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07-09-12   1864

[18회 판결비평 – 판결읽기1] “일도, 이부, 삼백, 사쩐”

지난 9월 6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의 이재홍 수석부장판사와 이상원, 호제훈 판사는 약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중 700억 원을 사용한 횡령혐의, 부실계열사인 현대우주항공에 다른 계열사가 지원하게끔 해 약 1,600억 원의 손해를 끼치는 등 현대그룹의 각 계열사에 수 천억 원대의 손해를 끼친 배임혐의 등으로 기소된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김동진 현대차 대표이사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하였다.

1심에서 징역3년형이 선고되어 2심에 가서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천 억대가 넘는 막대한 규모의 횡령과 배임죄를 저지른 기업인에게 또 다시 ‘솜방망이 처벌’이 선고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청이 많은 상황에서 내려진 이 판결은 사법부가 경제정의는 물론이거니와 사법정의를 내버렸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재판장을 맡았던 이재홍 수석부장판사가 정몽구 회장에게 실형이 선고되어 경영일선에서 잠시라도 물러나게 되면, 현대차그룹이 부도될 위기를 맞을 수 있고 이것은 국가경제에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국민적 비판을 달게 받겠다고 판결결과를 설명해 논란이 되고 있다.

또 재판부가 집행유예의 조건으로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 대상 강연 실시(2시간 이상),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신문기고, 검찰 수사단계에서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회공헌기금 출연약속 이행을 제시했고 이를 실형을 대체할 사회봉사명령이라고 포장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봉사명령 내용이 과연 실형을 대체할 수 있는 사회봉사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참여연대는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재판결과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사법정의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불법적인 기업활동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한국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는데 걸림돌만 되었다고 본다. 이에 이번 판결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기 위해 판결비평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비평칼럼은 정남구 논설위원(한겨레), 하태훈 교수(고려대 법학,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전성인 교수(홍익대 경제학)이 각각 작성하였다(편집자 주).

우리 병역법은 의사 면허를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병으로 입대하지 않고 3년 동안 농어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것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하게 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그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경계근무를 서는 것보다 공중을 위해 의사 일을 하면, 국가와 사회에 더 크게 봉사할 수 있다. 국민개병제의 큰 줄기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제도 운용의 효율성을 살리는 게 옳다.

그런데, 이런 효율성 원리를 어디까지 확대적용할 수 있을까?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된, 많은 돈을 버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보자. 그가 “현역 입영 대신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버는 돈을 모두 세금으로 내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제안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병역의무자들에게 현역입영 대신, 국가에 꼭 필요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주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거리를 여러가지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돈은 국가가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조달 가능한 것이므로, 병역을 대체하게 할 수단이 못된다.

둘째, 돈으로 병역을 면하는 길을 열어주면, 자신이 아닌 부모의 돈으로 병역면제 혜택을 사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므로 또한 허용할 수 없다.

일정액의 ‘병역면제세’를 내는 모든 사람에게 병역을 면제해주고, 대신 병역을 치르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보수를 주는 제도에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경우도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라면 ‘병역면제세’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제도가 된다. 하지만, 이런 제도 없이, 병역의무자가 개별적으로 국가와 돈으로 협상을 벌여 병역면제를 받는 것이라면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법원이 고민할 일이 아니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수 백 억원의 회삿돈을 가로챈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깨고,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혐의 사실을 거의 대부분 유죄로 인정했다. 1심 재판부가 법정 최저형(5년)보다 크게 낮은 ‘징역 3년’을 선고함으로써, 집행유예의 길을 터준 것도 물론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나, 항소심 재판부가 사회봉사 명령을 전제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처벌의 효율성’논리를 무리하게 확대 적용하여, 헌법이 규정한‘법 앞의 평등(헌법 제 11조)’을 무력화시킨 까닭이다.

