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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를 아시나요

자유게시판
작성자
덕진
작성일
2013-08-18 11:50
조회
1903

삼전도비를 아시나요

 

 

차 례

 

 

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제정일치사회

북벌정책

소중화

백범일지 ‘나의 소원‘

반쪽짜리 해방을 극복하려면

마치는 말

 

 

아이들이 방학이라 역사탐방의 일원으로 송파 석촌호수가에 있는 삼전도비를 찾았다. 무료하게 앉아있던 노인(문화재 해설사) 두 분이 우리를 반긴다. 비석 옆의 안내문에는 이 비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사적101호라는 것, 본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라는 것과 함께 그간의 수난을 기록해 놓았다.

이 비는 1639년(인조 17년) 청 태종의 명령으로 건립된 것인데, 1985년 청일전쟁에 청이 패하자 고종의 지시로 강물에 수장했던 것을 1913년에 일제가 건져내 다시 세웠다. 해방 후, 1955년에는 문교부 주도로 매몰했다가, 1963년 대홍수로 몸체가 드러나 이를 다시 파서 석촌동 289-3번지 뒷골목 마을 놀이터에 세웠다. 2007년에는 백씨라는 사람이 붉은 페인트로 비석 앞뒷면에 철거라고 크게 써놓아 이를 회복시키는데 3개월이 걸렸고, 2010년4월에 위치를 고증하여 현 위치로 옮겼다는 것이다.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은 철골구조물이다.

 

 

  대리석으로 된 이 비석은 높이 5.7미터, 폭 3.95미터, 두께 1.4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앞면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썼고, 뒷면은 한문으로 씌여져 있다. 왕의 지시로 비문은 대제학 이경석이 지었고, 글은 참판 오준이 썼으며 전서는 참판 이여징이 했는데, 글자가 많이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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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

 

정묘‧병자호란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전쟁을 자초했다는 점과 7년간의 왜란으로 거덜난 나라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쟁이다. 4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7년간의 왜란의 결과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크게 바뀐다. 일본의 경우 1599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이 승리하여 새로운 막부가 들어서고, 중국의 동북방에서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한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권력을 유지하나, 나라는 거의 폐허와 마찬가지였다. 궁권, 사찰, 사고 등의 건물은 불타고, 서적 등 문화재의 손실이 엄청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은 전쟁 중의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인해 더욱 어려웠다.

종전 10년 후에 즉위한 광해군은 자연히 ‘나라 세우기‘ 특히 경제 살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고, 명의 강압에 의해 원군을 출병할 때 강홍립 장군에게 밀명을 내려 후금에 투항하므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을 일어나 광해군은 폐서인이 되고 강화도에 유배된다. 쿠데타의 주도 세력은 권좌에서 쫒겨난 서인세력인데 이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살제폐모(殺第廢母), 의리배반과 변절을 드는데, 주요한 것은 명에 대한 사대를 버리고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정책을 취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으로 선회한다.

1627년(인조 5년) 1월 일어난 정묘호란은 화의로 매듭지어져 조선과 후금은 형제(兄弟)간의 관계가 되었으나, 후금이 명을 치기 위해 금품과 병력 지원을 요구하자 조선이 이를 거부하여 화의는 깨지고 전쟁으로 돌입한다.

 

청태종이 이끄는 12만 대군에 대항해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항전하던 조선은 1637년(인조 15년) 1월 삼전도에서 후금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항복례를 하고 청에 대해 군신의 예를 지킨다는 화의조약을 맺는다. 이에 따라 전쟁배상금은 물론, 두 왕자와 대신들의 아들들은 인질로 끌려가고 수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잡혀간다.

