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6-12-11   814

[로스쿨 지지자의 편지⑪] “지금 바로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에게 보내는 열한 번째 편지

법률가 양성 및 선발제도의 개혁을 위해 지난 10년간 논의되었으며, 2003년부터 운영된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마침내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로스쿨 제도임에도, 현재 국회에서 관련 법률안의 심의가 완전히 중단된 상태입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국회의원들에게 로스쿨 제도 도입에 필요한 법안을 조속히 심의하여 법률가 양성 및 선발제도를 개혁하는데 동참할 것을 설득하기로 하여 지난달 15일부터 ‘로스쿨 지지자의 편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열한 번째 편지는 김창록 경북대 법대 교수의 “지금 바로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순영 의원님.

로스쿨지지자들에게 보내주신 답신(“법학전문대학원, ‘법학교육판 새만금 사업’으로 전락을 우려한다”, 06.11.23., 최순영 의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열 명의 국회의원에게 보낸 열 통의 편지에 대해 유일하게 되돌아 온 응답이기도 하고,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은 응답이기도 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큽니다.

답신에서 지적하시거나 제기하신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한상희 교수께서 노회찬 의원께 보낸 편지(‘로스쿨 지지자의 편지’ 10호)를 비롯한 앞선 편지들에서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습니다만, 답신이 저의 편지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고 있기도 하고 논지 일부를 비판하고 있기도 해서, 이렇게 재답신을 띄워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문제는 ‘구조’입니다.

답신에서 우선 눈길을 끈 것은 법학교수들에 대한 엄한 질책입니다. ‘법학교수’라고 하는 부담스러운 이름을 힘겹게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법학교수 여러분께서 과연 얼마나 자기 제자들의 미래와 이 땅 사법구조의 개혁을 위해 처절하게 법학교육의 개혁과 법조기득권 타파를 위해 애쓰셨던가요?”라고 하는 호된 꾸지람에 접하고서, 그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법학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지금의 문제 상황에 대해 법학교수들에게 커다란 책임이 있습니다. 최 의원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바로 현장에서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당사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선두에 서서 투쟁할 때에 그러한 요청이 일반의 동의를 얻고 대중들의 연대를 얻어낼 수 있는 것”임에도, 법학교수들은 법학교육의 개혁에 충분히 앞장서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최 의원님의 너무나도 타당한 그 질책이, ‘법학교수들이 열심히 하기만 하면 지금의 틀 속에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다’라는 낙관론으로 이어지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개인이나 집단의 노력의 차원을 넘어선 ‘구조’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사법시험이라고 하는 하나의 점(點)에 의한 선발’이라는 ‘구조’이며, 그 결과로서 생겨난 대학 법학교육과 법률가 자격 사이의 단절, 그리고 법학교육의 사법시험에 대한 종속입니다.

한국에서 법률가 자격을 얻기 위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지난 30여 년간 사법연수원 입소자 중 탈락한 사람의 비율은 채 1%가 되지 않으니 사법연수원 수료도 부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이렇게 사법시험이 중요한데, 그 응시자격으로 대학에서 체계적인 법학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률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은 법과대학의 강의실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교과목과 교육방법을 동원한 심도있는 강의는 오히려 학생들의 기피대상이 됩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것은 시험 합격에 필요한 기술입니다. 그래서 법학교수들은 다름 아닌 ‘대학’에서 객관식 시험문제를 출제하며 시험 공부를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최 의원께서 안타까워하신 ‘대학 교정에 나부끼는 사법시험 합격자 현수막’은, 법학교수들이 “자랑”하거나 “축하”하기 위해 내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뒤틀린 ‘구조’에 의해 강요된 “부끄러운 한국 교육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대학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법률가 자격을 부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의대를 졸업해야 의사가 될 수 있고, 약대를 졸업해야 약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법대를 졸업해야 법률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현상적으로 볼 때도, 의사・약사・변호사 등 전문직업인(profession)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체계적인 교육과 자격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법률가만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시험에만 합격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핵심인 것입니다.

‘구조’를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일본의 경험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최 의원께서는 “일본의 법과대학원[일본의 로스쿨은 법학전문대학원이 아니라 법과대학원입니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바람직하고 다양한 변화들은 실상 법과대학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 아닙니다”라고 단언하셨습니다만, 일본에서 배우고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 저의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시험으로만 법률가자격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한국・대만 정도입니다. 이들 세 나라에서 지난 오랜 세월동안 법학교육 개혁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바람직하고 다양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교육과 자격을 연계시키는 방향으로 ‘구조’를 바꾸자 곧바로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변화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숫자만 늘려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최 의원님의 답신에서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지적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로스쿨 지지자들도 모두 동의합니다. 하지만, 숫자의 문제도 따로 떼어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숫자만 늘려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 것입니다. 1981년에 그 때까지 100명대였던 사법시험 합격자 정원을 300명으로 늘였습니다. 그 결과 2%대였던 합격률이 3%대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약효’는 3년 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4년째인 1984년부터 다시 2%대로 떨어졌고, 14년 후인 1995년에는 1.49%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1996년부터 매년 증원을 해서 2001년에는 1,000명으로 늘였습니다. 이번의 증원은 폭이 컸고 지속적이었기 때문에 합격률은 지속적으로 올라가서 2005년에는 4.64%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증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합격률이 원상복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 점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숫자에만 매달렸던 일본의 경험에서도 확인된 것입니다.

