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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문화유적 과 역사탐방

자유게시판
작성자
맹행일
작성일
2009-03-23 10:25
조회
3475
 

아래는 제가 1년 전에 전 직장 동료들과 남산을 찾았을 때 유적답사 및 역사탐방 자료로 썼던 것입니다.

올해 봄산행은 4월19일에 남산을 오른다니 필요하면 보완해서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1. 류성룡 생가터


- 4호선 충무로 역 1번 출구로 나와 퇴계로 4가 방향의 SK주유소자리가 서애 유성룡의 생가터.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충효당은 은퇴 후에 거처하던 집.


- 유성룡(柳成龍, 1542년 ~ 1607년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풍산[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2] 출신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지식으로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2. 서울 성곽


- 사적10호로 지정. 길이는 18.122Km.

- 태조 5년(1396년)에 축조 당시 석성 19,200척, 토성 40,300 도합 59,500척으로 쌓음. 태조 때 동원된 인원이 12만(당시 한양 인구 5만).

- 세종 4년(1422년) 전 구간을 석성으로 바꾸고서  다시 측정한 길이는 60,893척.

- 숙종 때 개축, 1975년에 복원.


-1907년 7월~1908년 9월에 일제에 의해 군대해산과 함께 성곽 해체.


3. 타임캡슐


- 중앙일보사에서 1985년에 묻어.


4. 국사당 터


- 이성계는 재위 3년(1394년)에 한양에 궁궐과 종묘, 사직단을 준공하고, 이를 하늘과 땅에 올리는 의례를 올린다. 이 때 북악산과 목멱산(남산)에도 고사를 올리는데 북악산은 진국백에 목멱산은 목멱대왕에 봉하고 그에 합당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당을 지었고, 매년 봄 가을로 기은제를 올리고, 큰 가뭄이 들면 기우제도 지냈다.

- 세월이 지남에 따라 민간의 성황당처럼  바뀌어.


- 1925년에 인왕산으로 옮김. 이유는 일제가 지금의 백범공원 터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일본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사지내는 조선신궁 보다 높은 곳에 조선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옮기면서 무신도(巫神圖)가 사라져.

- 일부 학자들 팔각정 대신 국사당 복원 주장


5. 봉수대


- 태종 6년에 세워져 갑오개혁(1894년)까지 사용하던 무선 통신 수단.

- 전국을 5개 라인으로 편성하여 남산에 5대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1993년에 복원.


제1봉수; 두만강과 압록강 연변의 국경상태 파악

제2봉수; 일본 쪽의 경상도 해안 상태 파악

제3봉수; 황해 연안 상태 파악(평안도와 황해도 내륙)

제4봉수; 황해연안 상태 파악(평안도와 황해도 바닷길)

제5봉수; 다도해와 황해연안 상태 파악


- 봉화를 올리는 방법은;

일거는 평온할 때, 이거는 적에게 이상한 동태가 희미하게 나타날 때, 삼거는 적이 국경에 가까이 닥아올 때, 사거는 적이 국경을 침범할 때, 오거는 적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6. 서울의 풍수


- 자연을 인체와 같이 살아있고 그 속에 일정한 기운이 흐른다고 본다. 따라서 인체의 혈에 해당하는 곳이 명당이다.

명당을 찾아내는 4 가지 요소는 용(龍)이라 불리는 산의 능선과 기가 모이는 혈, 사(砂)라 불리는 주변의 산, 그리고 물이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가를 보고 형세를 판단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장풍득수(藏風得水)


- 內四山;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좌청룡은 낙산(111m), 우백호는 인왕산(338m), 案山은 남산(262m).

외사산은 조산(祖山)은 북한산(810m), 외청룡은 면목동 용마산(348m), 외백호는 행주의 덕양산(125m), 안산은 관악산(629m)


- 내수는 청계천이고 외수는 한강. 내수가 있어야 되는 이유는 내수가 명당 자리의 나쁜 기운을 모두 실어 외수 쪽으로 뽑아낸다.