 

1624년(인조 2년) 1월,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현직 부원수 겸 평안병사 이괄의 난으로 한성은 한 때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나라는 다시 전쟁터로 변한다. 서북면의 국경 수비를 맞고있던 군사들이 반란의 주력이라 대부분 반란군으로 희생되거나 반란실패 후 후금으로 망명한 상태라서 국경수비는 공백상태와 다름이 없어, 후금군은 두 차례의 침입에서 제대로 된 저항 없이 수도를 함락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정축원단에 망월봉 정상에서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던 청 태종은 조선국왕이 내행전 마당에서 북경을 향하여 명의 천자에게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바라본다. “난해한 나라로구나----” 라고 혼자 중얼 거린다.(김훈 지음, 남한산성, 학고재, 258~276쪽) 그리고 국서를 조선 국왕에게 보낸다. “전략, 네가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으로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하나, 내가 너를 놓아주겠느냐. 땅 위에 삶을 세울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빼앗을 수 있고, 또 구걸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훔칠 수는 없고, 거져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명을 아비로 섬겨, 나의 화포 앞에서 너의 아비에게 보이는 춤을 추더구나. 네가 지금 거꾸로 매달린 위난을 당해도 너의 아비가 너의 춤을 어여삐 여기지 않고, 너를 구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냐. 후략”(위의 남한산성, 284~285쪽)

 

소설에서는 어전에서 척화론자 김상헌과 주화론자인 최명길의 토론이 여러 번 나오는 데, 척화론의 요지는 ‘명나라가 우리에게 부모라면, 후금은 곧 부모의 원수다. 자식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가 되어서 부모를 저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가 일본을 물리친 것은 오로지 명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주화론의 요지는 ‘경망하게 큰 소리만 처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도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누구 책임인가. 지금 우리는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야 한다.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니 그들과 왕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젊은 낭청과 교리들이 행궁으로 몰려왔다. 승지가 고하기도 전에 당하관들은 이마를 땅에 대고 흐느꼈다. “전하 명길을 베어 머리를 삼군에 돌리소서”

임금이 말했다. “경을 베라고 하는구만”

최명길이 임금의 말을 받았다. “옳은 말이오나 지금은 아니옵니다. 지금은 이르옵니다. 환궁 후에 베소서”(위의 남한산성, 271~272쪽)

 

조선의 사대부로서 최명길만큼 눈앞의 비난에 구애받지 않고, 초지일관 현실에 최선을 다한 정치가가 또 있을까? 정묘‧병자호란을 통해 시종일관 오랑캐에 대한 화의를 내세워 매국의 화신으로 매도되었던 최명길. 그는 형식적 명분론에 구애되지 않는 행동 철학으로 목숨을 걸고 나라와 백성을 구해낸다.

청에의 항복이 굴욕적이긴 했지만, 종사는 보전할 수 있었고, 노구를 이끌고 두 번씩이나 청에 드나들며 무리한 세폐를 줄이고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왔으며 원병 요구를 막아냈으니 그는 누구보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대신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제정(祭政)일치 사회

 

힘없는 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놓고 싸우는 두 거대세력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이 잘못인가? 그게 국왕 폐위의 명분이 될 수 있나?

그러나 당연하게 보이는 이러한 외교정책을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게 서인들의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다. 가족의 부자(夫子)간의 윤리를 국가의 충효관계로 그리고 국제관계에 까지 확대 적용시키는 이 논리는 ‘명을 배반하는 것은 두 아비를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 같은 하늘 아래 두 아비를 섬길 수 있는가’라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은 명‧중국‧성리학은 정(正)이고, 후금‧여진‧다른 학문은 사(邪)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나아가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절대적이었다.

 

성리학은 남송의 주희(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로서 150년 후 고려에 들어온다. 조선왕조의 건국 주도세력인 신흥사대부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제도를 성리학의 이념으로 만들어 간다. 향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 과목에 성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니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성리학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이학적 논리에 기초한 통의식을 바탕으로 유교의 종교화를 도모하여 사제적 기반을 확립하고, 승려가 수행해오던 역할을 대신하여 ‘정치와 종교의 일원적 형태’가 나타난다. 따라서 공자사상의 하나의 해석방법에 불과한 성리학이 종교화 되어 조금의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가 되었다.

현실을 무시한 당위론, 실천 가능성이 없는 관념론, 그리고 원칙과 이론을 앞세우므로 타협을 거부하고 국가 통치를 현실 보다는 명분으로 결정하는 사회가 되어 왕조 초창기(세종조)민본을 중요가치로 하던 역동성을 잃어버린 나라가 되고 만다. 한마디로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구호로 모든 게 결정되는 중세 유럽 사회와 닮았다.

