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판결/결정 2005-08-18   2097

[판결비평문] ‘표현의‘자유’를 보다‘자유’롭게

미술교사 누드작품 음란물 인정 대법원 판결

지난 7월 대법원 제3부 이용우, 이규홍, 양승태, 박재윤 대법관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김인규 미술교사에 대해 무죄선고한 항고심과 1심의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고등법원에 환송하는 선고를 내렸다.

지난 2000년 1월 검찰은 김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6가지 작품이 음란물에 해당한다며 김씨를 기소했으나, 1,2심 법원은 ‘ 이 작품들이 사회통념상 허용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호색적 흥미를 돋우기 위한 것이라거나, 성욕을 자극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치거나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2년 7개월의 심리 끝에 김씨의 ‘누드작품’중 일부를 음란물로 인정하여 일부 유죄 취지로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음란(淫亂)’이란 보통사람의 성욕을 자극해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정 수치심을 해쳐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이라며, ’음란물 여부는 표현물 제작자의 주관적 의도가 아닌,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의 건전한 통념에 따라 객관적ㆍ규범적으로 평가해야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판시는 대법원이 10년 전인 1995년 6월 연세대 마광수 전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해 ‘음란한 문서’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확립한 판례를 따른 것이다.

이같은 음란물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음란물 판단 기준으로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그리고 사건의 대상이 된 미술작품을 형사처벌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토론해볼 가치가 있다고 보아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비평대상에 올렸다. (편집자 주)

I. 사건개요

중학교 미술교사인 피고인은 교사생활 틈틈이 제작한 자신의 미술작품, 사진, 동영상을 개인홈페이지를 개설하면서 게시하게 되었다. 그 중 음란성의 혐의가 짙다고 판단된 6가지가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해 음란한 영상을 공연히 전시한 혐의를 받아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여성의 다리를 벌려 노출된 성기를 정면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인 ‘그대 행복한가’(공소사실 제1항), 환자용 변기에 놓인 남성의 성기를 그린 ‘무제’(공소사실 제2항), 자신과 자신의 처가 전나로 함께 서서 정면으로 성기를 노출하여 촬영한 사진인 ‘우리 부부’(공소사실 제3항), 청소년이 등장하여 성기가 발기된 채 양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그림인 ‘남자라면’(공소사실 제4항), 발기되어 있는 남성의 성기 및 그 성기에서 분출되는 정액을 화면 중앙에 세밀하게 그린 ‘남근주의’(공소사실 제5항), 여성의 음모, 팬티, 엉덩이 등의 노출된 하드코어 포르노물의 일부 장면을 동영상으로 편집하고 그 밑으로 ‘헉헉’이라는 글자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도록 구성한 동영상 ‘포르노나 볼까’(공소사실 제6항)가 그것이다.

하급심인 대전지법 홍성지원 판결(2002. 12. 27. 2001고합54)과 대전고등법원 합의부 판결(2003. 5. 2. 2003노31)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대법원 제3부는 공소사실 제2항, 제4항, 제6항은 원심판결을 인용해 음란성이 없다며 무죄로 보았지만, 공소사실 제1항, 제3항, 제5항에 관한 부분은 음란물로 보아 유죄를 선고하며 파기환송하였다.

대법원은 여성의 성기를 정밀하게 묘사한 공소사실 제1항은 묘사가 매우 정밀하고 색채가 사실적이며 여성 성기의 이미지가 그림 전체를 압도하기 때문에, 김씨 부부의 전나 사진인 공소사실 제3항은 있는 그대로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느끼자는 제작의도가 있었다 해도 얼굴과 성기를 가리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나신을 드러낼 논리적 필연성이 없어 보이므로, 발기된 채 정액을 분출하는 남성 성기 그림인 공소사실 제5항은 그 그림을 본 보통사람이 성적 상상과 수치심 이외에 다른 사고를 할 여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이유로 “성적 흥분이나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음란물로 판정하였다.

II. 문제점

1. 이제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음란판단기준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다.

