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1951

[분쟁지역현황] DR 콩고 리포트 “식민통치와 냉전이 가져온 광기의 역사”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침략, 희생, 그리고 불신 : 아프리카의 비극

아프리카에서의 분쟁들은 대부분 서구 제국주의가 그려놓은 식민지형태의 국경선이 그대로 독립국가의 국경선이 되면서 민족, 인종, 종교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흔히들 말하는 국가(=민족국가) 형태로의 통합에 실패하면서 발생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에 단일민족국가의 형태로 되어 있는 나라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21세기라는 문명의 시대에도 왜 아프리카는 아직도 활과 창으로 서로를 죽이는 광기어린 ‘살육의 땅’이 되고 만 것일까요?

20세기초 서구의 자본주의가 더 많은 시장을 찾아 아프리카로 오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됩니다. 제국주의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그들만의 협상으로 인위적인 영토분할이 생기고,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우처럼 자국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다양한 인종들을 분리하여 특정인종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특정한 인종과 종족이 지배계층을 형성하게 되고 소말리아처럼 자신의 친인척과 인종중심의 정책추진과 부정부패는 소외된 인종들의 불만이 쌓이는 계기가 됩니다.

이처럼 근대적인 정치경험도 짧은데다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권력에 대한 독점을 추구하는 경향은 독립이후 독재정치와 빈번하게 발생하는 쿠데타의 배경입니다. 또한 서구 자본주의의 탐욕은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더 많이 수탈하고자 균등한 경제발전을 뒷전으로 미룬 채 농업과 1차 생산품 위주로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농경이나 유목생활을 주로 했던 종족들은 자연스럽게 빈부격차가 생겨났고, 인구의 과잉과 아프리카의 열악한 기후, 토지, 수자원 조건들은 빈곤의 악순환과 함께 환경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에 대부분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앙골라에서처럼 미국과 소련이 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벌이는 대리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접국가들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국내의 인종차별과 탄압이 독재정치를 옹호하는 냉전세력의 지원하에 지속되면서 인종과 종족간의 불신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냉전이 사라지자 폐기처분이 마땅한 소형무기와 지뢰 등 군수물자들이 동유럽, 러시아, 미국, 중국, 유럽 등으로부터 아프리카로 수출되었고, 강대국들은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대해 원조를 무기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프리카 문제에 대하여 선택적인 개입을 하여 아프리카에 ‘신(新)야만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 불 구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의 근대역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따른 희생의 역사였고,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뿌리깊은 불신과 빈곤이었습니다. 종교와 부족전통이 강한 사회문화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소외가 다른 인종과 종족에 대한 배타적 성격을 갖게 하면서 무분별한 ‘살육’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최근 잔인한 학살극의 현장인 르완다는 후투족 정권의 독재정치시기에 투치족에 대한 과잉 적대감을 형성하였고, 이에 맞서는 투치족 역시 이에 상응하는 후투족에 대한 배타성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유엔과 몇 차례 정치적 타협에도 불구하고 분쟁지역에서 계속되는 충돌은 근대적 시민의식의 미성숙과 함께 ‘제국의 역사’에 의해 왜곡되어 형성된 ‘인종주의’ 때문입니다.

독재정권의 몰락 : 새로운 전쟁의 시작

콩고민주공화국 지역의 식민역사는 1878년 벨기에가 통치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원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콩고공화국과 콩고민주공화국은 과거 콩고왕국의 영토였지만, 콩고강을 선으로 콩고공화국은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았고, 콩고민주공화국지역은 이 지역에 대한 벨기에의 권리를 제국주의국가들이 승인하자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이 지역에서 상아, 고무, 야자유 등을 착취하였는데, 채취량을 강제 할당하면서 이를 어겼을 때에는 군대에 의해 형벌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1908년 사유지에서 벨기에 식민지로 바꾸어 통치를 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 총선거를 통해 콩고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냉전시대에는 콩고공화국이 구소련권(2세계)에, 콩고민주공화국이 미국권(1세계)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독립이전부터 카사부부(Joseph Kasavubu)가 이끄는 아바코(Abako: Bakongo Alliance)와 루뭄바(Patrice Lumumba)가 이끄는 콩고국민운동(Congolese National Movement: MNC)이라는 두 개의 정치세력이 있었는데, 연방주의자인 카사부부와 친소련계열의 루뭄바간에 정쟁이 발생하여 혼란에 빠지게 되자 이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모부투(Joseph Mobutu)가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이후 약 30여 년간 장기집권이 계속되었습니다.