 

중종이 발탁하여 중용한 사림 가운데 조광조가 있다. 이 분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여, 국왕주도의 영토 확장 등 부국강병책을 반대하고, 성리학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궁궐 내에 소격서(도교 사원)를 폐지하라고 중종의 편전에서 밤을 새워 데모를 이끌기도 한다. 고려왕조 까지 전해오던 우리의 전통문화와 포용성‧다양성이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사라지고 만다.

대표적인 예로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조대비의 상복기간을 얼마로 하느냐가 쟁점인데, 이를 두고 권력이 교체되는 환국이 일어나니, 명분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나 짐작할 수 있겠다.

 

가정의 예법도 주자가례에 의해 변화하여; 장가가던 게 시집가는 것으로, 남녀 균등 상속이 차등 상속으로, 자녀가 돌아가며 모시던 제사가 장자가 모시는 것으로, 족보에 출생 순으로 올리던 것이 남녀 순으로 기록하고, 족보에서 외손의 이름이 사라지고 또한 서자들은 부계혈연에서 배제 되는 등 가부장적 가족질서로 변해갔다. 사회의 기본 규범은 삼강오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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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정책

 

정부의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인해 두 차례의 큰 전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반성과 성찰 대신 ‘치욕을 씼기 위해 청과 전쟁을 벌려서 복수하는 것’을 우선 정책으로 택한다. 우선 강화조약을 무시하고 남한산성을 대폭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하기로 한다.

 

뿐만 아니라 9년 만에 돌아온 소현세자가 정상적인 대청관계를 촉구했다는 이유로 인조는 어영대장을 시켜 동궁을 수색시켜 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문물을 모두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데, 인조는 장례를 국상으로 치르지 않고 약식으로 치른다. 그리고 왕위계승의 서열상 세손이 있는데도 인조는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인조의 독살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조정에 김상헌, 김집, 송시열 등 반청척화파 인물을 대거 등용하는 한편, 반청의식이 투철한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하고, 10만 병사를 양성하기로 한다.

어영청 군사를 3배나 늘리고, 금군은 기병대로 개편한다. 남한산성에 대포 300문을 설치하고, 조총부대를 만들어 조총사격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추진한다.

 

그러다가 북벌을 외치면서 양성한 군이 청의 요청으로 출병하여, 흑룡강 지역에서 청군과 함께 러시아 군을 격파한 뒤 개선하는 일이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있었다. 북벌정책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청의 지원병 요구에 묵묵히 따르는 이런 정책은 이율배반, 다시 말해 북벌정책이란 것이 그저 국내용(서인이 정권을 유지하는 방편)이라는 비판의 이유다.

 

소중화(小中華)

 

우리는 중국의 중화문화를 일찍이 수용하여 오랑캐의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한족의 나라 명이 멸망한 지금 중화문화의 적자는 바로 조선이다 라는 게 ’소중화론’이다.

1704년(숙종 30) 명이 망한지 60년을 기념해 창덕궁 후원에 명의 신종(임진란 때 원군 파병)과 의종(마지막 황제)을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짓고 국왕이 제사를 올린다. 아울러 民에서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북 괴산 화양동 계곡에 1703년에 만동묘(萬東廟)를 짓고 유생, 수령, 촌민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성리학이 학문에서 종교로 변질되고, 조선왕조가 소중화가 되어 북벌정책을 택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이 송시열이다. 그는 주자 도통의 전수자이기를 자임하고 스스로 주자의 절대권위에 의탁해서 그 권위를 대행하려 했다. 그는 평생 주자를 흉내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자신과 함께 부인에게도 중국식 옷을 입고 생활할 정도로 숭명의식이 투철했다.

그의 독선적인 성품 탓도 있겠지만, 윤휴, 박세당 같은 당대의 석학들의 학문적 독창성을 인정해주는 대신, 주자의 설을 따르지 않는 이단 즉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공격하므로 학문, 양심, 종교의 자유 등을 크게 위축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 연행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이 들 가운데 몇 분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조선이 어떻게 청의 생활과 문화를 수용할 것인가를 개혁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책을 쓰는데, 박제가의 ‘북학의’(1778)와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가 그것이다.

박제가는 청에서는 재상들도 시장에 나가 직접 물건을 산다면서 조선 선비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절약 보다, 상공업을 천시하지 말고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관심을 보인다.