어떤 표현물이 음란물인가에 대한 판단기준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예외없이 매우 추상적이었고, 또 구체적 음란성 판단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랐다. 따라서, 음란에 대한 보편타당한 개념정의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스튜어트(Stewart) 대법관은 어떤 표현물이 음란물인가를 도저히 명쾌하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다(I know it when I see it)”고 고백한 바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음란물을 규제하는 음란성 판단기준 중에서도 미국 연방대법원의 3단계 음란성 판단기준이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상세한 판단체계로 인정받고 세계 여러 나라 사법부의 음란성 판단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Miller v. California(1973년) 판결에서 제시되고 그 후 더 구체화된 음란성 판단의 3단계 기준은 첫째, 그 지역공동체의 평균인이 느끼기에 그 표현물이 ‘호색적 흥미에 호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둘째, 그 표현물이 적용가능한 법에 구체적으로 정의된 대로 성적 행위를 ‘명백히 공격적인 방법으로 묘사’하며, 셋째, 전국적 기준에서 판단했을 때 그 표현물이 ‘중대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가치를 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야 음란물이 되어 표현의 자유 보호 범위 밖으로 내몰리게 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性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음란물인가 여부를 놓고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종종 있었는데, 1970년대의 소설 “반노(叛奴)”가 그랬고 10년 전인 1995년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2000년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 봐”가 그랬다. 이들은 음란물의 제조 등을 금한 형법 제244조, 음란물의 판매 등을 금한 형법 제243조에 의율돼 음란물로 처벌받았다.

우리 대법원은 음란을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미국의 3단계 음란성 판단기준과 비교해 봤을 때, 너무 추상적이면서 간단하다. 오히려 음란물을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헌재 1998. 4. 30. 95헌가16)으로 정의하고 있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음란 정의가 더 구체적이면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3단계 기준에 많이 다가가 있다.

음란 판단기준의 구체화에도 한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의 음란 판단기준인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은 구체화의 노력을 아예 포기한 느낌마저 들게 할 정도로 추상적이다. 추상적이고 너무 간단한 음란성 판단기준은 음란물 여부의 판단에 판사의 주관이 과도하게 개입할 여지를 제공해 그 판단이 자의적인 것이 되기 쉽게 하며, 음란성 판단의 결과가 일관성이 없는 것이 되게 할 수 있어 위험하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도 10년 전인 1995년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해 음란물 판정을 내리면서 확립한 판례의 기준을 따르면서 종래의 추상적이면서도 너무 간단한 음란성 판단기준을 잣대로 들이대고 있다. 이제는 외국의 음란성 판단기준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우리사회의 특수성을 깊이 고려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성있는 음란성 판단기준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다.

2. 성인과 미성년자 대상 표현물의 음란성 판단기준을 달리해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Miller 판결에 의한 3단계 음란성 판단기준을 성인을 상대로 한 성적 표현물의 음란성 판단기준으로 한정짓고, 미성년자들을 상대로 한 성적 표현물의 음란성 판단은 그 기준을 달리 하여 성적 표현물로부터 ‘미성년자의 특별보호’를 꾀하고 있다.

그 방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독자나 관객으로서의 미성년자의 특별보호다. 성인들에게 배포되었을 때 Miller 판결의 3단계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음란하지 않은 표현물이 될지라도 “성에 대해 노골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물(sexually explicit materials)”이기만 하면 미성년자에게는 그것이 음란물이 되어 미성년자에의 배포를 법이 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성적 표현물의 등장자’로서의 미성년자의 특별보호다. 즉, 어떤 성적 표현물이 Miller 판결의 3단계 기준으로 보아 음란물이 아니더라도 ‘성행위에 가담하는 미성년자’를 보여주는 표현물이면 음란물로 보아 그 배포를 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법리는 New York v. Ferber(1982년) 판결에서 상세히 다루어졌다. 물론 이 때의 표현은 ‘미성년자의 시각매체를 통한 표현’에 국한되고 성행위에 가담하는 미성년자에 대한 글을 통한 묘사는 음란물로 규제되지 않는다. 즉 실제 미성년자의 출연이 없는 글을 통한 묘사는 처벌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도 “청소년 보호라는 명목으로 성인이 볼 수 있는 것까지 전면 금지시킨다면 이는 성인의 알권리 수준을 청소년의 수준으로 맞출 것을 국가가 강요하는 것이어서 성인의 알권리를 침해하게 된다”(헌재 1998. 4. 30. 95헌가16)고 판시한 바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적 표현물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적 표현물의 음란성 판단기준을 달리해야 한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도 최대한 보장하고 미성년자의 특별보호도 꾀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성인 대상 성적 표현물은 음란 판단의 기준을 높고 까다롭게 두어 음란물의 범위를 좁게 잡음으로써 성인을 대상으로 한 표현물에서는 성적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적 표현물에 대해서는 ‘성에 대해 노골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물’이기만 하면 음란물로 판정하는 낮은 기준을 둠으로써 성인과는 따로 성적 표현물로부터 청소년을 특별히 보호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부분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표현에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헌법적 차원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될 수 있다.

