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1999-12-16   556

[제37호 쓴소리] 사회적논쟁으로 다시 시작되어야 할 빈곤보고서 파동

대통령님,

추운 겨울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가는 천년을 아쉬워하고, 오는 천년을 축복하는 함박눈도 내렸습니다. 한데, 왠일인지 몇 년 전만 해도 거리를 울렸던 크리스마스 캐롤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쉽게 들을 수가 없습니다. TV나 신문에선 올 겨울, 호텔예약이 이미 끝났고, 백화점은 발디딜틈 없이 붐빈다는데 조금은 이상한 일입니다. 한데, 이렇게 들뜨고 기쁜 겨울이 오히려 반갑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난한 자의 겨울은 더욱 춥다"라는 너무나 평범한 말이 진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올 겨울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추울 것 같습니다. 경기가 되살아나고 소비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를 더욱 키운 결과라는 서글픈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11월 10일, 서울대학교에선 국제기구인 UNDP의 용역으로 저희 참여연대가 작업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실태와 빈곤감시시스템』이라는 보고서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우리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고, 중산층이 붕괴하여 빈곤층이 늘어났다는 정도의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실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결과는 없었습니다. 이에 저희들은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에 임했고, 빈곤연구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필자들은 최선을 다해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자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단순한 전화인터뷰나 기존문헌검토가 아닌, 정부의 공식통계자료를 직접 구입하여 분석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을 총괄하는 자료가 없고, 자영업자의 소득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부자료가 없는 등 연구의 어려움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가용한 자료를 최대한 동원하여 분석을 하였고, 나름대로의 연구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빈곤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세계의 빈곤문제와 한국의 빈곤문제를 비교검토하고, 한국의 빈곤문제를 역사적으로도 접근하였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이용하여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빈곤층으로 편입된 인구의 특성과 실태, 소득격차의 확대정도 등을 살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빈곤인구의 규모 등을 추정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빈곤인구규모의 추정은 내년부터 실시될 국민기초생활보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필수적 작업이었습니다. 빈곤인구의 규모가 추정되어야만 이에 근거한 예산배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동안 우리 사회의 빈곤층의 생활을 유지시켜 온, 가족이나 친지의 보조를 통한 비공식복지의 현황과 한계, 나아가 현재 정부의 빈곤대책의 공과(功過)를 꼼꼼히 분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고 여겼기에 정부관료와 각계 전문가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하여 보고서 내용에 대한 토론의 자리를 가졌던 것입니다.

저희는 이 보고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빈곤실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현저히 부족한 빈곤감시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UNDP를 통해 전세계에 배포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정확한 통계와 분석을 제시하고자 했고, 전문가들의 지적을 충분히 수용하고자 공식적인 토론의 자리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지적되었던 몇 가지 지점들을 충분히 재검토하여 수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출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회를 가질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이러한 기대와 바램은, 저희들의 상식으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 보고서에서 최저생계비 이하 인구의 인구규모를 추론한 결과 약 1000만명 정도가 나왔습니다. 다소 높은 수치였기에 연구자들 스스로도 조금은 놀랐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사용한 자료와 방법론상으로는 분명히 그러한 결과가 제시되기 때문에 저희들이 자의적으로 수치를 가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최종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다양한 방법론으로 빈곤인구의 규모를 추정하여 이를 함께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날, 발표회 자리에서도 정부 관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인구규모추정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었기 때문에 저희들은 정부측 입장을 충분히 수용하여 보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있은 며칠 후부터 정부측에선 연구자 개인에게 수십통의 전화를 걸어 연구에 사용된 방법론과 자료에 대해 하나하나 질문하고, 너무 수치가 높은 것이 아니냐라는 의견을 제기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저희들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소 심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것까지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데, 저희들이 깜짝 놀라게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재정경제부에서는, 이 보고서에 대한 정부대책을 논의하면서 마치 "공안기관 대책회의"를 연상시키는 작업을 진행한 것입니다.