재판부는 실형과 집행유예 사이에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많은 사람에게 의견을 들어가며 깊이 숙고했다고 한다. 법원이 실형 선고를 망설인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에 처할 위험이 있는데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에 요약돼 있다.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의 최고의사결정자이고, 그의 부재로 회사의 중요한 경영 판단이 지체될 가능성이 있음은 물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로서 정 회장을 대체할 사람이 전혀 없다는 증거를 법원은 갖고 있는가? 그가 실형을 살 경우 나라 경제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은 논리는 비약이 심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증거’를 중시하는 법원이, 법관 한 사람의 막연한 감에 의존해 판결을 한 것인가? 만에 하나 나라 경제에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그것은 법원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등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다.

이번 판결은 법원 판사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널리 감염돼있던 ‘나라경제염려증‘이 도져나온 것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법원이 진실로 나라 경제를 걱정했다면, 전근대적인 기업경영 관행에 단호히 제동을 걸었어야 마땅하다. 앞으로 이뤄질 많은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들은“내가 실형을 살면 나라 경제가 위태로와질 것”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나도 사회공헌하겠다고 나서면?”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내린 사회봉사명령은 온당한가? 사회봉사명령 가운데 핵심은 “사회 공헌 약속대로 복합문화시설을 짓고 서민이 우선 사용하게 하며, 7년 동안 매년 1200억원을 내라”고 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사회공헌 기금으로 8400억원을 내라고 한 것이다.

자유형을 대신해 재산형을 선고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 더 처벌 효과가 클 수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유형이냐, 재산형이냐는 법원이 처벌의 효과를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다. 피고인의 요청에 따라 선택 가능하게 할 것은 결코 아니다. 법원은 정 회장 판결과 관련해 “돈많은 사람은 돈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게 낫다”고 했지만, 사회공헌 약속은 정 회장에게서 나온 것이지, 법원이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법정에 서게 될 부자 피고인들이 ‘사회공헌 기금’으로 자유형을 대신하겠다고 하면, 법원은 받아들일 것인가?

자유형이냐 재산형이냐는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적용할 일인데, 이번 판결은 우리 사법제도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법원이 개별적으로 피고인과 협상을 벌여 ‘형’을 결정한 것은 법원의 월권행위다.

정 회장이 내기로 한 돈은 국가가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벌금의 성격으로 보기도 어렵다. 정 회장 부자는 계열사 글로비스에 물류 일감을 몰아줌으로써, 몇 년만에 1조원 안팎의 사익을 챙겼다. 정 회장이 애초 글로비스 주식가치에 해당하는 돈을 내놓겠다고 한 이유다. 이 돈은 현대차와 계열사 주주들의 몫이나, 주주들에게 돌려주기 어려워 사회에 내겠다고 한 것일 뿐이다. 정 회장이 애초 했던 사회공헌 약속을 지키든 지키지않든, 그 돈은 법원이 들먹여서는 안 될, 남의 떡이었다. 법원은 이 돈을 내는 것을 사회봉사 명령의 내용에 포함시켜, 남의 떡으로 생색을 낸 것 뿐이다.

이번 법원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 아니다. 우리 법원이 재벌이라는 경제권력 앞에 아직도 납작 엎드려 있음을 또 한번 드러낸 판결일 뿐이다. 재벌총수는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어떤 논리를 들이대서라도 실형만은 면해줄 것임을 법원이 다시 한번 세상에 알린 것이다. ‘일도· 이부· 삼백’이란 말이 있다. 수사기관에 불려갈 일이 생기면 우선 도망치고, 어쩔 수 없이 불려가면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그래도 안되면 권력 배경을 동원하라는, 사법제도에 대한 비아냥을 담은 말이다. 이제 그 뒤에 ‘사쩐’을 덧붙여야 할 듯하다.

“권력 배경을 동원해서도 안되면 돈(쩐)을 내면 풀려난다.” 이번 판결을 ‘사쩐 판결’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남구(한겨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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