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평화정책 2005-12-12   1398

[한반도평화보고서2005]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파병 그리고 한국사회

3장 평화와 정의,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1)

[##_1L|1085735088.jpg|width=”100″ height=”91″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1. 배경

한반도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냉전으로 인한 분단을 경험했고,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래 불안정한 정전체제가 지속되어온 냉전의 마지막 현장이다. 분단된 남한에 대해 미국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정당성 없는 역대 독재정권은 반공친미를 역설하며 ‘공산화된 한반도 북단에 대한 공포에 바탕을 둔 안보국가’를 구축해왔다.

한편,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 과정과 세계사적 탈냉전에 힘입어, 2000년 6월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일 군사위원장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르렀고, 남북간의 해빙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특히 9.11 사태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반도에서의 탈냉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했고, 민주화 이후 성장한 시민사회의 자주적 평화적 지향과 갈등을 빚었다. 특히 2002년 부시 행정부가 북한, 이란을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선제공격 가능성을 언급하고, 같은 해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문제를 제기하며 무력에 의한 해결가능성을 언급하게 되자 이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2002년 11월, 훈련중인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미군법정이 무죄로 평결한 데 대해 항의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이는 지난 50여년간 누적된 한미간 불평등 관계에 대한 정상화 요구이자 부시 행정부 이후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할말은 하겠다고 공약한 젊은 노무현 후보가 매우 불리한 환경을 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2년 가을부터 구체화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준비와 한국에 대한 파병요청은 전환기를 맞고 있는 한국사회를 매우 중대한 선택의 길로 내몰았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2003년 봄, 한반도 남단에는 한미동맹에 감사해왔고 미국의 파병 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해 본적 없는 친미 안보국가로서의 대한민국과, 미국에 할말을 해야 한다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탈냉전 평화지향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듯 ‘두 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은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심각한 위기감 앞에서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에 답해야 했다.

2. 이라크 전쟁과 점령에 대한 한국정부의 협력

2-1) 한국의 선택 – 한국군 파병 개괄

주지하듯이 노무현 정부는 대선 당시의 강력한 독립적 주장과는 달리 파병을 선택했다.

1차 파병은 2003. 5월에 이루어졌다. 의무부대, 공병부대로 구성된 650영 가량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정부는 3월 20일 이라크 침공이 이루어진 다음날 이라크 파병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는 단 11일만인 4월 2일(찬성 179 반대 68) 이에 동의했다.

2003년 9월 정부는 미국의 추가파병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고 10월 20일 추가파병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2003년 12월 26일 3000여명 규모의 ‘재건지원’부대 추가파병을 결정했고 국회는 2004년 2월 13일, 이에 동의(찬성 155, 반대 50)했다. 재건지원부대는 특전사, 해병대등 전투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의구심을 자아냈으나 정부는 한사코 전투에 참여하거나 치안업무를 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회 동의 직후 치루어진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파병재검토 제안이 쟁점화되었다.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 존재와 후세인과 테러세력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미국의 정보실패, △아부 그라이부 및 관타나모에서의 고문 폭행, △팔루자 학살 등 이라크 점령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사건이 이어지고 이라크 정세의 불안정성이 증대된 데 따른 것이다. 새 국회의원 당선자 89명이 파병재검토 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문서에 서명하였다.

2004년 6월 이라크에 진출하여 미군용품을 납품하는 계약을 이행하던 기독교 계열 회사의 직원 김선일씨가 무장저항세력에 의해 피납,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새 국회는 집권당과 제1야당의 합의하에 재검토 안건을 다루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재검토 서명자 89명 중 재검토 결의안 제출에 동참한 의원은 5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결의안은 검토되지 않았다.

정부는 동년 8월-11월 동안 1차 파병부대와 추가파병부대를 포함하는 3500여명을 단계적으로 이라크 북부 아르빌로 파견하였다. 국회는 이 부대의 파견기간을 1년 이상 연장하는 동의안을 12월 31일 처리하였다.

