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국제분쟁 2003-06-26   2787

<특별기고> 아일랜드 대기근과 기억의 역사

이 풍요의 세상에서 다시는 한사람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 (Never Again should a People Starve in a World of Plenty!)

하버드 대학이 있는 캠브리지시의 중심가에 있는 넓직한 공원, 캠브리지 코먼에 가면 매우 사실적인 동상이 있다. 굶주림과 절망에 가득 찬 엄마가 탈진한 아이를 안은 채 손을 벌리고 있고, 그 앞에 어깨에 굶주린 소녀를 안은 채 그 모자를 향해 손을 뻗치는 남자를 새겨놓은 모습이다. 앙상한 체구와 다 헤어진 넝마를 간신히 걸치고 있는 동상을 통해, 우리는 절망적인 굶주림과 함께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배려가 주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 장면은 그 유명한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따온 것이다. 1845년부터 1850년까지 5년간이나 지속된 기근의 참상은 An Corta Mor, 혹은 The Great Hunger라 불리는 대재앙을 기록했다. 20세기의 비아프라, 소말리아의 참상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기근으로 850여만의 아일랜드인 전체가 엄청난 고통과 상실을 겪어야 했고, 그 중에서 백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 인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견디다 못해 해외이민의 길로 내몰린 인구가 2백만 이상이었다. 그 중 많은 인구가 여기 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북미지역으로 피난처를 찾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선조가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것도 이 때였다. 나라 전체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면서 죽음과 유랑의 길에 내몰렸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전통과 문화의 파괴적 해체가 아울러 진행되었다.

아일랜드 소설가 William Carleton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썼다. “사람들의 얼굴은 앙상하고, 눈빛은 황량하고 쾡하니 열려 있고, 그들의 발걸음은 가냘프게 비틀거리네”. 들판을 다녀보면 한줌의 무리들이 어깨에 관을 메고 지나가는 장면을 쉽게 찾아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도로의 연변에도 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그들의 입술은 풀빛으로 착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기근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영국인들이었다. 미국독립혁명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탐방하는 코스인 보스톤의 Freedom Trail을 따라가다 뜻밖에 바로 그 대기근 장면에 부딪쳤다. 1773년 보스톤 차사건으로 이어지는 선동의 중심지였던 Old South Meeting House 앞의 광장에서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동상을 다시 한번 만났던 것이다. 캠브리지 코먼에서의 그 동상보다 훨씬 전율할 표현을 담아놓았다. 절망에 찬 엄마가 쓰러진 아이를 옆에 하고 앞으로 손을 벌리는 장면은 캠브리지의 것과 별 다를 바 없었다. 달랐던 것은 바로 그 참상을 외면한 채 오만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평온하게 걸어가는 영국인(잉글랜드인)들의 모습이었다. 아일랜드인의 영양실조와 허약한 체구와 선명하게 대비되어, 영국인들의 나들이하는 가족의 평온함과 건강함이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 이 그림은 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이 있을 당시 런던뉴스(London News)에서 브리짓 오도넬(Bridget O’Donnell)의 사연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녀는 대기근으로 온 가족이 병에 걸렸고, 먹을 것이 없어 아이를 잃은 사연을 신문사로 보냈다. (출처: http://www.people.virginia.edu/~eas5e/)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인들은 자신이 통치했던 아일랜드인의 참상을 단순히 못 본체 했던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영국정부는 잉글랜드의 부재지주들에게 지대를 갚도록 하기 위해 그 기근 속에서도 수천 톤의 곡물을 강제로 빼내갔던 것이다. 아일랜드 시인 Lady Jane Wilde는 절규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곡식을 수확하고 이방인들이 우리 땅을 차지하네”라고. 영국인에 대한 사무치는 증오심은 아일랜드인들의 가슴팍에 자손만대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왜 대기근의 참상이 캠브리지와 보스톤에 동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시민들이 이 참상의 소식을 듣고 지원과 배려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보스톤의 동상에 새겨진 동판에 따르면, 1847년 800톤의 식량, 구호품, 의복 등을 선적하여 15일의 항해 끝에 아일랜드의 Cork Harber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메사추세츠 주의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우러나는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그 감사는 당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97년 7월 23일 아일랜드의 여성 대통령 Mary Robinson은 캠브리지 시를 방문하여 캠브리지 코먼에 앞에 말한 그 동상을 헌정했던 것이다. 보스톤의 그 동상도 같은 해 아일랜드 협회와 유지들이 헌정한 것이었다. 800톤이 얼마나 큰 지원이었는지는 잘 짐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절망 한가운데서 받은 지원은 여느 때의 수십 배의 가치에 값하는 것임은 당연하다. 지원받았던 조상들은 그 감사의 기억을 후손으로 후손으로 전했던 것이고, 그것이 15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감사의 동상을 헌정하는 미담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어진 북한의 대재앙을 우리는 안다. 정확하게 알지는 몰라도 그 참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지속적인 북한주민의 굶주림과 아사, 영양실조 현상이 자연재해 탓으로만 볼 수는 없다. 자연재해조차 자연수탈을 일상화했던 사회주의 정권의 탓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를 망쳐놓은 북한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탓할 수 있고, 그 점에서 김일성/김정일에게 가장 엄중한 책임이 물어져야 한다. 식량이 지원되면 식량배급의 통로를 장악한 북한지배층 집단의 대주민 선심공세로 악용될 수 있음도 사실이다. 심지어 그 식량이 최우선적으로 배급될 북한의 군인들의 사기도 올려줄 것이고, 그로 인해 남북한의 군사적 역학관계에 약간의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주민이든 군인이든 전투현장이 아닌 비 전투상황에서는 한 형제와 자매가 아닌가. 이들의 사무치는 굶주림과 아사의 기억이 쌓이고 쌓이면, 화해와 통일에의 길을 막는 거대한 정서적 장벽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바로 한 형제라 하면서, 한 민족이라 하면서 자신은 풍요하고 사치한 생활을 향유하면서도 다른 형제와 동포의 처절한 재앙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상대방에게 사무치는 증오감으로 자손만대로 이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캠브리지 코먼의 동상을 세운 이들은 자신들의 교훈과 염원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 풍요의 세상에서 다시는 한사람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

Never Again should a People Starve in a World of Plenty!

* 이 글은 참여연대 ‘임원뉴스레터’ 20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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