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89] 원세훈·김용판이 보여준 언어와 정치의 타락

 

[시민정치시평 189] 

 

원세훈·김용판이 보여준 언어와 정치의 타락

: 원세훈·김용판, 민주주의 표준어법을 위반하다

 

좌세준 변호사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말이다. 지난 16일 국회 청문회에서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선서를 거부한 두 사람의 ‘증인’을 보며 나는 괴벨스의 위 말을 떠올린다. ‘히틀러 신화’ 창조를 위해 자국 국민들을 ‘심리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괴벨스. 김용판과 원세훈은 스스로를 ‘승리한 자’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겠다”는 선서를 그들은 거부했다.

 

이들의 선서 거부가 정당한 권리행사였는지에 대한 법적인 논쟁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다만, 이들과 동일한 사유로 국정감사 과정에서 선서 거부가 발생했던 사례를 언급해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듯하다.

 

1966년에 있었던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사건’을 잘 아실 것이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하여 1966년 10월 19일에 열린 국회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당시 수감 중이던 이창희, 이일섭 두 사람이 ‘재판을 앞둔 피고인’이라는 이유로 선서를 거부했다. 이 사건이 원세훈, 김용판의 경우와 다른 것은 이창희, 이일섭의 선서 거부에 대해 당시 국회 특위에서는 고발장을 작성하는 등의 대응을 하였다는 점이다. 결국 두 사람이 번의하여 선서를 하고 증언을 했다.

 

1966년 당시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규정은 현재의 법률과 비교할 때 조문 위치만 다를 뿐 사실상 완전히 동일하다. 당시 국회에서는 여당 의원들마저도 “선서를 받고 증언을 청취하자”는 의견을 냈고(동아일보, 1966년 10월 20일, 1면), 결국은 두 사람의 선서를 받은 다음 증언을 청취했다. 물론 47년 전과 현재를 비교할 때 정치 상황에 차이가 있고, ‘기본권’이나 ‘인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47년의 세월 동안 대한민국 의회 정치의 시계가 거꾸로 간 것이 아니라면, 원세훈, 김용판의 선서 거부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린 국정조사 위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력’에 대하여 준엄한 성찰의 칼날을 들이대어야 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16일 청문회에서 나왔던 ‘말’과 ‘언어’들에 관한 것이다. 증인으로 출석한 원세훈, 김용판이 사용한 말과 단어들, 조사위원인 국회의원들이 질문이나 의사진행발언 과정에서 사용한 말과 단어 혹은 그 어법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정치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정치학이나 심리학, 언어학의 정밀한 분석도구를 동원한 것이 아닌 인상비평 수준의 것임을 밝혀둔다.

 

김용판, 원세훈이 바라보는 ‘국정원 사건’

 

김용판 증인은 16일 준비해온 ‘선서거부소명서’의 맨 앞부분에서 “증인 김용판은 소위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소환되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나의 언어 감각이 유별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용판 증인이 ‘소명서’에서 사용한(그가 직접 ‘소명서’를 작성한 것인지, 아니면 변호인이 작성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소위’라는 단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소위(所謂)’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바’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위’라는 말이 단순히 상투적 용어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그 문맥상의 의미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세상에서는 그렇게들 말하지만 나(화자)는 인정하지 못하는’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김용판 증인이 국회에서 발표할 소명서를 작성하면서 ‘소위’라는 용어를 상투적으로 쓸 리는 만무하다.

 

결국 김용판 증인은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자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소위’라는 용어를 통해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용판 증인은 이후 증언 과정에서도 “공소장을 보면서 실체적 진실과 다르게 사람이 해석되고 왜곡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 무섭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김용판 증인은 국회에 출석하여 ‘선서거부소명서’를 낭독하는 순간부터 증언이 끝날 때까지 위와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원세훈 증인은 “제가 선서하지 못함을 양해해주기 바란다”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선서 거부의 사유를 소명하고 있으나, 이후 증언에서는 이번 사건이 ‘대북 심리전’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반복하여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현재 우리나라의 인터넷을 해방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데 적극 대응해야 한다”라는 증언이 대표적이다.

