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07-09-12   1740

[18회 판결비평 – 판결읽기2]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는가?

지난 9월 6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의 이재홍 수석부장판사와 이상원, 호제훈 판사는 약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중 700억 원을 사용한 횡령혐의, 부실계열사인 현대우주항공에 다른 계열사가 지원하게끔 해 약 1,600억 원의 손해를 끼치는 등 현대그룹의 각 계열사에 수 천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배임혐의 등으로 기소된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김동진 현대차 대표이사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하였다.

1심에서 징역3년형이 선고되어 2심에 가서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천 억대가 넘는 막대한 규모의 횡령과 배임죄를 저지른 기업인에게 또 다시 ‘솜방망이 처벌’이 선고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청이 많은 상황에서 내려진 이 판결은 사법부가 경제정의는 물론이거니와 사법정의를 내버렸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재판장을 맡았던 이재홍 수석부장판사가 정몽구 회장에게 실형이 선고되어 경영일선에서 잠시라도 물러나게 되면, 현대차그룹이 부도될 위기를 맞을 수 있고 이것은 국가경제에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국민적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판결결과를 설명해 논란이 되고 있다.

또 재판부가 집행유예의 조건으로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 대상 강연 실시(2시간 이상),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신문기고, 검찰 수사단계에서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회공헌기금 출연약속 이행을 제시했고 이를 실형을 대체할 사회봉사명령이라고 포장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봉사명령 내용이 과연 실형을 대체할 수 있는 사회봉사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참여연대는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재판결과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사법정의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불법적인 기업활동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한국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는데 걸림돌만 되었다고 본다. 이에 이번 판결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기 위해 판결비평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비평칼럼은 정남구 논설위원(한겨레), 하태훈 교수(고려대 법학,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전성인 교수(홍익대 경제학)가 각각 작성하였다(편집자 주).

패턴이 바뀌었다. 쫑긋 세우고 부릅뜬 이목(耳目)이 있으니 더 이상 유전으로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 유죄는 유죄로되 유전이면 자유이고 무전이면 교도소 수감이다. 외신의 비아냥거림처럼 피고인 쪽에서 보면 ‘돈으로 산 자유’다. 그 보도가 ‘돈에 팔린 사법정의’로 읽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법률의 해석적용의 결과인 판결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의 판단대상이다. 대다수 국민을 납득시키려면 결정의 합리적 근거가 제시되고 논증이 있어야 한다.

정몽구회장 항소심판결은 설득력이 있는가. 재판부의 판단에 대다수 국민이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할 수 있겠는가. 기업총수를 교도소로 보내면 그 기업이 망하고 한국경제가 흔들릴 것이라는 예측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접촉했다는 몇몇 시민의 순진한 생각인가.

일반서민들은 당장 먹고사는데 바쁘기 때문에 ‘기업총수가 없으면 기업 망하고 결국 경제 나빠지고 살기 힘들어진다’는 막연한 도식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사법부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논리로 경제단체가 사법부를 협박하면 사법부는 기업인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의 혜택을 부여해왔기 때문에 생긴 도식은 아닌가.

허용된 해석의 한계를 넘어선 사회봉사명령

집행유예도 비판의 대상이지만 부가한 사회봉사명령의 내용은 어떠한가. 과연 재산의 사회 환원이나 준법경영에 관한 강연 또는 언론기고가 형법 제62조의2에서 의미하는 사회봉사가 될 수 있는가. 그 조문에는 형의 집행을 유예할 때에는 보호관찰이나 수강 또는 사회봉사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 것이든 자유를 제한하거나 자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도록 법원이 강제하는 것이다.

봉사의 사전적 낱말풀이나 일상 언어용법에 따른 의미를 보자. 국어사전에 봉사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애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법원 예규는 자연보호, 복지시설 및 단체 봉사, 공공시설 봉사, 대민 지원, 지역사회에 유익한 공공분야 봉사활동 등을 사회봉사 명령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봉사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자기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법원이 형의 집행을 대신하여 억지로 시키는 것이다.