2005년 11월 21일 국무회의는 현재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하는 3300명 규모의 한국군 부대 – 자이툰 부대를 1000명 감축하되 파견기간을 1년 더 연장하는 연장 동의안을 가결하여 11월 23일 국회에 제출한 상태이다. 한편, 30명의 국회의원들이 지난 7월 제출한 자이툰 부대 철군 결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2-2 한국정부의 파병논리

미국에게 할말은 하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결정 전 후 몇가지 근거를 밝힘으로써 파병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 했다. 국회 내 원내교섭단체(집권당과 제1야당)의 논거도 다르지 않다. 그 주장의 대강과 이에 대한 파병반대론자들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1) 불가피론 : 한반도 전쟁방지를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파병을 통해 미국에 협력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이나 긴장고조행위에 협상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정부는 이를 ‘평화를 위한 실용외교’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의 핵개발 의혹에 대한 압박과 한국의 이라크 파병을 연관지어 검토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은 매우 더디게 진전되었고 미국의 대북적대정책도 결코 완화되지 않았다. 특히 한국이 김선일 씨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3000명이나 되는 대규모 부대를 추가 파병한 2004년 내내 북핵 문제는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았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외교적 해법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미국 내 여론은 파병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라크 점령상황의 악화로 미국 내에서 군사적 옵션 대신 외교적 해법을 선호하는 여론이 증대되는 과정에서 힘을 얻었다. 2005년 9월 6자간 합의성명이 발표되어 북핵위기는 일단 대화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6자합의 성명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서의 미군 사망자 급증과 이라크 전쟁대응으로 인한 카트리나(허리케인) 방재 실패 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파병정책은 오히려 부시의 선제공격 독트린을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무장갈등 위험을 높이는데 일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경제적 국익론

정부와 국회는 이라크 파병으로 경제적 특수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파병과 연결된 직접적 특수는 사실상 없었다. 이라크 파병과 안정적인 원유수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이라크 점령과 이로 인해 지속되는 무장갈등으로 인한 원유가 상승으로 한국의 안정적인 원유수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추가 파병 결정 이후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피랍 살해되는 등 한국인이 저항세력의 표적이 되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정부는 기업인은 물론 심지어 기자들까지도 이라크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도 높은 이라크 입출입 통제조치를 입안, 시행하고 있다. 이로써 이라크 재건 특수는 실질적인 가능성이 없는 것은 물론, 최소한의 접근 가능성마저 봉쇄되었다. 이라크 파병은 역설적으로 경제적 접근마저 봉쇄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국익’을 내세웠으나 김선일 사건과 그 이후에도 지속되는 각종 공격 위협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 전체를 폭력의 악순환 속에 연루시켰다. 이로 인해 앞으로 발생할 정신적 물질적 비용은 계량하기 힘들다.

3) 한미동맹론

정부와 국회, 주류 언론은 경제적 실리론이 설득력을 잃게 되자 한미동맹의 공고화야말로 총체적 국익이라고 설득했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논리가 과거 독재정부의 그것으로 회귀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파병을 거부하면 한미동맹이 균열되고, 결국 경제적 군사적으로 심각한 위기가 조성될 것이라고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으로 이라크 파병을 거절한 각 나라의 실제사례들은 이들 나라들과 미국과의 갈등이 ‘일시적 갈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한국이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여 이슬람 사회와 무장갈등을 빚을 경우 한국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 알카에다 테러 이후 주식가격이 폭락했다가 철군 이후 완만히 회복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부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았다. 정부가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그릇된 현실인식을 주입하고, 이율배반과 기회주의를 강요하며, 맹목적 선택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협박하는 과정에서 민주사회의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인 ‘의사결정과정의 합리성과 민주성’이 심각히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파병과정에서 정부는 ‘국익’을 강변하고 한미동맹을 신성시 하면서 합리적 토론의 여지를 봉쇄했다.

4) 국제사회와의 약속론 :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

정부는 김선일 씨 피랍살해 사건 이후, “테러의 위협에 굴복할 수 없고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며 파병을 강행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미국의 거짓명분에 기초한 일방적 침략에 동참한 것이야말로 국가테러에 굴복한 것이다. 다국적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대다수 이라크인들은 한국이 미국의 폭력에 굴복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침략에 동조한 데서 발생한 저항세력의 공격위협에 대해 테러방지법 개정, 반한외국인 추방, 보도통제 등 민주주의의 후퇴를 통해 해결하려 했고 이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불신과 차별,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의 후퇴, 국가기구의 비정상적 강화와 개입 등 ‘민주사회의 정체성’에 간과할 수 없는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야말로 폭력에 굴복해 민주사회의 핵심가치를 포기한 것이다.