 

원세훈 증인의 이와 같은 ‘심리전’ 주장은 이번 사건에 대하여 국가정보원이 처음부터 내세우고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대량학살, 중대한 인권침해 등의 국가범죄에서 그와 같은 악행의 동기를 ‘조국과 민족애’에서 찾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다.(이재승, 《국가범죄》, 99쪽) 원세훈 증인의 ‘심리전’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고전적인 부인 기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실 ‘심리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적’을 특정하기에 적의 반대편에 있는 ‘나’는 항상 ‘선(善)’으로 정의된다.”(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 25쪽) 문제는 국정원 직원이 대선 국면에서 댓글을 단 공간이 ‘적국’의 영역이 아닌 대한민국 인터넷 공간이라는 것인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 동원되는 단어가 바로 ‘해방구’와 ‘종북세력’이다. 원세훈식 ‘심리전’이 정당화되려면 ‘우리나라의 인터넷’은 북한의 ‘해방구’로 설정되어야만 하고, ‘적’의 개념은 소위(의식적 표현임을 밝혀둔다) ‘국내 종북세력’에게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본질 흐리기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다시 괴벨스의 말이다. 원세훈과 김용판 두 증인은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하면서도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과 부인,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트러트리는 어법을 사용했다.

 

원세훈 증인의 경우 “심리전단 확대를 청와대에 보고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인사안을 청와대 인사 쪽에 보내 결재를 한 건 맞지만, (심리전단이) 일일이 무슨 일을 한다고 보고한 건 아니다”라고 답변하거나, 작년 12월 13일 박근혜 후보 캠프 상황실장이었던 “권영세 실장과 전화로 상의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개인적으로 가까우니까 상의를 한 거다. 저도 물어본 것”이라고 답변한 것이 그 예이다.

 

김용판 전 청장 또한 작년 12월 16일 문재인·박근혜 후보 사이의 방송 토론 직후에 이루어진 보도자료 발표에 대해 “국민들이 이례적으로 생각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일부 언론이 특종 보도를 한다는 정황이 있어 급하게 공개한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논점 회피로 일관한 새누리당 위원들의 질문과 발언

 

사실 정치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말의 특성을 일찌감치 예리하게 간파한 것은 괴벨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었다. 당대의 어떤 지식인보다 전체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오웰은《정치와 영어》(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라는 에세이에서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270쪽)

 

지난 16일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은 검찰의 공소장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여주었다. 이에 더하여 새누리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정권 홍보 댓글을 달지 않았느냐”, “영국은 정보기관 MI6 기관장이 누군지 국민들도 모른다. 비밀이 생명인 국정원이 압수수색을 당했고, 종북세력들이 직원 집 앞에서 진을 치고 24시간 카메라를 찍었다”, “제가 볼 때는 원세훈 증인, 김용판 증인 다 희생양이다”라는 식의 논점 회피성 질문과 발언으로 일관했다. 이들이 사용한 ‘정치적 언어’들, ‘종북세력’, ‘희생양’이라는 단어들은 오웰식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거짓을 사실처럼 만들고, 살인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순전히 헛소리를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한 마디로 해도 너무 했다.

 

진정한 주권자들의 청문회를 위하여

 

지난 16일에 있었던 국회 청문회는 정치의 타락이 언어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청문회를 통해 진실을 보고자 했던 국민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파되는 증인들의 선서 거부, 책임 회피성 발언,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와 함께 사용된 교묘한 어법, 일부 국회의원들의 조악한 질문과 발언에서 우리 정치의 타락을 확인했다.

 

17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있었던 촛불집회에서는 원세훈, 김용판 증인의 증언을 “뒤집어 말하면”, “거꾸로 말하면” 어떤 뜻이 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과 이에 답하는 청중들의 대답이 계속 이어졌다. 청중들은 민주주의의 표준어법으로 답변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언어는 명료하고 간결했다. 민주주의의 언어는 명료하고 간결해야 한다. 정치가 거짓과 회피의 언어로 위장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국회 청문회는 금주 중 마무리된다고 한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타락한 우리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한 주권자들의 청문회, 민주주의의 표준어법으로 진행될 진정한 주권자들의 청문회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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