청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모양이 태극과 같아 수태극(水太極)


7. 궁궐 배치


- 좌묘우사

종묘(宗廟), 사직단(社稷壇)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이 5궁

- 경복궁은 중국적인 규범에 맟추느라 평지에 대칭적으로 건설했는데, 창덕궁은 그런 것을 무시하고 산기슭에 올망졸망 예쁘게 지었다. 따라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평가되어 유네스코가 창덕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8. 조선신궁 자리


- 앞의 식물원 자리. 면적은 전체적으로 약 12만8천평으로 서울 역 앞 힐튼호텔에서부터 참배하려면 계단이 384 개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 1920년 착공하여 1925년에 완공. 일본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명치천황을 모셨던 신궁 따라서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중심.

- 일제 때 새해 첫날에는 신사 참배를 강요했고, 전차가 남대문 쪽을 지날 때는 차장이 승객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남산을 향해 묵념을 하게 했다.

일본인과 고위관리인 조선인만 이곳까지 접근할 수 있고, 나머지 조선인은 저 이래 백범관장이나 자유공원 자리에서 참배.

- 지금의 리라초등학교 건너 옛 KBS 자리에 서울만 관할하는 경성 신사가 있었다.


9. 안중근 의사 기념관


눈 여겨 볼 사항들은

- 안의사 유언; “나의 뼈를 하얼빈 공항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해다오---”

이에 따라 북한은 그동안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데 적극적인 태도였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북한에 살던 안 의사 조카 안우생에게 유해 발굴을 지시했다. 북한은 두 차례나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중국에 파견하였고, 1986년에는 김주석이  중국 뤼순 감옥을 방문해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사형 언도를 받은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

- 일본인 여순 감옥 간수 지바 도시치씨의 행적과 일본에 세워진 유묵 기념비.


문제점으로는

-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

- 천주교의 친일 행적; 안의사를 테러범이라고 신도명단에서 삭제.

- 안 의사를 기르고 파견한 러시아 교포 최재형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명 재형(在衡)·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최뻬찌까.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 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 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 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KBS1TV 2008년 3월1일(토) 20:10 한국사전 ‘3.1절 기획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편에 그의 일생이 소개되었음.


- 안의사 기념관 건립 계획

안 의사 기념관은 올 3월 착공해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일인 2010년 3월26일에 맞춰 준공할 계획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예산 120억원을 포함해서 모든 절차가 끝난 상태다. 당초 승인 계획보다 크게 설계돼 이것을 조정하는 일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기념관 건립위는 당초 승인 규모(건축 연면적 2400㎡)보다 두 배 이상 늘려 짓겠다는 계획이다. 건립위와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황인성)’는 30억원가량은 국민 모금을 통해 충당할 계획이며, 조선일보가 이 모금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다.


안 의사를 숭모하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안중근 기념관을 신축한다는 것은 숭모 사업을 통해 밥그릇을 만들겠다는 이권 사업이다. 친일파가 만든 단체와 친일 신문이 나서서 안 의사를 기리겠다고 하는 것은 역사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 기념관 건립을 주도하는 숭모회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63년 숭모회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지낸 윤치영씨는 친일파의 표본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윤씨는 침략 전쟁을 찬양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윤씨의 형제들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가 하면 일본군 기병중장을 지내기도 했다. 2대 숭모회 이은상 이사장은 친일파, 친독재세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일제시대 경제 침탈의 본부였던 조선은행의 간부를 지낸 백두진씨도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숭모회 이사장을 맡은 이들은 안 의사의 정신에 부합한다기보다는 권력의 양지만을 좇은 사람이 대다수다.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는 “안 의사의 정신과 아무 상관없는 친일파와 정치인이 숭모회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안 의사 기념관에 서 있는 동상마저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 김경승씨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숭모회 측은 “안 의사는 이념가가 아니고 평화주의자다. 안 의사가 숭모회 분들의 친일에 대해 이해해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 기념사업에 조선일보가 나선 것을 두고도 뒷말이 많다. 한 대학 교수는 “조선일보는 친일 행위에 대한 사과부터 해야 한다. 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안 의사를 추모하는 애국자인 양 나서서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언론으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안 의사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라고 말했다.(시사IN, 2008년3월29일, 제28호, 주진우 기자)


- 역대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인 윤치영, 이은상, 백두진과 동상 조각가인 김경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가 친일인명사정에 수록하기로 발표한 4,900명에 포함되었음


10. 백범 광장


- 백범 동상은 1969년에 세운 것인데, 그 앞에는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다.

