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07-04-04   1357

[판결비평-판결읽기1] “빼앗긴 광장”

지난 3월 15일 서울행정법원 제12부(재판장 정종관 판사, 정승규 판사, 홍성욱 판사)는,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가 관할경찰서에 신고한 ‘한미 FTA저지’를 위한 청와대 인근 경복궁 근처 인도에서의 행진 등 집회 계획에 대해 경찰이 교통불편이 우려된다며 개최를 금지한 것은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 아니며 정당한 것이라고 판결(사건번호 2006구합24787)하였다.

지난 해 6월 범국본은 정부의 한미FTA협상 추진을 반대하기 위해 청와대 주변 경복궁 인근에서 2000명 정도가 참가하는 행사를 기획하고 관할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였다. 그런데 관할 경찰서장은 집회장소가 주요도로이고 미리 배포된 유인물에 인간띠잇기를 개최한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는 등 공공질서를 해할 우려가 있다며 금지 처분하였다. 이에 범국본은 헌법상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요건은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적용ㆍ해석되어야 하는데, 교통불편이 야기될 우려만으로 집회를 금지한 것은 경찰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경찰 측 주장대로 처음 집회 신고한 2000명보다 많은 수만 명이 참가할 것이 예상되고 “만일 수만명의 집회참가자가……일시에 집회를 개최한다면…인도뿐 아니라 차도까지…점거되거나”, “그 일대의 인도 통행이 불가능”하여 일대에 “심각한 교통불편을 줄 우려가” 있을 것이 명백하므로 금지처분은 정당하다며 경찰 측 손을 들어 주었다.

이번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기본권 보호에 충실해야 할 법원이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면서 서로 충돌되는 권리들의 침해정도를 충분히 살펴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떠한 대체수단도 강구하지 않은 경찰 측 주장만을 받아들여 너무 손쉽게 ‘심각한 교통불편 야기’를 인정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참여연대는 이 같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함께 토론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 판결을 비평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비평칼럼은 한상희(건국대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장유식(변호사, 법무법인 동서남북)이 작성하였다(편집자 주).

“모든 주의와 주장이 이 땅 위에서 자유로이 활동하게 하라”

– 밀턴, 「아레오파지티카」-

인류 문명이 이룬 최대의 성과-집회ㆍ결사의 자유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는 인류 문명이 이룬 최대의 성과-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음,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실천되는 현실의 수단임을, 그래서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는 인식지표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자유는 자유롭게 말하고 비판하며 이를 통해 민주질서를 구축하며 그 발언자·집회자들이 그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시민권적 권리(citizenship)이자 동시에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게 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건이 된다.

다만,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정치적 의미는 자뭇 다르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근대초기 구체제에 대한 부르조아의 권리로서 의미를 가지며 자본주의식의 자유와 창의, 혹은 이성적 의지의 자유로운 발현이라는 점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집회·결사의 자유는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자본주의적, 부르조아적 지배체제에 대한 무산대중의 항변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합법화과정 또는 미국의 경우 이에 더하여 흑인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조직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집회의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 기본권의 실질적인 내용이 충당되는 것이다.

집회와 시위는 다중의 집합을 예상하는 만큼 언제나 일정한 물리력의 행사를 전제로 하는 것

이 점에서 집회·시위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규율은 특단의 고려를 요한다. 통상 헌법은 이 집회·시위의 자유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고 특별히 보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집회와 시위는 다중의 집합을 예상하는 만큼 언제나 일정한 물리력의 행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사회질서나 타인의 권리 등과 대립될 위험은 항존한다. 이에 질서유지를 위하여 경찰이 개입할 필요는 항상 존재한다.

이런 충돌에 대하여 우리 헌법이 보이는 태도는 명확하다. 우리 헌법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중대한) 위험이 존재하여야 하며, 사전검열이나 허가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등 언제나 집회·시위의 자유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헌법원칙에도 불구하고 현행 집시법은 집회·시위를 하나의 범죄에 준하여 취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경찰청장은 집회를 금지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권을 가지며, 집회참가자는 자칫하면 범죄자로 전락하여 형벌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양상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라는 하나의 뚜렷한 인권이 엉뚱하게도 교통질서나 업무효율성을 침해하는 필요악으로 취급당하면서 집회참가자는 인권을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 단순한 행정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셈이다.

반헙법적인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집회신고에 대하여 경찰청이 교통지체의 우려를 이유로 금지통고한 처분을 합법이라고 판단한 이번의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이 점에서 반헌법적이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가지는 헌법적 의미는 곱씹지도 않은 채 거의 기계적으로 경찰의 금지통고처분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 이 사건의 경우 논점은 세 가지이다. 대중집회로 인한 교통지체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집회를 금지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 그 첫째라면, 집시법 제12조 상의 ‘주요도로’에 인도가 포함되는가의 문제와 법익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다는 문제는 그 둘째와 셋째에 해당한다.