3. 대법관은 ‘일반 보통인’이 아니다. 음란사건에 대한 판단은 배심재판으로

사법부는 성적 표현이나 음란 판정과 관련하여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관점에서는 예술가들에 비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문화적 표현물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급속도로 진보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반인의 이런 변화된 관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판결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즉, 대법관은 예술전문가도 일반인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에 있어 음란성 판단자로서 그다지 좋은 자격요건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우리 대법원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는 등의 방법으로 음란물로 판단해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일반 보통인”이 아니라 대법관 자신이 그 성적 표현물을 검토해 보고 성적 흥분이 유발되거나 성적 수치심이 들면 이를 음란물로 보는 주관적 음란판단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대법관들은 자신들이 “일반 보통인”이라 믿고 이러한 판단을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반 보통인”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를 상상하면서 판단을 하겠지만, 대법관의 정서는 애초에 “일반 보통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고 “일반 보통인” 입장에 선 상상도 사실은 “일반 보통인”의 그것과 동떨어진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50대나 60대 엘리트 도덕주의자 법관들의 판단이나 상상이 어떻게 ‘일반 보통인’의 판단으로 병치될 수 있겠는가. “일반 보통인”은 적어도 엘리트 대법관들보다는 성적 표현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관용적이고 다양하며 젊을 수 밖에 없다. 본 사건 판결에서 대법원 판결은 “일반 보통인”에게 별로 납득가지 않는 가치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약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혹은 대법원 판결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려 “일반 보통인”의 비웃음거리가 되게하고 있다.

본 사건에서 대법원이 음란물로 판정한 ‘우리 부부’ 사진의 경우, 고등법원이 판결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되고 5ㆍ18 자유공원내에 상설적으로 전시될만큼 예술성이 인정”된 것이었다. 광주비엔날레 작품 심사위원들과 5ㆍ18 자유공원 전시품 심사위원들,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와 5ㆍ18 자유공원내의 미술작품들을 돌아보며 김인규 교사의 ‘우리 부부’ 사진에서 별 성적 흥분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예술가적 혼이나 실험정신을 감지했던 우리 사회의 “일반 보통인”은 그럼 다 음란한 마음을 품은 음란의 동조자들이란 말인가.

이런 점 때문에 음란 판단은 “일반 보통인”의 허용기준을 반영하기 위해 배심재판에 맡겨져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3년의 Miller v. California 판결부터 배심원의 권한을 더 강화하기 위해 지역공동체 기준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즉, 세 가지 음란성 판단의 기준들 중 앞의 두 가지 기준인 ‘호색적 흥미에의 호소’나 ‘명백한 공격성’의 충족 여부는 그 표현물에 대한 기소권이 행사된 지역의 지역공동체 기준에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기준이 지역공동체 기준에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기준에 대한 판단을 ‘배심원들에 의한 사실판단’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심재판을 통해서 “일반 보통인”의 관점이 가장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다. ‘음란 판단’의 문제야말로 계속해서 “일반 보통인”의 관점을 음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면, 필요적 배심재판사항으로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 판사는 태생적으로 “일반 보통인”의 정서를 대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 중대한 예술성이나 사상성은 음란성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없앤다’.

대법원은 음란 판단에 대한 사건에서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고 어느 예술작품에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며, 다만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곤란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임을 줄기차게 강조해오고 있다. 즉, 예술성은 음란성을 완화시켜줄 수는 있으나 음란성에 전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외국판례의 입장을 살펴보면, 중대한 예술성이나 메시지가 있는 사상성은 음란성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미국 연방대법원의 3단계 음란성 판단기준에서도 세 번째 기준으로 ‘중대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가치를 결하는 것’을 들고 있으며 ‘중대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가치’만 있으면 위의 두 기준을 충족시킨 ‘호색적 흥미에 호소하는 명백히 공격적인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라도 음란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본 사건의 하급심은 쉽게 파악해 냈고 무죄의 이유로 삼았던 ‘성상품화를 반대한다’든가 ‘있는 그대로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직시하자’는 작품의 메시지가 이상하게도 대법원판결에서는 별로 크게 고려되지 않고 음란성을 조금 “완화해 주는” 장식물로 치부되고 있다. 김인규 교사의 표현물들에 전체적으로 교육적이고 계몽적인 문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러한 전체적 문맥에는 눈을 가린 채 오로지 성적 노출의 크기나 정도에만 집요하게 매달리고 이를 문제삼았다. 사건당사자인 김인규 교사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법원은 성기를 드러낸 것만 가지고는 더 이상 음란물로 판정하기 힘드니까 얼마나 크게 그렸느냐를 걸고 넘어졌다”면서 “크게 그리면 음란물이고 작게 그리면 예술인가”라는 반문을 제기했을 정도다. 2000년 소설가 장정일씨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음란물 판정에서도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은 표현의도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방된 성관념을 아울러 고려하여 보더라도 음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피고인이 주장하는 표현의도 즉, 예술성과 사상성이 있는 표현물에 대해, 그것이 상업적 목적을 포장한 포장용 핑계거리가 아니라 일반 보통인들이 그 주제를 감지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당연히 예술성과 사상성이 인정되어 음란물의 낙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일찍이 음란과 ‘주제가 있는 음란’을 구별했다. 후자를 일정한 성행위 표현의 보호로 보아 사상의 표현의 하나로 취급하며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Kingsley International Pictures Corp. v. Regents(1959년) 판결에서 간통이나 사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으로 묘사한 어떤 영화도 결과적으로 금지하고 있던 뉴욕주 영화검열법을 위헌무효화 시켰다. 그 영화검열법은 어떤 사상의 주장도 검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조 하에서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록 노골적이고 대담한 묘사가 담긴 성적 표현물이라 할지라도 중대한 예술성이나 사상성을 가진 것이라면 음란성을 완화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면해주어야 한다. 우리 대법원이 표현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철저한 고민을 하고 이러한 음란의 문제를 다루는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다.