재정경제부에서는 『UNDP, 참여연대의 한국 빈곤실태 발표내용 검토』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저희 보고서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건의 마지막 장 '향후 대응방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직접 대응보다는 전문가를 통한 대응방안 모색 현재까지 공식적인 빈곤통계가 없으며, 빈곤인구 추정방법이 논란의 여지가 있어 직접 대응시 실익보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큼, KDI, 보건사회연구원 등 연구기관의 전문가가 UNDP 용역의 빈곤실태분석에 대한 문제를 주요언론기고 등을 통해 지적, 관련기관(복지부, 통계청, KDI, 보건사회연구원)의 충분한 자료검토와 설득력있는 논리개발이 필요,「IMF 2년 국제포럼」행사를 활용 KDI주관(재경부 후원)하에 12.3일 개최되는 동 포럼에서 최근의 저소득층 정책에 대한 평가 등을 주제로 한 세션을 마련하여 빈곤문제를 다루도록 함"

저희들은 이 내용을 접하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제대로 된 빈곤통계가 없었다면 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고, 저희들의 작업이 갖는 중요한 목표 역시 그것입니다. 한데, 이러한 노력은 뒷전에 두고 국책기관 연구원들을 동원하여 언론기고를 통해 저희 보고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도록 시키고 정부는 뒤로 빠지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책기관이 정부의 나팔수 노릇이나 해야한다는 것이 슬프기 그지없고, 민간의 보고서가 제기하고자 하는 핵심주장이 무엇인가를 살피기보다 흠집내기에 급급하며, 정부정책을 비호하기에만 여념이 없는 현 정부관료들의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보건복지부 역시 내부문건을 작성한 후, 보도자료를 통해 저희들 연구가 '잘못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UNDP에도 공문을 발송하여 이러한 연구가 진행된 것에 대해 '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보고서 수정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직후, 저희들은 보고서가 '잘못'이라고 지적한 내용에 대해 다시 조목조목 반박하여 보건복지부에 공문을 발송하였고, UNDP에 그러한 공문을 보내고 보도자료를 일방적으로 배포한 것 등에 대해 '유감'의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저희 보고서를 문제삼는 구체적 근거와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빈곤인구규모 등 정확한 관련수치를 답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답변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저희들은 이번 보고서 발표 이후 벌어진 사건들 자체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정부가 우리 사회의 빈곤인구 규모와 그 특성에 대해 발표하고, 이에 대해 시민단체나 학자들이 문제를 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민관(民官)이 함께하는 빈곤감시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거나 말입니다.

정부가 하지 않는 일(또는 못하는 일)을 시민단체나 학자가 최선을 다해 시도했다면, 이에 대해 정부가 겸허히 그 내용을 수용하고 이를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흠집내기'에 급급할 수 있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을 정부를 대신하여 싸움에 앞세우고, 채 완성되지도 않은 보고서를 문제삼아 그것을 용역한 국제기구에 항의공문을 보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는 분명히 심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와 같은 '기아선상의 절대빈곤'은 아닐 지 몰라도,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빈부의 격차'와 '장기실업의 증대' 등 정부와 민간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결코 풀 수 없는 난제인 것입니다. 당장의 추위와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빈곤층이 늘어가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상대적 박탈감과 심리적 위축상태 또한 커다란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 실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조차 정부가 막아버리려 하는 것은 그 어떤 문제보다 심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당장 내년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소득파악과 그에 근거한 빈곤인구의 규모와 특성에 대한 조사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올해 국민연금 확대실시를 계기로 너무나 분명해진 정부의 소득파악능력부재는 사회복지의 실현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요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득파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비판과 불신이 발생하게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민단체가 최대한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기반하여 조사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를 장려하고 돕기보다는 '잘못된 것'이라 일방적으로 비방하고, 연구자 개인과 국제기구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저희들이 UNDP와 함께 이번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우리 사회 빈곤문제해결을 위한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어쨌든, 이 보고서를 계기로 빈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고,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에 대화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정부가 정확한 자료와 방법론에 근거하여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 빈곤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해 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하겠습니다. 또한, 정부 아닌 시민단체나 학자의 연구성과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다른 훌륭한 연구성과에 의해 비판받고 보완되는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지길 진정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빈곤문제가, 이번 보고서를 계기로 단순한 일회성 '파동'이 아닌 진정한 사회적 논쟁으로 다시 시작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999년 12월 16일

홍일표 시민감시국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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