첫째, 이 사건의 적용법률이었던 집시법 제12조는 ①관할 경찰서장은 주요도로에서의 교통소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그리고 ②질서유지인이 있는 때에는 당해 도로와 주변도로에 ‘심각한 교통불편’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집회·시위를 금지하거나 조건부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사건 경찰청장의 집회금지통고는 대중집회의 성격상 집회지인 광화문 주변의 교통에 심각한 불편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②의 처분권은 2004년 집시법 개정당시 삽입된 개악조항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경찰청장이 그러한 처분권을 행사할 때 고려하여야 할 사항들에 대하여 법원이 제대로 통제하였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법률의 기계적 적용에 그친 법원

대체로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제한할 때에는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위험이 명백하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심각한 교통불편’이 발생할 것이라는 그 어떠한 명백한 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도대체 그 집회로 인하여 어떠한 교통불편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발생하게 되는지, 더 나아가 이러한 교통불편을 예방하거나 감소시키기 위한 대안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아무런 입증도, 법원의 판단도 없는 것이다.

둘째, 집시법 제12조상의 주요도로에 인도도 포함된다는 판단은 헌법의 정신은 아랑곳 않고 오로지 도로교통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법원의 편향된 시선에 의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역사적으로 도로란 단순히 통행을 위한 물리적 공간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민들이 집 밖을 나와 서로 담소하며 교류하고 의사를 공유하는 사회적 공간이자 교환이 일어나는 경제적 공간이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세를 형성하고 권력을 도모하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하였다.

교통정체의 문제는 시위라고 하는 민주적 의견표현행위에 수반되는 필요비용

“정치가 살아 있는 국가에서 거리는 차도와 인도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광장이자 포럼이자 카니발의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인도는 단순히 차량의 통행만을 위한 차도와는 다른 헌법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공적 포럼으로서 가장 중요한 헌법정치의 공간이자 인권실현의 공간이 된다. 그럼에도 법원은 이를 차도와 동급에 둠으로써 인간과 차량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들은 차량에 빼앗기고 남은 그 길거리조차 “인도”라는 이름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셋째, 법원은 대중집회의 헌법적 의미를 간과하였다. 재판과정에서도 거론되었듯이 3만이나 되는 대중의 집회가 예정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진정 법원이 고려하여야 할 사항은 그 군중들이 교통을 차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니라, 그토록 많은 군중들이 모일 정도로 강력한 “주의와 주장”을 어떻게 정치적 의사로 재구성해내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의제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이 땅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지라는 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군중이 모이기 때문에 교통불편이 걱정스럽다는 식의 사고가 아니라 이 정도 군중이 모여서 주장할 정도라면 정치권은 물론 모든 국민들은 당연히 교통불편은 감내하고서라도 경청하여야 한다는 식의 사고가 보다 헌법합치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 집회ㆍ시위 억압수단이었던 집시법

실제 과거 권위주의체제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경험하였듯이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길거리에 나선 군중들의 함성이 아니라 그것을 무서워하도록 강요한 지배권력의 독단이었다. 그리고 1962년 제정된 집시법은 이런 독단에 따라 집회·시위를 기본권이 아니라 사회질서의 교란행위 내지는 사회안전의 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왔다.

즉, 그 법은 “집회 및 시위를 보호”하는 것보다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함”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왔고 이를 빌미로 집회·시위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용되어 왔다. 그래서 신고제가 경찰서장의 재량에 따라 손쉽게 금지통고될 수 있는 실질적인 허가제로 운영되고, 위반자에게는 과태료가 아니라 형사전과자라는 낙인을 찍어 버리는 실질적인 집회금지법으로 작동해 왔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권위주의의 잔재가 민주화를 자랑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하다는 점이다. 이 민주화의 성과들이 시장적 자유주의와 혼착되면서 정작 중요한 가치로서 보호하여야 할 인권목록의 일부가 재산권적 권리에 종속되는 하위가치로 오인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집시법의 태도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의 대표적인 예를 이룬다.

경제중심적 사고가 민주주의 가치에 우선하는가?

과거 권위주의와 행정편의주의의 행태로부터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경찰청이 집회·시위를 여전히 필요악 정도로 곡해함으로써 집시법의 전체 구조가 위헌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최근의 경제중심적 사고틀은 물질적 생산성의 논리를 집회·시위로 표출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우선하는, 변태적 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원래 교통정체의 문제는 시위라고 하는 민주적 의견표현행위에 수반되는 필요비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시법은 이를 전도시켜 교통의 소통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희생시키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선택하며 이를 주민들에게 폭력집회·불법집회라는 담론으로써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현행 집시법의 문제가 불거진다. 그것은 집회·시위의 가능성을 너무도 협소하게 축소시켜 버려 시민사회가 정치과정에 자신의 의사를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상당 부분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형식적 법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시안의 법원은 이런 위헌성을 그대로 합법성의 이름으로 포장해 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 그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 왔던 시민사회의 추동력이 이 과정에서 관료들의 법률주의 아래 그대로 스러져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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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건국대 교수,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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