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3678

[반전평화문화기행] 게르니카 : 피카소와 이병주

2월 말부터 참여연대 사무실 뒤 은행나무에 까치가 둥지를 짓고 있다. 한 마리 까치는 높은 안테나 위에서 망을 보고 남은 한 마리는 나뭇가지를 주어와서 집을 짓는다. 주어온 한 가지를 입에 물고 작은 원형 집 여기 저기를 꼭 꼭 밟아본다. 더 쌓아야 할 곳이 어딘가 확인하고 나서야 입에 물려 있는 한 가지도 마침내 ‘집’이 된다. 하루 종일 그 모습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거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 자라고 자식 낳아 키우다 갈 날이 되면 또 그렇게 가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순리에 따라 일생을 보낸다. 오로지 인간만이 순리를 거스를 줄 알며, 자신을 보듬고 있는 세계를 파괴할 수 있고, 순리에 따라 일생을 보내는 나머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죽일 수도 있다.

 
▲ 사진 : 게르니카, 피카소, 1937년,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아트센터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 안젤. 이집트의 유명한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무희(舞姬)다. 그녀의 미모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뭇 남성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 그녀의 춤사위는 돌이킬 수 없는 주문으로 숱한 발걸음을 다시 잡아 끈다.

수천만금을 벌었으나 한 푼도 헛된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 스페인 태생의 사라 안젤은 열 대의 비행기를 살 수 있는 그 날까지 돈을 모은다. 열 대의 비행기 가득 폭탄을 싣고 독일 어느 중소도시를 폭격할 그 날만을 위해 하루 하루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셈이다.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한과 복수에의 일념으로…

30년전 그 날, 1937년 4월 26일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 마을의 장날이었다. 주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장날을 맞아 이웃의 소식을 듣고 생필품을 사고 팔기 위해 게르니카 마을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어린 아기의 웃음소리, 손님을 부르는 장사치의 외침소리가 가득한 이 곳에 때아닌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무려 32톤, 5만발이나 되는 폭탄이 투하되었다. 화염 한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인,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의 혀는 칼처럼 뾰족하게 굳어 버렸다.

쓰러진 젊은 병사의 손에는 부러진 칼이,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이미 천근같이 무거워져버린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말도, 소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비명을 지르는 게르니카. 무고한 인명을 1500명이나 희생시킨 게르니카 폭격은 당시 내전을 겪고 있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을 지지하는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됐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피카소가 만든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벽화가 바로 ‘게르니카’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흑색, 흰색, 회색, 갈색 등의 무채색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광기와 절망과 좌절의 절규를 면분할로 표출시켰다.
 
‘소설·알렉산드리아’ (1965년)에서 사라 안젤을 탄생시킨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는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용공세력으로 몰려 군사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독재정권을 유지하던 당시, 이병주가 주필로 있던 ‘국제신보’에 “조국의 부재(不在)”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라”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은 결과였다.
(◀ 소설·알렉산드리아, 이병주 지음, 범우사 범우문고 041 )

이로 인해 이병주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7개월을 복역하게 됐고 수감 기간동안 ‘소설·알렉산드리아’를 구상한다.

정권에 배치되는 불온한 사상으로 10년간 감옥에 갇히게 된 형과 그 동생으로 알렉산드리아에 흘러 들어가는 화자, 화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 사라 안젤과 독일인 한스 셀러 – 는 모두 전쟁의 아픔을 안고 있다.

일제치하를 지나 한국 전쟁과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으로 인해 지리·공간적으로 이별하게 된 형제와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으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돼 버린 사라 안젤, 자신이 나치 독일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출정한 동안 유태인을 숨겨준 동생과 어머니가 이웃의 신고로 혹독한 고문속에 죽어간 사실을 알고 15년 동안 그 신고자를 찾아 헤매는 한스 셀러를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 속에서 구원해 내는 이병주의 방법은 휴머니즘이다. 작품 속 화자의 입을 통해 나온 “이 이상 한 사람의 희생도 더 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통일은 해야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른 인간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글 : 이송희 / 참여연대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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