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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행사
  • 2020.10.13
  • 653

온라인 좌담 포퓰리즘 시대의 사회운동

[온라인 좌담] 포퓰리즘 시대의 사회운동

포퓰리즘 시대의 사회운동을 토론합니다. 민주적 사회운동은 포퓰리즘적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보통 사람들'이 중심에 선 운동은 포퓰리즘 운동과 어떻게 다른지, 정치에서 소외된 이들을 사회운동은 어떻게 호명하고, 정치의 장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지 등 여러 사회운동 쟁점을 포퓰리즘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봅니다

 

서구민주주의의 근간이었던 자유민주주의적 합의와 제도가 심화되는 불평등, 지구화 대응에 실패했고 엘리트중심의 기술관료/자본가 거버넌스가 정치를 대체하고 있다는 진단처럼 많은 이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포퓰리즘 현상은 그 기반위에서 양가적인 형태를 띄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와 기존에 구축해온 성과를 부정하는 형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을 불러올 생동하는 열망이기도 합니다. 대중 또한,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듯 존재처럼 관리되어야할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형해화된 제도와 민주주의적 합의/비전을 만들 주체이기도 합니다. 

 

포퓰리즘 현상/운동이 마냥 배척해야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정치를 복원하고 운동을 민주화할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좌파 포퓰리즘의 기획처럼 포퓰리즘 시대에 다양한 가치를 잇는 운동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가사슬을 형성하고 넓혀갈 인민의 주체화는 어떻게 가능한지 등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패널

진태원(사회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김주호(경상대 사회학과)

서영표(제주대 사회학과)

이지영(이화여대 철학과)

지주형(경남대 사회학과)

한상원(충북대 철학과)

 

일시

10월 23일(금) 오후 4시

 

문의

ips@pspd.org / 02-6712-5248
 

줌 웨비나 진행

 


[발언 요지]

 

김주호 

포퓰리즘의 시대는 곧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이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은 아니고 반대로 만연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포퓰리즘의 부상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아닌 결과로써 포퓰리즘에 주목해야 한다. 

 

이 위기는 대표의 위기이며,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민주주의 정치 바깥으로 밀려나는 걸 말한다. 사실 민주주의에는 소수의 대표하는 자가 다수의 대표되는 자들로부터 괴리될 수 있는 위험이 대생적으로 존재한다. 기존 정치에서 대변되지 않는 많은 시민들이 있다. 예컨대 스페인 포데모스를 등장케한 ‘분노한 사람들’ 운동의 핵심 구호는 “아무도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였다. 즉, 포퓰리즘의 부상은 이렇게 배제된 이들,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을 다시 안으로 데려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퓰리즘이 마냥 문제라고 말할 수 없는건 바로 이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포퓰리즘을 말해야한다면, 이는 현 시점의 사회운동이 민주주의 정치 바깥에 있는 이들을 향해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정치에서 주변화된 이들이 존재한다는 신호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포퓰리즘에는 민주적 면모와 반민주적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민의 정치를 내세우지만, 권위주의적 실행으로 반민주적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운동은 엘리트 중심의 정치를 비판하는 포퓰리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되 그것과 거리를 둬야한다. 즉, ‘하나의 인민(국민)’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하지만 연대하는 시민’을 지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예컨대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저학력 저소득 남성 노동자와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닌 고소득의 페미니스트간의 연대를 상상해보라. 사회운동은 다원적인 것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서로 마주칠 수 있게하는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영표

포퓰리즘은 대중의 정서에 직접 호소한다. 기존 정치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사회적 불만과 좌절에 호소한다. 극우포퓰리즘은 이러한 불만과 좌절 뒤에 깔려 있는 실존적인 공포에 기댄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내부의 적’을 찾아내어 불만-좌절-공포를 혐오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만을 대변할 대안적 정치세력이 부재하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대중의 불만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제시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은 국지적인 투쟁에서 일시적 연대를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러한 투쟁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적 차원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근거도 제시해야 한다. 사회적 투쟁은 실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한다. 이제 사회주의적 대항헤게모니전략은 대중의 체험, 정서와 공감할 수 있는 ‘포퓰리즘적 계기’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구조분석의 계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에서만 대안이 될 수 있다.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운동의 일부라고 자임하는 대부분의 정치세력은 이렇게 낡은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주장하고 대중을 설득과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대중의 불만과 좌절이 타자를 향한 혐오로 표출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민주적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대항헤게모니는 구조적 분석이라는 거대담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은 몸의 취약성이 위협받고 무의식 속에 쌓이는 불안과 공포가 파괴적 힘으로 발산되는 사람들의 체험의 세계, 즉 일상의 미시적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포퓰리즘에 거리를 두면서 ‘포퓰리즘적 계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주형