밑에 돌로 만든 판액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 이시영 동상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6형제 중 5째.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김대중 정부 시절 국회의원 및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의 아버지는 이회영의 친손자임(3째 아들 이규한의 3째 아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귀감.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자,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당시 살던 집은 현 명동성당 자리에 있었음. 전 재산 가격은 현 시가 6백억원 이상) 1910년 12월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 5형제가 순국한다.

우당 기념관은 종로구 신교동에 있음(734-8851)


11. 남산공원


- 김유신 동상; 역시 1969년에 세워짐.


12. 남대문


-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

현재 남아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에 완성. 지금 건물은 세종 29년(1447년)에 고쳐 지은 것을 1961~1963년에 해체 수리한 것.

- 1962년 12월20일 국보1호로 지정. 소유자는 국유.

관리자는 서울 중구청이나 예산이 없다. 화재보험금액도 9,500만 원 짜리에 가입.

- 2008년 2월11일 새벽에 소실된 것을 200억 원의 예산으로 복원한다는 문화재청의 계획.


-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


-문화재보호법 제2호에 ‘문화재라 함은 인위적·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


- 1915년 일제가 돈의문, 소의문, 광희문 등을 헐어낼 때, 남대문과 동대문이 제외되어 살아 남게 된 이야기는, 당시 한성순보 사장이며 재조선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中井喜太郞가 당시 총독 하세가와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남대문은 가등청정이 동대문은 소서행장이 한양으로 입성한 유적이라는 것이었다(유근표 저 ‘성곽답사와 국토 기행‘에서).


- 숭례문 소실이 남긴 과제

하나, 문화재는 단순한 관광상품이 아니다. 문화재를 우습게 보는 천박한 개발주의, 식민주의 아래에서 이런 사고가 더 있을 것이다.

둘, 선진화는 사회발전이므로 경제성장 이전에 문화 선진화가 동반 되어야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 사람과 자연의 공생이 있어야 한다.

셋. 존재의식 속에는 공간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이 있는데, 시간의식이 길수록 존재의식이 굳건하고, 정체성이 굳건하다.


성재(省齋) 이시영 선생1869~1953) 자녀들의 어려운 살림이 월간 조선 2008년 5월호에 실림.


- 둘째 며느리 서차희(西且喜) 여사(99세, 이규열의 부인)는 수유리 소재 성재 선생의 묘소 아래 14평 움막집에서 소아마비의 막내딸 이재원의 수발을 받으며, 중병을 앓고 있는 3째 아들 이종문과 함께, 보훈처에서 주는 연금 월 80만원으로 살고 있다.


- 한국정부는 이시영 선생(1869~1953)을 국립묘지에 모시기를 거절하여 처음 정릉에 안장했다가 1964년에 수유리로 이장.

묘지 관리의 어려움으로 지금도 국립묘지 안장을 희망.

1962년에 건국장 추서.


- 성재 선생은 돌아가실 때 아무 유산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셨다. 지금 살고 있는 움막은 1976년 이민우 전 의원 어려운 가정 형편을 보고 당시 60만원을 기부하여 지었다.


- 1933년 남편 이규열(1905~1953)과 걸혼하고, 결혼 축의금을 몰래 숨겨상해로 밀항하여 임정 운영비로 내놓음.

남편 이규열은 상해영어학교를 나와 영국 전차회사에 입사하여 받는 월급으로 어렵게 아버지와 삼촌들까지 대가족을 부양하고 부인 서차희 여사는 임정에서 자원봉사함.


- 성재 선생은 초대 부통령으로 이 박사를 도와 건국에 힘쓰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정계 은퇴(당시 국방장관 신성모 사임을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1953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