5) 재건지원을 위한 파병론

정부는 파병의 명분으로 재건지원을 위한 파병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이 이라크에서 평화정착의 지원자가 아닌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과 점령이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했다는 평가도 새로운 평가는 아니다. 특히 한국은 오무전기 피격 사건, 김선일 사건, 기타 알카에다의 공격 경고 등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동조하고 국민 전체가 원치 않는 폭력의 악순환에 연루되게 된 대표적 사례다.

저항세력 공격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해 한국군은 아르빌 등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재건지원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자이툰 부대의 재건지원활동은 ‘그린 엔젤 작전 – 이른바 친화작전으로 태권도 시범, 간이 이발소 운영, 자동차 수리, 이동진료 등을 위해 지역을 순회 – 등 몇몇 과시성 이벤트에 머물고 있다. 자이툰 부대의 재건지원 예산은 연 170-180억 규모라고 발표되고 있는데 이는 자이툰 부대의 한해 주둔경비 1600-1800억의 1/10에 불과한 것이며 이 마저도 어디에 쓰이고 있는 지 그 결산내역이 정확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2-3 파병과정의 절차적 문제점

1) 헌법 위반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라크에 대한 불법적 전쟁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올바르다. 그러나 정부는 헌법 제5조 1항을 파병동의안의 근거조항으로 인용했다.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위헌소송에 대해 “일반 시민에겐 원고자격이 없고 파병 결정은 통치자의 재량행위”라는 이유로 각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부가 이라크 파견 동의안에는 파병의 근거법령으로 헌법 제 5조 1항이 명시되어 있다.

2) 전쟁의 윤리성에 대한 함구

한국정부는 시민사회단체의 숱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의 근거나 명분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미국 상원정보위보고서나 듀얼퍼보고서, 영국의 버틀러 보고서에 대해서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에서의 불법구금과 고문, 팔루자와 라마디 등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정부는 우리는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며 ‘재건지원’을 위해 파병했다고 강변하면서, 전쟁의 원인과 그로 인한 이라크인들의 불행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3) 일방적 정책결정과 토론 배제

정부는 1차 2차 파병결정 과정에서 시민사회 내 충분한 토론의 시간적 여유와 여론수렴 공간을 제공하지 않았다. 정부는 항상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말했지만 시민들은 언제나 정부가 미국에 파병방침을 통고한 이후에 정부의 파병결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부와 국회는 공청회 등 필수적인 여론수렴 없이 “파병이 국익에 합치된다”고 결론 내렸다. 가장 중대한 문제점은 파병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이 도무지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4년 2월의 추가파병 의결을 포함한 2번의 국회 본회의 표결은 찬성 발언 없이 반대발언만 청취한 후 표결에 임했고 각각 정원 273명 중 찬성 155 : 반대 50(16대 국회,2004 2월), 정원 299명 중 찬성 161 : 반대 63: 기권 54 (17대국회, 2004.12.31)의 압도적인 수자로 파병을 승인했다. 요컨대 찬성의원들은 비겁했다.

4) 정보왜곡 또는 정보실패

정부는 1차 파병, 추가 파병, 파병연장 전 과정에서 국민과 국회를 상대로 “이라크 상황은 곧 안정화될 것, 이라크인은 한국군을 반길 것”이라는 조사 없는 주관적인 보고로 일관하였다. 재건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변하기 위한 의도였다. 국회는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일부 의원들의 청문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2004년 2월 이라크 키르쿠크를 방문한 정부조사단과 국회조사단은 키르쿠크가 비교적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당시 키르쿠크는 저항이 가장 활발한 지역의 하나였고 종종갈등도 심각한 지역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특히 세계적인 유전지대인 이 지역은 연방제를 규정한 이라크 헌법 논의과정에서 자치경계 설정을 둘러싼 가장 예민한 갈등의 진원지이다.