포퓰리즘이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인민의 이름으로 (또는 인민이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매개로) 기득권과 적대하는 요구들의 총체이자 운동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권력/기득권과 약자/인민/민중의 구별이라 하겠다. 포퓰리즘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인민의 직접적 표현과 참여의지를 활성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점, 기득권과 구별되는 다수의 충족되지 않은 요구에 대한 (즉각적인) 충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답답한 현실을 깨뜨리는 급진적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의 기초인 '인민', 즉 등가사슬의 범위와 경계는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 핵심 세력이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력을 매수해서 인민=등가사슬을 깨어버리고 운동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의 범위, 즉 등가사슬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데, 등가사슬이 계속 확장되면 될 수록 전략적 방향성이나 초점이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범위가 가변적인 만큼 포퓰리즘의 주체, 즉 '인민'은 모호하다. '인민'과 그 지도자는 '비어있는 기표'로서 이것도 의미하고 저것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인민'을 대표할 수 있으나, 바로 그 '인민'에 중심 없기 때문에 그는 '인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표하게 된다. 이로서 포퓰리즘은 보나파르티즘으로 귀결된다. 아니면 반대로 이것, 저것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요구에 둘러싸인 그는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이지영 

2016년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태, 미투운동을 겪으며 여성 인민 대중들을 기존 남성 지배 질서에 대항하는 주체로서 호명했다. 이들은 성, 가정, 노동, 교육을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혐오의 대상이 되는 우리 여성’으로 자신들을 결집시켰고 이런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남성 혹은 남성 중심 구조를 ‘그들’의 자리에 놓았다. 분노와 희망의 정서로 묶이고 우리와 그들로 적대적 전선을 구성하는 가운데 정치 세력화되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즘 운동을 포퓰리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 메갈리아 사태 이후 결집화되고 새롭게 등장한 ‘K-래디컬 페미니즘’(워마드로 대표된다)은 여성의 성 정체성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자연 결정된 순수 여성을 이야기하며 그 외의 집단을 적으로 간주한다. 2020년 숙명여대의 트랜스 젠더 여성 입학 저지는 이들의 대중 선동 정치가 대학의 보수성과 만나면서 관철된 예 중 하나다. 반면 1990년 이후 푸코, 크리스테바, 버틀러 등의 논의를 수용하여 이론을 구축하고 다양한 정치 운동을 벌여온 영페미니즘 그룹이 있다. 이들은 성정치의 영역을 넘어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까지 확장되고 있고 특정 정체성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를 실천해왔다. 예멘 남성들이 제주도로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예멘인들이 이슬람 출신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당하고 배제되어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며 연대를 표명했다. 말하자면 현재 한국 페미니즘 대중 운동의 모습엔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의 양태들과 가능성이 동시에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포퓰리즘의 지도자 문제와 관련된다. 특히나 2010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 운동은 특정 스타 지도자의 등장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인터넷을 주요 소통 매체로 활용하며 성장해 왔다. 인터넷을 적극 활용한 최초의 가시적 정치 운동 세력화이자, 일종의 인터넷 코뮌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움직여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지도자 숭배를 둘러싼 포퓰리즘에 대한 흔한 한 가지 우려에 대한 반례가 될 것이며 미래의 정치 운동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상원

2018년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와 2019년 아도르노의 『새로운 우익 급진주의의 요소들』이 연달아 출간되면서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도르노의 책은 나치즘이 패망한 이후 최초로 1966년 극우정당인 독일국민당이 주의회를 집권하는 일이 벌어진 직후 그의 연설을 엮은 책이다. 그 둘 사이에 접점 속에서 사고 해보고자 한다. 

 

우선 무페의 주장에서 사회운동과 관련해 여러 가지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주체로서의 인민’인데 노동계급 환원론과 당사자주의를 피할 수 있다. 여기서 인민은 주어진 집합이 아닌 구성되는 것이다. 좌파의 역할 또한, 인민을 구성하는 것이다. 둘째로, 정서의 정치성인데 이것은 정치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정치적 주체로서 인민의 구성은 언제나 감정과 정서의 물음을 야기한다. 셋째는 우익 포퓰리즘이 곧 파시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페는 포퓰리즘을 병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과두제에 대항하는 인민의 정치적 표현으로 보고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도르노는 반지성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는 일정한 수준의 ‘시민적 지성’이 갖춰진 상태에서만 작동할 수 있으며 우익운동은 ‘사회적 파국의 감정’ 즉, 기술발전과 인간의 잉여화 등 대중의 불안정을 이용(프로파간다)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치닫게 한다는 지적이다. 

 

무페가 인민의 담론적 호명을 통한 포퓰리즘 정치의 구성방식이 갖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조한다면, 아도르노는 그러한 구성방식이 왜곡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포퓰리즘 운동이 낳을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반지성주의적 효과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둘을 동시에 고찰할 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설정을 위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에서는 지난 약 2년간 '포퓰리즘'을 연구하고 토론해왔습니다.     

 

[시민과세계] 34호(2019년 상반기호)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시민과세계] 35호(2019년 하반기호) [포퓰리즘과 '우리']

[시민과세계] 36호(2020년 상반기호) [포퓰리즘 현상이 시민운동에 던지는 시사점을 들여다보다]

[학술행사] 논문발표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인가?]

[학술행사] 포럼 [포퓰리즘 시대와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인가 전환인가?]

[학술행사] 좌담 [포퓰리즘 시대의 도래?: 불평등과 한국적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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