게다가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숫자만 늘리면 새로운 문제도 생겨납니다. 법학 이외의 학문을 공부해야 할 학생들이 사법시험에 매달리게 된 것이 그것입니다. 사법연수원생 중 비법학 전공자 비율은 사법시험 합격자 정원이 700명으로 증원된 1998년부터 급격하게 늘어나 30% 전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놀랍게도’ 로스쿨 반대론자들은, 이 현상을 ‘이미 다양한 전공자가 법률가가 되고 있으니 로스쿨은 필요없다’라는 주장의 논거로 동원합니다. 하지만, 비법학 전공자가 시험공부만 해서 법률가가 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은, 체계적인 법학교육을 받지 않은 법률가가 늘어났다는 것이니,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법률가의 숫자를 ‘늘린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법률가의 숫자는 사회의 수요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늘어나야’ 하는 것이지, 국가나 특정 집단이 나서서 인위적으로 ‘늘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국가를 등에 업은 법률가집단이 자신들의 숫자를 스스로 정하는 뒤틀린 구조를 고수해왔습니다. 법무부장관이 대법원과 대한변호사협회의 의견을 들어 사법시험 합격자의 정원을 정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일본의 변호사연합회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법조인구는 본래 이용자인 시민의 관점, 시민의 수요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조인구를 법률가들만에 의해 통제하는 시스템은 결코 적절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애당초 국가는 변호사의 숫자에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공무원인 판사와 검사의 숫자를 국가가 정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소외 계층이나 소외 지역에도 법률서비스가 미칠 수 있도록 필요한 변호사의 최소한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영업자인 변호사에게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주기 위해 국가가 숫자를 통제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헌법의 기본원리로 내걸고 있는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또 ‘적정 변호사 숫자’를 미리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변호사가 일정한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사법시험 합격자를 연간 600명으로 통제해야 한다라는 대한변협의 낯 두꺼운 주장은 제쳐둔다고 하더라도, 적정 변호사 숫자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동원하는 변수에 따라 2,000명에서 8,000명까지 다양합니다. 이것은 곧 적정 변호사 숫자는 미리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국민들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 사전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숫자를 늘리자라는 주장은, 법률가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현실에서 정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본질에서는 벗어난 것입니다. 숫자를 늘리는 것을 선행시킬 수는 없으며, ‘구조’를 바꾸는 결과 숫자가 사후적으로 적정하게 정해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의 법률서비스 수요에 맞추어 법률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생겨나고, 그 교육기관의 졸업자가 법률가자격을 얻게 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숫자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구조’를 바꾸는 것은 통째로 바꾸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핵심은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구조’를 바꾸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제도의 도입은 최 의원께서 말씀하셨듯이 “학제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 법학전문대학원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그것이 “학제를 하나 더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러한 생각의 밑바닥에는 법학전문대학원의 법학교육도 지금의 법과대학 교육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통째로 바뀌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대학이 법학전문대학원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한 인적・물적 설치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정부가 제시한 법률안에 담긴 기준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해서, 그것에 따르면 미국 로스쿨의 90% 이상과 일본 법과대학원의 70% 가까이가 한국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인가를 받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법학전문대학원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각 법학전문대학원은 2년 마다 자체평가를 해서 공표해야 하고, 5년 마다 외부평가기관의 엄격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이 바뀝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갓 해방된 어린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과정에서 나름대로 지식과 경험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법률가가 되고자 하는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진 성숙한 학생들입니다. 그들은 장차 법률가가 되었을 때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며, 법학교수들은 그들의 엄격한 평가를 받으며 그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제도적인 장치들 때문에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법학교육은 통째로 바뀌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0년 넘게 바뀌지 않던 일본의 법학교육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일본의 법학교수가 제도의 요청 때문에 현저하게 늘어난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다가 과로사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만, 변화의 정도는 제도가 어떤 내용으로 도입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변협이 주장하는 것처럼 법학전문대학원의 총 입학정원을 1,200명 정도로 해서 도입하게 되면, 입학하는 것만으로 이미 ‘극소수의 특권적인 변호사’의 지위를 보장받은 학생들이 그저 졸업 학점만을 채우는, 그러한 극소수의 특권적인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겨날 뿐일 것입니다. 거기에 입학하려는 ‘입시낭인’들이 양산될 것이며, ‘법학전문대학원 입시학원’이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뀌는 것은 별로 없고 문제는 그대로인 최악의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로스쿨’의 문제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스쿨’을 옳게 도입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게 되는 문제점인 것입니다. ‘로스쿨’은 교육과정을 통해 법률가를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총 입학정원이라는 숫자의 통제는 애당초 ‘로스쿨’의 본질에 반하는 것입니다. 최 의원께서도 지적하신 대학들의 “천문학적인 투자”도, 사실상 설치‘기준’이 아니라 총 입학정원이 법학전문대학원의 설치인가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는 뒤틀린 제도구상 때문에, 대학들이 어쩔 수 없이 총 입학정원이 설정한 등수 내에 들기 위한 ‘선착순의 무한경쟁’에 내몰리게 된 결과입니다.