모부투는 집권이후 일당제 국가로 독재정치를 하면서 현재의 수도인 레오폴드빌을 킨샤사로 개명하였고, 1971년에는 콩고라는 국명과 강의 명칭을 자이르로 개칭하였습니다. 한편 인접국 앙골라에서 냉전시대의 대리전 양상으로 내전이 발생하자 우익세력을 지원하다 좌파무장세력의 침입을 받았고, 남부 카탕가(Katanga)지역에서 앙골라-쿠바군이 지원한 촘베(Moise Tshombe)가 분리, 독립을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프랑스, 벨기에, 모로코의 파병과 미국의 지원으로 제압되었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다 : 3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후투족과 투치족의 대립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었던 모부투의 30년 독재정치는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운동을 벌인 카빌라(Laurent Kabila)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1990년 미국이 군사 및 경제지원을 중지하자, 권력기반이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1994년 접경지역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지역에는 18세기 벨기에 식민지시절 투치족이 유입되어 투치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르완다의 분쟁으로 후투족이 동부지역에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모부투 정권은 후투족의 반군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1995년 모부투 정권은 동부지역의 키부(Kivu)남부에 거주하던 투치족인 바냐물렝게(Banayamulenge)족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정부군과 르완다 출신 후투족 민병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투치족을 추방하였습니다.

동부 지역은 카빌라가 1967년 인민혁명당(PRP:People’s Revolutionary Party)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곳으로, 카빌라는 우간다와 르완다의 지원을 받아, 투치족을 중심으로 콩고-자이르 해방 민주세력연합(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 ADFL)을 1996년 10월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97년 5월 카빌라가 수도 킨샤샤를 점령하고, 모부투가 망명함으로써 장기집권은 끝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치족 반군들이 후투족 난민촌을 공격해 20만명이 대학살을 당했습니다. 카빌라는 집권이후 국명을 다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개정하고, 자신의 집권을 도운 르완다 투치족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기도 하였지만 종족상으로 후투족에 가까운 반투족이 국민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부담과 일당제를 도입하는 등 권력독점 때문에 1998년 르완다 투치족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투치계의 바냐물렝게족의 국외 추방을 선언하자,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부지역의 투치족들은 르완다, 부룬디의 지원을 받아 콩고민주연합(RCD:Congolese Rally for Democracy), 우간다 지원의 콩고해방운동(MLC:Liberation Movement of Congo)을 결성하여 전투를 시작, 수도 킨샤샤에 근접할 정도로 점령지역을 넓혀 콩고민주공화국의 1/3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앙골라는 자국내 반정부세력을 간접견제하는 차원에서, 짐바브웨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자원을 이유로, 나미비아는 누좀마(Nujoma)대통령이 카빌라와의 친분관계에 의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지원하였고, 수단과 차드도 개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우간다와 르완다, 부룬디 역시 후투족 게릴라 소탕을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여 콩고민주공화국의 분쟁은 대호수지역의 3개 투치족 국가와 중남부아프리카 5개 반투족 국가들이 치루는 국지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친정부계열의 후투족 민병대인 마이마이(Mai-Mai), 르완다 후투족반군인 인트라하메(Interahamwe), 반군세력인 콩고민주연합, 콩고해방운동, 콩고애국자동맹(UPC: Congolese Patriotic Union), 콩고민주연합에서 분리되어 우간다에서 지원을 받는 콩고 민주해방운동대회(RCD-ML)가 얽혀 있어 복잡한 양상을 띠고있습니다.