5. 다른 음란물과의 형평성의 문제

우리 사회에는 현재 온갖 노골적이고 병적인 표현의 상업적 음란물들이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포르노 사이트’는 국경의 장벽마저 없는 인터넷 공간의 자유성을 십분 악용하여 성인뿐만 아니라 미성년자들에게도 낯뜨거운 음란물들을 펼쳐보이고 있다.

규제를 하려면 이런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성행위를 내용으로 한 상업적 음란물들을 규제해야 한다. 이것들이 그 해악성의 정도가 심하고 우리 헌법재판소가 말한대로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크게 해칠 뿐만 아니라 사상의 경쟁매커니즘에 의해서도 그 해악이 해소되기 어려워 언론ㆍ출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받지 못하”는 음란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인규 교사의 표현물들은 성에 대한 치욕적이고 병적인 흥미에 호소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건강하고 평범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표현이 있었을 뿐이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오히려 인체의 성상품화를 반대한다는 반음란적(反淫亂的) 주제가 작품 속에 흐르고 있을 뿐이다.

여기 어디에 정상적인 건강한 성에 대한 표현 이외에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성에 대한 탐닉이 묘사되어 있는가. 또한, 어떤 상업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의도도 전혀 없다. 표현물의 성 도발적 성격을 강조하는 홍보행위나 선전행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음란물들,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챙기기 위한 말 그대로의 음란물이 창궐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건강한 성에 대해 교육적 의도로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을 음란물로 처벌한다는 것이 도대체 형평성의 측면에서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인가.

Ⅲ. 맺음말

대법원은 ‘일반 보통인의 건전한 통념’이라 치장된 자신들의 보수적 도덕의 잣대로 표현물들의 음란성 여부를 재단하려 하고 있다. 보수적 도덕주의는 위선적인 것일 수도 있기에 위험한 것이다.

인간행위, 도덕, 성, 종교에 관한 증명되지 않은 가정들에 기초한 음란규제의 노력은 헌법 제21조의 가치를 중대하게 훼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음란물과 성범죄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도 상관관계가 없다는 보고도 많다.오히려 자유주의적 이론에 의하면 많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실험결과는 공격적인 포르노그래피가 강간 등의 성범죄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가진다고 반박한다.

한 발 양보해서, 음란물 규제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음란성 판단은 표현의 자유와 이 음란물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이익형량을 통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위에서 본 3단계 음란판단기준 중 ‘호색적 흥미에의 호소’나 ‘명백한 공격성의 하드코어 성행위 묘사’의 기준은 현대와 같이 성이 고도로 상품화된 미국사회에서는 웬만한 성적 표현물들은 다 충족하고 있으므로, 미국 판례법상의 음란성 판단은 세 번째 기준(예술성, 사상성)을 통해 이익형량이 이루어지고 그 이익형량이 결정적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음란성에 관한 사건들은 ‘점잖은 사회를 유지할 정부의 권리’를 침해함이 없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까지 보호될 수 있느냐를 보는 이익형량의 문제라는 것이다.

온갖 음란물이 범람하고 성인이건 청소년이건 구분없이 쉽게 이들 음란물을 접할 수 있게 된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표현물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정부의 ‘점잖은 사회를 유지할 이익’은 아주 왜소해 보일 따름이다. 오히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적 표현물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적 표현물을 구분하여, 전자의 경우에는 엄격한 기준으로 이를 철저히 규제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음란물을 좁게 보는 완화된 기준의 적용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다 더 넓게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표현의 ‘자유’를 보다 ‘자유’답게 남을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바람직한 선택이겠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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