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123] “법에도, 악마는 각론에 숨어있다”

[시민정치시평 123]

“법에도, 악마는 각론에 숨어있다”
: 현대차 고공농성에 부쳐

한상희 건국대 교수·참여연대 운영위원장

대한민국의 법은 철탑 위에서만 휘날리는가? 울산의 황량한 벌판, 현대자동차가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곳에 법과 정의를 외치는 두 사람이 150m 상공의 철탑에서 벌써 50일째 목숨을 건 농성을 하고 있다. 자본, 특히 대기업에는 무한히 취약하여 계급사법이라 비판받는 법원조차도 거듭하여 인정해 준 노동자의 권리이자 인간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이 차가운 세월을 피눈물로 지새운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는 순간 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무자비한 자본의 폭력과 약탈적인 대기업의 기만과 오만한 사주의 오기뿐이다. 불법과 편법이 횡행하고 법치와 정의가 유린되는 세상은 이들의 외침을 하냥 흘려 넘기고 있을 따름이다.

사건은 2004년 노동부가 현대자동차에 대해 불법파견의 위법을 인정하면서부터 본격화된다. 현행법은 회사의 착취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파견근로의 형식으로 노동자를 간접고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체가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공정에 파견근로자를 투입하는 것은 금지된다. 하지만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현대자동차에게는 이런 금지조항 정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파견받아 작업장에 투입하고도 ‘도급’이라는 형식을 내세우며 법망을 피해나가고자 하였다.

대법원이 이런 행태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법대로 할 것을 명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조치이다. 대법원은 2010년과 올해 두 차례에 걸쳐, 회사가 근로자에 대하여 작업배치나 업무지시권을 가지며 그 작업내용에 대해 평가권까지 행사한다면 의당 그것은 사내하청이 아니라 명백한 ‘파견’이며 따라서 불법하다고 판단하였다. 아울러 이 파견근로자들이 2년 이상 근무하였기 때문에 2년 기간 만료 다음날부터 “현대자동차 의해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 된다”는 판결까지 내어 놓았다. 최근의 노동사건으로는 보기 드물게 법조문에 충실하게 내려진 이 대법원의 판결들은, 당사자들과 함께 약 7000명에 달하는 현대차 비정규노동자들, 그리고 컨베이어벨트 자동흐름방식으로 일하는 모든 완성차 및 자동차부품 제조회사에 근무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에게 엄중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라는 거대자본은 이런 법의 명령조차도 가볍게 넘어선다. 대법원의 판결과 그에 의거하여 노동위원회가 내린 원직복직과 임금지급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임을 사실상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그 이행을 회피하며 노동자들을 철탑위로 혹은 맨 땅의 살얼음 위로 내몰고 있다. 물론 현대차가 내어 놓는 핑계는 무한이 이어진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불법파견여부는 사안별로 달라지는 만큼 1명의 업무형태에 관련한 대법원판결만으로는 모든 사내하도급의 처리기준이 될 수 없으며, 나아가 “사내하청”은 산업계 전반에 미치는 사항이기에 보다 신중한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는 등등은 그 일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망을 빠져나가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의 원초적 욕구에만 충실하겠다는 탐욕이 깔려 있다.

‘악마는 각론에 숨어있다’는 말은, 돈에 법과 정의를 파는 법률상인들에게는 불변의 진리로 인식된다. 어떠한 법률이든, 합의든, 심지어 판결까지도 세세하고 미미한 차이들을 들먹이며 그 내용을 왜곡하고 변형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방해공작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객을 위하여 혹은 그 고객이 제공하는 금전을 위하여 법을 우롱한다. 어떠한 강도 같은 물이 두 번 흐르는 법은 없으며, 어떤 사건도 완전히 동일한 것은 없다는 동일률의 논리학은 같은 사건이라도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며 따라서 다른 법이 적용되고 다른 판결을 만들 수 있다는 힘의 논리를 이루어낸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며 이것에 적용된 법은 저것에 적용될 수 없기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패소하더라도 저것을 통해 승소할 수도 있다는 힘의 논리가 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과 권력을 갖지 못한 약자들은, 정의로운 법의 세계에서조차 부정의의 폭력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법원의 엄연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고공농성으로까지 몰고 가버린 현대차의 행태는 정확하게 이런 법왜곡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대차가 자행한 소위 ‘사내하청’에 대한 우리 법과 대법원, 그리고 노동위원회의 입장은 누가 보아야 명백하다. 그것은 불법파견이며 따라서 2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에 대하여는 정규직으로 임용하여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일 수가 없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런 저런 각론을 끌어들이며 악마를 호출한다. 법을 이용하여 법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의 판결이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또 다른 사건이 또 제기되어 있음은 이런 법왜곡, 법동원의 편법 때문이다.

