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4500

[분쟁지역현황] 카슈미르리포트 “‘힘의 정치’가 파괴한 ‘동양의 스위스’ : 카슈미르 분쟁”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것이다.

카슈미르(Kashmir) 지역 분쟁의 서막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에 K-2봉이 우뚝 서 있고, 카라코람 산맥의 만년설이 펼쳐진 카슈미르. 영국의 록그룹 레드 제플린이 찬사를 보내기도 한 카슈미르는 아름다운 숲들과 호수, 초원과 사막이 어우러진 비경을 이루고 있어 ‘동양의 스위스’라 불리는 곳입니다.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카슈미르(cashmere) 모직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현재 카슈미르 지역의 인구는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을 합쳐 약 1300만명에 달하며, 전체 주민 가운데 약 77%가 이슬람교도이고, 나머지는 힌두교와 불교·시크교 등입니다.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를 거쳐, 서기 500년경에는 파키스탄 북부 탁실라를 중심으로 불교 문화가 꽃피었던 곳입니다. 11세기부터 이슬람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다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도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카슈미르에는 560여개 국가들이 있었고, 이들 왕국은 소수 힌두교계(22%)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인 이슬람교도들을 탄압하며 영국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였습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할 당시 인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자율적 결정에 따라 인도 또는 파키스탄으로 편입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번왕국이 통치하였는데, 번왕국의 하리 싱(hari Singh, 힌두교)은 파탄(북방족속이라는 의미)인들이 카슈미르 지역으로 침입하는 사건 속에서 위협을 느껴, 절대다수의 이슬람교도가 원하는 파키스탄 귀속이 아닌 1947년 10월 26일 국민투표를 전제로 인도로의 편입을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카슈미르지역의 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반복되는 분쟁

1947년 10월 카슈미르의 이슬람 무장부족 집단이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수도인 스리나가르(Srinagar) 점령을 시도하자, 인도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의 네루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의 장래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고, 유엔에 이 안건이 상정되어 1948년 8월 정전합의가 이뤄지고, 1949년 1월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되었습니다. 이때 카슈미르에 대하여 인도가 카슈미르 지방의 2/3를, 파키스탄이 나머지 1/3을 분할점령하고, 이를 경계하는 통제선(Line of Control)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유엔 결의안은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가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한 곳을 선택할 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전쟁후에도 자국점령 카슈미르가 독립정부임을 주장하였고, 1951년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잠무 카슈미르의 ‘특별 지위’를 규정하는 헌법 370조항을 신설하고, 1957년 이 지역을 인도 연방의 하나로 편입해 버렸습니다.

1964년 네루의 사망후 인도의 정국혼란을 기화로 파키스탄은 인도 점령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을 감행하여 그 해 12월 카슈미르 지역을 공격하였고, 1965년 4월에는 쿠츠(Rann of Kutch)지역에서 양측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1965년 9월 통제선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2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구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시켄트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세력약화와 난민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인도가 개입하여 3차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972년 심라(Simla)협정으로 전쟁이 종료되면서, 지금의 통제선(Line Of Control, LOC)이 확정되었습니다.

더욱이 1980년대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인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JKLF)’이 결성되면서 이 지역의 갈등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군에 대한 테러를 벌이면서 “주민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잠무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을 인도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도는 자치정도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파키스탄은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지만 분리 독립 대신 파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분쟁으로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약 7만명 사망, 17만5천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양측의 공방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인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강조하며 전쟁태세를 강화함으로써 핵전쟁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이 지역은 통제선을 중심으로 양국가에서 포격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 : ‘힘의 정치’ 지향

카슈미르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수력자원의 이용가능성이 높은 지역입니다. 특히 이 지역의 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은 파키스탄의 공업화를 위해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문제에 양보하지 않는 원인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부추긴 것은 과거 냉전시대에 지역패권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즉, 카슈미르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회교권 국가들의 지원과 중국, 소련, 미국 등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한 군사원조로 무력경쟁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핵보유 국가(미국의 연구기관에 의하면 인도는 65기, 파키스탄은 40기 가량의 핵탄두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들 모두 핵확산 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이고, 미사일 개발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에 서로 경쟁적입니다.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2차 대전이후 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친미정권이었던 파키스탄은 198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았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싼 인도-파키스탄의 3차 전쟁은 소련과 인도의 개입 속에서 치뤄진 전쟁이었고, 더욱이 1979년 이란의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국에게 파키스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였고, 미국은 이를 묵인 및 지원하는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탈냉전 이후에도 1997년 파키스탄은 핵무기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 선언하였고, 1998년 지하 핵실험을 하기도 하였으며, 1998년 지대지 미사일 ‘가우리’ 발사 실험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사거리 1천 500∼2천km의 미사일 실험 발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도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비동맹주의입니다. 그러나 1959년 중국과 인도간의 국경분쟁 이후 외교정책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파키스탄-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여 인도-중국의 영토분쟁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영국이 설정한 맥마흔(McMahon) 라인을 불평등 조약으로 간주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9년 티베트 라사에서 발생한 폭동에 대한 인도의 군사적 개입에 대하여 1962년 중국 또한 군사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이 1971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자(이른바 ‘핑퐁외교’), 소련과 일종의 안보조약인 ‘평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친소정책을 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도는 1974년 5월, 지하핵실험을 통해 세계에서 6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 5월 3차례의 지하핵실험에 이어 사정거리 50㎞의 단거리미사일을 실험 발사하였습니다. 1999년에 카슈미르의 카길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포격전 이후 2000년에는 12억 달러의 보병전투장비 증강계획을 결정하는 등 무력경쟁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분쟁의 ‘방치’와 인권의 실종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분쟁 해결책으로 파키스탄은 유엔 결의에 따라 주민들의 투표로 주민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인도는 1972년 3차 전쟁이후 체결된 협정에 따라 쌍무협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 데 반대하고 있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카슈미르 독립을 위한 이른바 ‘제 3의 선택’에는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의 기술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전되면서 결국 강대국들도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카슈미르 분쟁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카슈미르 지역은 인권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곳에서의 무장 군인들의 폭력과 살인, 고문, 인권유린, 건물파괴 등은 법(TADA : Terrorist and Disturbed Areas Act)에 의해 합법화 되어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인도의 공공안전법(Public Safety Act)은 카슈미르지역의 정치적 반대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의 근거가 되고 있고, 1990년에서 2000년까지 경찰이나 무장한 준군사조직에 의해 끌려간 후 실종된 실종자들이 1천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전세계적인 군사주의의 발흥은 인도 사회 내부에서도 영향을 미쳐 구자라트 학살(구자라트 지역에서는 2천여명의 무슬림이 학살당했고, 수 천명의 여성이 강간 당했습니다)을 비롯한 각종 종교·인종 분쟁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정권유지를 위한 내부정치의 이용목적으로, 혹은 지역패권의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분쟁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카슈미르 지역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방지하고 실종된 인권은 회복할 길이 없는 것일까요?

작년 2월 구자라트 학살 당시 민주적인 행동을 주장하고 나선 시민들과 비종교주의 단체들이 구자라트 학살 확대 저지와 인도-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한 100만 대군을 철수케 한 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월 18일, 한국을 포함하여 워싱톤과 전세계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공동행동의 날을 가졌습니다(이날 행사는 미국의 반전네트워크인 평화를 위한 연대(United for Peace)와 국제ANSWER가 제안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아시아평화연대가 조직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키워갈 때 분쟁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이성이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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