박지원은 중국과 적극적으로 통상하면 문명수준의 향상과 국제정세 파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지동설에 관한 토론 내용, 의술, 세계정세, 천주교 등에 관한 것 등 새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청을 오랑캐로 깔보는 조선의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조선은 19세기 중엽 신미양요‧병인양요 때는 쇄국정책을 지지하다가, 1876년 준비돼지 않은 개국을 맞는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조선왕조가 초기에 왕성했던 역동성을 잃고 시들어가는 과정을 요약하여 기술했는데, 그 폐해를 지적하고,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역설한 백범 선생의 글이 있어 아래에 소개한다.

 

 

“상략, 모든 계급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중략,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하략.”(정치이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하략”(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청태종의 묘

 

반쪽짜리 해방을 극복하려면

 

오늘은 광복 68주년 기념일이다. 그간 우리는 백범 선생이 바라던 독립된 통일조국,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었나?

해방은 맞았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또 다른 외세가 남북을 꽉 누르면서 결국 미국의 주도와 소련의 방조로 조국은 분단되고, 분단은 민족상잔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해방의 과제인 친일 반민족세력은 청산되기는커녕 또 다른 외세인 미국의 철저한 양육과 보호를 받아 오히려 더욱 창궐하게 되었다.(KBS1TV, 광복절 특집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 2013년 8월15일)

 

광복 68주년, 정부수립 65주년이라면 이제까지의 과거를 성찰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할 시점에 와있다 하겠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탈냉전시대, 민족사적으로는 통일시대라는 역사 흐름에 순응하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획기적으로 열어나갈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부터 바꿔야 하나?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들어보자.

 

1. 지나친 이념 지향성을 완화하자.

상해임정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의 이념으로 심한 갈등을 겪은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글을 남기는 데, 그 내용이 ‘한국정치의 역사에서 전통성을 찾는다면 아마 지나친 이념 지향성일 것이다. 걸핏하면 대세다 조류다 하면서 강자의 논리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획일적 사유체계에 집착해온 이념적 경직성이다’라고 질타한다.

 

400년 전 조선의 선비들을 지배하던 소중화와 성리학, 즉 모든 사물을 正‧邪 이분법적으로 보았던 것이 상해 임정을 거쳐 지금은 북에서 ‘김일성주체사상’으로 그리고 남에서 ‘반공지상주의’로 살아있는 게 아닐까?

 

‘종북좌빨’이라는 단어는 분명 전쟁담론의 유산인데, 아직도 경쟁세력을 공격하는 핵심소재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내려지는 낙인이다. 따라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토론과 철학이 결여되어, 공화국가, 평등국가, 사회민주주의 구상은 전면적으로 봉쇄된다. 그러니 나라는 철학이 없는 극단적인 불평등한 사회, 천민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2. 지난친 숭미(崇美)주의를 지양하자.

400년 전 조선의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잘못을 호도하기 위해 ‘북벌론’을 꺼내들고 백성을 동원했으며, 나아가 궁궐에 대보단을 짓고 국왕이 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모신다. 그리고 이들의 명분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이다. 왜란 때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말자!

요즘 이 나라 군의 정훈교육이나 예비군 훈련장에서 고정적으로 나오는 얘기도 재조지은이란다. 나아가 주한미군의 주둔도 미국의 동북아 전략보다 한국을 도와주는 것으로 해석한다나?

 

 

그러나 어찌 이뿐일까. 지금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계, 재계, 학계, 군, 종교계 등 소위 엘리트들은 친미 성향의 미국 유학파가 잡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학에서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영어로 발행되는 국제적 저널에 실린 논문 편수를 늘리기에 바쁘고, 어학능력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영어로 강의를 한다. 동북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 학위를 해야 제대로 대우를 받는다.

 

2008년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상득 의원은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를 만나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외교문서에서 밝혀졌다. 이 부의장은 또 “이 대통령은 친중국 성향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에 따르면 이상득 의원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대해 “386세대가 중심이 된 반미‧친북‧통일 지향 집단이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반미‧친북 시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잔재가 힘과 영향력을 잃게되면 이런 문제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8월14일 일본의 요미유리 신문은 일본의 평화헌법 수정 즉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예시적 사례로 ‘한반도 유사시 미군지원 활동’을 명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즉 일본이 국방군을 만들면 투입될 나라는 한반도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아베 총리의 생각인가? 미국의 동북아 정책인가? 아니면 둘 다? 그러면 한국의 ‘친미애국’ 세력들의 생각은 어떤가?