정몽구회장이 받은 사회봉사명령 중 사회환원하라는 8400억 원은 불로소득이거나 불법소득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도 아까움이 없는 돈이다. 의당 과징금 등으로 추징되어야 할 재산이다. 준법경영에 관한 1회성 강연이나 언론기고 또한 봉사하고는 거리가 멀다.

정몽구회장이 받은 사회봉사명령은 법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이탈한 해석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용하는 일상 언어적 의미의 봉사와도 거리가 멀다. 어떤 해석방법에 의하든 죄형법정주의의 핵심내용인 유추적용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해석이다. 허용된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금지된 유추다.

법원이 제시한 유리한 양형사유와 형의 집행유예도 문제다. 재벌총수는 구속되거나 실형을 선고받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사례가 아닌지,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할 때에 재판부가 경제논리로 실형선고를 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면서 불법행위를 한 것은 아닌지 등은 아예 언급도 없다. 그랬다면 더욱 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기업경영인이라는 직업이나 사회적 환경은 오히려 강한 책임의식을 요구할 수 있으므로 감경적 양형사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형량(刑量)을 줄여준 이유와 그 형(刑)의 집행을 미루는 이유는 엄연히 다른 것

판결문을 읽어보면 양형상 유리한 사정과 불리한 사정들에 대한 언급은 있다. 그런데 형의 양을 정한 사유와 집행유예를 가능하게 한 사유에 대한 구분이 없다.

어떤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집행유예의 사유가 충분하지 않았거나 언급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형의 집행을 유예하려면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형량을 낮추는데 끌어들였던 사유로만 집행유예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

집행유예를 선고하려면 일반 예방적 관점에서 형집행의 필요성이 없고 특별 예방적 관점에서 형벌완화가 요구되어야 한다.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한 특별한 사정은 선고형이 높으면 높을수록 중요한 사정이어야 한다.

재판부는 고령이나 건강상태로 인하여 책임능력이 저하되었음을 인정하여 감경사유로 고려했지만, 이는 오히려 집행유예사유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을 읽어 보면 감경적 양형사유인지, 아니면 집행유예사유인지 분간도 없다. 피고인의 나이, 성행, 학력, 건강상태, 전과관계 및 가족관계 등의 사정을 참작하여 형의 집행을 유예하였다지만, 그 각각의 요소가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언급함이 없이 ‘종합적으로 참작’했다면서 넘어간다.

피해액을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 등 자발성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감형이나 집행유예사유가 되기도 한다. 기업범죄의 경우 기업총수들은 초범일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도 그런 사유를 일률적으로 감형이나 집행유예사유로 고려되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마지못해 수사에 협조하고 반성하는 척하는 기업인은 집행유예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범죄자는 형벌감수성이 높으니 단기라도 자유박탈과 제한의 고통을 맛보여야 한다. 그들은 교도소 내에서 범죄를 학습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단기자유형의 폐해도 없을 것이므로 단기자유형에 적합하다.

법질서의 수호를 위해서도 실형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법이 살아있음을 기업인에게 보여주어 범죄예방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인 지배를 만천하에 인정해 준 꼴

어느 사회든 법질서가 무너지면 공동체의 존립은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기업인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그리고 처벌도 좋지만 국가경제를 살리고 봐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이나 법원의 판단은 근시안적 임시방편일 뿐이다. 재판부가 끌어들인 어설픈 경제논리로 현대기아차의 1인 지배를 만천하에 인정해 준 꼴이다. 그 사람이 수감되어 경영에서 물러나면 기업이 쓰러지고 한국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판결문에 명시했으니 말이다. 법원은 법질서를 방위하고 법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외적으로 과감하게 단기자유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여 형벌의 적극적 일반예방의 효과를 꾀해야 한다.

벌금형이나 집행유예의 남용은 법의 효력에 대한 불신을 키우며 사법정의에 대한 믿음을 깨뜨린다. 집행유예제도도 일부 형을 집행하고 나머지를 유예할 수 있는 제도로 바꾸어야 한다.

하태훈(고려대 법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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