사회인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공정성・개방성・다양성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서 도입한 ‘야간 로스쿨’과 ‘통신 로스쿨’은, 총 입학정원이라는 주술에 사로잡힌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총 입학정원제도의 배제를 거듭 요구해 온 것도, 법학교수들이 ‘로스쿨’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수준의 정원을 요구해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이 보다 우월한 제도입니다.

여기까지 저의 글을 읽으셨으면, 아마도 ‘구조의 개혁 좋다, 그런데 그것을 왜 대학원과정에서 해야 하는가, 학부 단계에서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법학교육을 이수토록 하고 일정한 정도의 학업성취를 달성한 모든 이들에게 변호사 자격을” 주자는 제안을 하신 최 의원께서 당연히 가지실 수 있는 의문입니다.

학부 단계에서 법학교육과 법률가 자격을 연계시키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경우가 제도 전환 비용이 더 적게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법학전문대학원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대적으로 더 우월한 제도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학부과정에서 일정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학생들에게 법률가로서 필요한 지식과 소양을 가르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분쟁해결자로서의 법률가에게는 역사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장점의 의미는 매우 큽니다.

또한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현실 적합성도 더 뛰어납니다. 그것은, 학부과정에서는 다양한 전공과 폭넓은 교양에 주력하게 하고, 대학원과정에서 전문교육을 시킨다고 하는 우리 교육체제의 지향방향과 더 잘 부합합니다. 난마와 같이 얽힌 대학 법학교육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법학교육 개혁론자들의 바램에도 더 잘 합치합니다. 그리고,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될 법률가 숫자의 증대에 대한 법조의 우려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요청에도 더 잘 호응합니다.

뿐만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오랜 논의 끝에 보다 낫다고 판정을 받은 제도이기도 합니다. 1995년과 1998년의 ‘로스쿨’ 논의 과정에서 이미 학부 법학교육을 개선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라고 하는 다양한 주장이 나왔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2000년대의 논의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이것은, 10년이 넘는 논의의 과정에서 법학전문대학원의 상대적인 우월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최 의원님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 의원님의 제안이 로스쿨 지지자들의 그것과 충분히 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최 의원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논의가 부족하다’, ‘확신을 달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장일치를 이루어낼 수 없는 어떤 사안에서도 논의의 충분성은 결국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대의 ‘로스쿨’ 논의는 지금까지의 어떤 논의보다 상대적으로 충실했습니다. 사법개혁위원회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수많은 자료들을 인터넷을 통해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법과대학들과 국회의원들이 개최한 수많은 공청회・토론회의 자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가 이미 1년 전에 국회에 제출해 놓은 법률안이 있고, 법학교수들이 만든 대안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국민으로부터라면 또 모를까, 국회로부터 ‘논의가 부족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솔직히 민망한 일입니다. 입법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국회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마땅히 그 모든 논의과정을 이미 되짚어 본 상태에서 개정안을 내든가 아니면 정부의 법률안에 필적할만한 대안을 내놓으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 의원께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고 하신 “자세한 방법”은 이미 제시되었거나 적어도 지금은 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은, 다양한 현실적인 요소를 배려하면서 다수의 정책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인 입법과정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책의 선택은 우열의 판단이지 진위의 판단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에는 100%가 있을 수 있지만, 정책의 선택에는 100%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국회의원이신 최 의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신’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고시낭인’으로 상징되는 문제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법률시장 개방의 높은 파도는 곧 들이닥칠 기세인 지금, 노무현 정부 내내 논의를 거듭해서 법률안까지 마련되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개혁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인 것입니다. ‘법학교수’들이 국회의원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보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만큼 문제의 골이 깊고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법률가 양성 제도의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최 의원께서,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도입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2006년 12월 11일

김창록 드림

“법학전문대학원,‘법학교육판 새만금 사업’으로 전락을 우려한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

⑩ “저소득층도 쉽게 로스쿨에 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⑨ “12년 동안 우리는 멈추어 있었습니다”

⑧ “로스쿨은 바로 우리 교육의 문제입니다”

⑦ “국회, ‘변호사기득권보호위원회’의 악명을 씻어주십시오”

⑥ “로스쿨에서의 교육, 그 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⑤ “로스쿨 반대 이유, 이의있습니다”

④ “획일적인 사법연수원 교육,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③ “전태일이라면 로스쿨 도입에 동의했을 것”

② “세상은 왜 로스쿨을 원할까요”

① “일본 로스쿨,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김창록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경북대 법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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