미가 좋다. “까칠해도 친절하게”가 삶의 모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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