실제 그들에게 그 각론이 진실하거나 진정한가의 여부는 관심 대상 밖에 놓여 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혹은 말이 되건 아니건, 심지어 그것이 적법하건 불법·위법이건 관계없이 그 ‘들이댐’으로 인해 법의 엄중한 명령을 피해가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그 집행을 늦출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들은 충분한 이익을 얻는다. 명령의 이행을 늦춘다고 해서 자신들이 잃는 것은 거의 없는 반면, 상대편에서 농성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에게는 생계의 부담으로까지 작용하는 강력한 충격이 되기에 그들은 쉽사리 전술적으로 우월한 진지를 확보할 수 있다. 그 싸움은 상대방의 생존과 생계를 담보로 한, 꽃놀이패의 방어전에 다름이 아니다. 이런 지연전술이 엄청난 폭력으로 가격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이윤을 향한 무한욕망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해 버리고 마는 그 잔혹한 폭력의 현장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법은 이렇게 시나브로 무너져 버린다. ‘법의 무지’는 면책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법으로부터 소외된 약자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중한 처벌이 가해지면서도, ‘법의 무시’로 일관하는 자에 대하여는 한 없이 관대한, 억장 무너지는 현실이 여기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힘없고 돈없는 자들이 그 억울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하여 힘 합쳐 투쟁에 나서고 저항하며 타협하여 법률을 만들어내더라도, 혹은 그러한 법률에 기해 몇 년의 법정 투쟁을 거쳐 승소판결을 받아 내더라도 저 눈 가려진 정의의 여신은 결코 이 약자들의 손을 들어줄 줄을 모른다. 법의 이름으로, 법의 절차를 통해, 불법은 폭력이 되어 횡행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법질서가 취약해서 향후 10년간 1%에 달하는 경제성장율의 손실을 보게 된다고 분석하였던 한 경제연구소의 분석은 촛불시위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자본권력과 그를 비호하는 정치권력(나아가 사법권력)에 의해 유린되는 법질서의 폐해를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과 정부수립 이래 한 번도 제대로 법의 규율을 받아보지 못한 대기업, 대자본들이 왜곡해 버린 우리의 법질서는 이제 그것이 커다란 부담이 되어 우리 경제까지 누르게 된다는 암울한 전망에 다름 아닌 것이다.

법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이 무너지고 나아가 삶의 물적 토대가 되는 경제까지 훼손되는 이 참담한 현실의 한 가운데서 현대차가 저지르는 법왜곡의 폭력과 그에 저항하는 노동자의 철탑 고공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평양에서 강주룡이 임금인하에 항의하면서 을밀대 누각에서 벌인 고공행진을 효시로 1990년의 현대중공업에서의 골리앗 크레인 점거투쟁, 그리고 희망버스로 기록되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의 고공농성, 그리고 현대차의 이 철탑 고공농성이 하나의 역사로 관철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의 여신이 눈 감아 버린 ‘불법의 정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법, 사람의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엄한 법의 명령을 위배하면서 이윤의 욕망에 종속되어 버린 현대차의 사주에 대한 형사고발 등 그 응징을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들은 현재 진행중이며, 앞으로도 가열차게 확대될 것이다. 그간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며 법적 정의를 왜곡하는 행태는 그 자체 우리 사회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자본에 친화적인 사법체계라 하더라도 지엄한 법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의 법조차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자본의 존재와 그 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법체계마저도 소멸해 버려 장기적으로는 자본에 불리한 상태를 야기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법치의 정반대편에서 적나라한 폭력을 휘두르는 자본의 횡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사회의 굳건한 결의이다. 희망버스가 노동계를 넘어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이루어 정의를 실천해 내었듯이, 여의도면적의 5배에 이르는 현대차 부지의 한 켠에 왜소하게 서 있는 철탑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 우리의 법으로 세상에 울려 퍼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자본의 폭력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각성과 연대이다.

자본은 언제나 위기를 야기한다. 신자유주의에서의 자본은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 위기를 통해 대중들이 공포에 떨게 만들며 그 과정에서 자본은 보편적인 법의 적용을 부정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확보한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의 경제위기들이 자본의 총체적 위기국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피해를 감내해야 했던 것은 일반 서민의 삶이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현대차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혹은 철탑 위 고공농성에 대하여 제기하는 이런 저런 각론의 악마 역시 이런 식의 공포를 소재로 한다. 7000명 전원의 복직을 주장하다가 3000명의 복직조차도 날려버리지 않을까, 비정규직이라도 연봉이 적지 않으니 결코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 않는가, 농성 때문에 특별교섭의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혹은 이 사건이 선례가 되면 모든 사내하청에까지 확산되어 경제 자체가 흔들리지나 않을까 등등 밑도 끝도 없는 우려와 걱정과 이해타산은 그대로 모든 이에게 공포로 다가간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대중이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말처럼 대중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이다. 그것은 위기를 만들고 공포를 야기하는 자에게 대중들이 부과하는 역의 공포이다. 자본이 대중들을 윽박지르며 희생을 강요할 때, 그 공포를 희망으로 바꾸며 자본의 폭력을 무장해제할 정도로 강력하게 타격하는 대중들의 함성으로부터 자본이 느끼게 되는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공포는 대중들의 각성과 연대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자본에 의해 벌거벗긴 채 버림받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를 부인할 때, 그리고 그 지점에서 저항과 연대를 이루어낼 때에야 비로소 저 철탑 위에서 휘날리는 법의 깃발은 우리 모두의 깃발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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