 

 

3. 부끄러운 역사를 없애거나 감추지 말자.

나는 수년 전부터 삼전도비가 사적이니 지하철역 주위 안내도에 표시하자고 도시철도공사, 송파구청, 시청 등에 제안했다. 그러나 묵묵부답. 그래서 지난해 봄에는 직접 송파구청 문화관광과를 찾아가 과장을 만나 건의하니 그는 좋은 제안이라며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진 것은 없다. 아마도 협조부서가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나는 송파구 주민임)

동남아 등을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우리와 같이 식민지 경험을 한 나라 즉 타이완,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디아 등은 모두 총독부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도 엄연히 우리 역사이니, 이를 없애거나 감추지 말고, 후손에게 제대로 가르쳐서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이 아닐까?

 

 

서중석 교수는 그의 책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도들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자주 갖는다. 현대사에 관한 기존 언론계나 정치계의 주장, 기성학계의 글이 잘못 알고 썼거나 틀린 것이 많아 그다지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않아도 그것의 허구성이나 오류를 찾아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조금만 주의해서 자료를 검증했어도 그런 잘못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한 강연회에서 ‘역사 왜곡은 심각한 반민족 행위고 반국가 행위다’라고 질타했다.

 

 

마치는 말

 

한국이 정부 수립 후 65년 간,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것은 세계가 모두 부러워하는 바이다. 그러나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서 세계사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려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 속에 안주해왔던 껍질을 과감히 벗어던져야 하리라. 뱀이나 가제가 더 크기 위하여 탈피하는 과정을 거치듯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여 GDP가 2년 전에 일본을 추월하여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향후 15년 후 쯤에는 미국마저 추월할 것이란다. 대한민국의 대중국 무역규모는 미국과 일본을 합한 것보다 많아, 한마디로 중국 덕에 먹고사는 처지이다. 중국은 군사비 역시 미국 다음으로 많이 쓰는 나라이고 핵무기는 물론 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달리, 중국은 대만과 경제협력을 잘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적교류도 활발하고, 국제사회에서 자국 이익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역사는 과거 성찰의 정도만큼만 미래발전을 허락한다. 요컨대 우리가 ‘미래’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현재의 수준’에 비례한다.

 

다행스럽게 그간 남북한 사이에는 7.4공동성명 외에 노태우 정부시절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있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공동선언‘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이 있다. 평화통일은 헌법 전문에 선언하대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최우선 과제인 만큼, 이는 어느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중한 주요 남북 약속을 지킴은 물론 이를 발전시켜 평화통일로 나가야할 책무가 있다.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 그리고 오직 힘만이 정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인구 7,000만의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주위가 모두 세계 4대강국이라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국 대우를 받을 수밖에. 그런데도 해방 후 70년 가까이 서로 싸움질만 하고, 우리의 문제를 주위 강대국들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나라 장래를 위하여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하겠다. 정전 60주년 기념일을 보내며 최명길 같은 대신을 기다리는 것은 헛된 일일까? 먼 훗날 후손들의 역사평가가 두렵다.

 

 

참고문헌;

 

 

1. 남한산성, 김훈 지음, 2009년, 학고재

2. 역사신문-4, 역사신문편찬위원회, 2004년, 사계절

3. 한국사의 이해, 송찬섭 외, 2012년, KNOU Press

4.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진덕규 지음, 2002년, 지식산업사

5. 백범일지, 김구 지음, 1995년, 범우사

6.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 강정구 지음, 2006년, 통일뉴스

7.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지음, 2007년, 역사비평사

8. 정전60주년 한반도 평화 안내서, 참여여대, 2012년,

9. 아시아 시대에 대한 준비, 강명구, 한겨레, 2013. 8.12

10. 이상득, “이대통령 뼛속까지 친미‧친일”, 경향신문, 2009.09.07

11. http://blog.daum.net/koreasan/15605426

2013년 8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