오랜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이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대립과 얽혀 발생한 1차 내전(카빌라의 모부투 정권 전복)은 냉전시대 패권유지를 위해 독재정권을 묵인한 결과이자, 식민지시대 차별정책으로 지배계급이 된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은 결과입니다. 한편, 분쟁이 확대된 원인은 이 지역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입니다. 정부를 지지했던 국가들로서는 군사적 지원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의도였고, 투치족 계열의 국가들은 국경수호와 반군소탕 등이 그 이유였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지역은 생산량 세계 1위인 공업용 다이아몬드 등 풍부한 자원과 이를 운반하기 위한 주요거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장악은 막대한 부를 의미하는데, 실제로 아프리카에서는 시에라리온의 경우처럼 많은 경우 다이아몬드의 불법거래로 얻는 자금으로 반군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호수지역은 불어권 아프리카와 영어권 아프리카의 경계지역인데, 전세계 40여 개 불어권 국가가 가입한 불어권 국가연합기구를 바탕으로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프랑스와 우간다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간의 물밑경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르완다에서 대학살이 발생한 이후까지 이전의 르완다 정권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허한 평화협상 : 지속되는 민간인 피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리비아,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유엔 등이 중재에 나섰고, 미국도 개입의사를 밝히면서 1999년에는 콩고민주공화국과 주변 참전국들, 반군세력간에 종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지속되는 유혈사태에 따라 종전협정이 무산되는 등 협상이 답보상태였습니다. 이후 2001년 카빌라가 암살되고 그의 아들 조셉 카빌라(Joseph Kabila)가 권력을 이어 받아 평화협정에 나서 콩고내전 관련 6개국(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우간다, 르완다) 회담이 개최되어, 관련국의 군대 철수 및 유엔 군사감시단의 파견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 평화유지군이 활동을 전개하였고, 르완다는 후투족 반군의 소탕을 조건으로 내세워 평화협정에 참여하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2002년 7월에 3만의 르완다 군대를 철수하는데 합의하여 9월에 1진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동부지역에서는 헤마(Hema)족과 렌두(Lendu)족 간에 살육전이 2003년 3월에도 벌어져 400명이 숨지고 500명이 실종됐으며 수많은 약탈과 강간, 살인, 파괴행위가 발생하는 등 인종간 대립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헤마족은 벨기에 정착민들이 떠나자 많은 땅을 차지하였는데 이것이 렌두족과의 긴장을 조성하게 되었고, 내전 중에는 우간다를 지지하는 헤마족과 정부를 지지하는 렌두족으로 나뉘어져 부족간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미국 뉴욕의 국제구호위원회(IRC)의 조사에 따르면 1998년 8월 2차 내전 이후 최소 2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희생자들은 정부군과 반군들 모두로부터 불법처형과 공격에 의해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난생활에서 비롯된 질병과 영양실조로 숨진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내전지역은 스위스 간호사 등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직원 6명이 살해당하는 등 구호단체의 접근이 어려워 환자치료가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게다가 2002년에는 내전지역인 동부의 키부 호수 근처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수 백 명이 사망하였고, 고마(goma; 동부 키부호 인접)시 정수공장이 용암으로 파괴되어 식수난과 콜레라 등 전염병의 위험에 난민들과 지역민들이 노출되었습니다.

난민은 전쟁·분쟁지역에서 그 치유가 오래도록 남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2002년에 유엔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전세계에 실향민·유랑민(Internally Displaced People)이 2천5백만 명이 있으며, 유엔이 집계한 난민보다 두 배나 많으나 국제 원조나 난민지위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단지 5명중 한 명 정도만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습니다. 2천5백만 명 중 절반 가량인 약 1천3백5십만 명이 아프리카에 있으며 이중 1천만 명이 수단, 앙골라, 콩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원과 자금제공도 인도적 관심보다는 정치적 이유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아 발칸지역(코소보)이나 아프가니스탄, 터키(지진발생) 등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 만성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아프리카는 이러한 인도적 차원에서의 지원에서조차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실향민·유랑민과 국제난민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 가운데 콩고민주공화국에 수용된 난민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0만 명 수준이었지만, 1994년과 1995년에는 각각 172만 명과 133만 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주로 앙골라, 부룬디, 콩고공화국, 르완다, 수단, 그리고 우간다 등 인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는데, 1996년 1차 콩고 내전 당시 르완다의 분쟁 상황과 맞물리면서 후투족 난민 20만 명이 사망하였으며 11월 난민 역사상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인구인 50만 명이 이동하였습니다.

분쟁으로 또는 그 이후 고통받는 국가들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더 이상 지구촌 시화는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만성빈곤, 영양실조는 서구 식민지국가가 전세기에 저지른 범죄행위에 연유하므로 그들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국익에 눈이 멀어 자신의 과거행적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아프리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강대국들은 보다 책임있는 자세로 나서야할 것입니다. 공적 원조(ODA)의 확대와 식민역사와 자원수탈, 환경파괴 등으로 이미 갚을 만큼 갚은 어마어마한 외채의 탕감도 획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뢰는 여전히 민간인촌에 매설되어 일상적으로 전시생활을 하는 지역이 많습니다. 이 지역에서 소형무기, 지뢰의 감축과 폐기운동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비극을 막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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