재건지원 실적 역시 과장되었다. 재건지원 실적을 그럴듯하게 홍보하기 위해 졸속으로 작성된 약식보고서들은 정작 보고해야할 세부 지원내역은 감추는 대신 정확성 없는 서로 다른 통계치들을 나열하고 있다.

5) 정보통제

정부는 논란이 많았던 추가파병(자이툰) 이후 현지에서의 취재를 체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정부는 이라크 정부에 협조요청을 하여 취재기자들의 이라크 비자발급을 제한하고 있으며, 영내 취재조차 장기 취재를 제한하고 군에 의해 기획된 단기간의 ‘배달의 기수’ 식 취재만을 허용하고 있다.

현재 이라크는 국제뉴스의 중심이며, AP, BBC 등 미영의 기자들은 종군취재(Imbed 방식) 외에도 바그다드, 모술 등지에서 직접 취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취재활동은 그들 나라 국민 또는 기자가 납치되는 과정에서도 한번도 중단된 바 없다. 한국은 세계 3위의 파병 국가임에도 이라크에 단 한명의 취재기자도 파견되지 않는 상태이다.

6) 조기경보 체계의 부재

정부의 1차 이라크 조사단 내 민간조사요원(박건영 교수)이 “이라크 파병지 상황이 안전하지 않다”고 보고한 이후 모든 정부조사단에서 ‘독립적인 민간조사요원’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1차 파병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이라크 내 한국인에 대한 총격 사건과 피랍사건이 이어졌지만 이를 예방할 대책은 시행되지 않았다.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피랍된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가 피랍된 지 2주 이상 지난 뒤였고, 피랍사실은 정부가 알게 된 지 하루 만에 살해당하였다. 정부는 김씨의 피랍여부를 묻는 외신의 문의를 간과했고, 협상대상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의 죽음을 방치했다.

또한 정부는 자이툰 부대 내의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정보은폐와 조작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기 전날인 12월 7일 자이툰 부대에 함게 근무하던 쿠르드 민병대원이 오발사건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으나, 군은 은폐하여 수개월 뒤에나 기자의 추적에 못이겨 인정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다국적군의 철군 관련한 정보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3.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

3-1 한국 시민사회조직들의 파병반대운동

1차 파병 당시 활동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이라크 현지에 달려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한 이라크 평화팀의 활동, 한국 내에서 파병에 반대한 시민사회조직간 연대집회가 그것이다.

한편, 정부가 2003년 9월 초 미국의 추가파병요청사실을 공개하자, 9월 23일 전국의 351개 시민사회조직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하 파병반대국민행동)을 결성하여 이 기구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파병반대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3-2 주된 활동 수단

1) 릴레이 반전선언과 촛불집회

촛불집회 : 2002년 미군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일반화된 촛불집회가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반전선언릴레이 : 노동조합, 시민운동가, 문화예술인, 법조인, 연구자, 학생 등 각계각층의 반전선언과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기타 온-오프라인에서의 시민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2) 이라크 현장 활동

이라크 평화팀 : 이라크 전쟁 전 후 시민운동가, 학생, 의사, 행위예술가, 작가, 주부, 국회의원 등 다양한 자발적 시민들이 이라크로 향했다.

점령감시 파병감시 : 이들은 미국의 침공 작전 개시 직전까지 현지인들과 함께 반전평화 캠페인을 전개했고, 전쟁 개전 이후에는 전쟁의 참상과 점령군의 부당한 행위를 모니터하여 국내로 이를 전하였다. 현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평화운동가 윤정은 씨의 2004년 4월 팔루자 보고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김선일 참수사건으로 이라크에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해지기까지 모니터링 활동을 지속했다.

3) 정책적 법률적 대응

정책모니터링 그룹 :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과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을 감시, 견제하기 위해 시민활동가와 연구자, 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정책 모니터링 그룹을 형성하여 정부와 국회에 대한 반전평화로비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2005년 1월 이후 10여명의 평화활동가들이 이라크모니터팀을 형성 주례 이라크모니터 보고서를 발표해오고 있다.

시민정책보고서 : 정책 모니터링 그룹은 주요 계기마다 파병의 부당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다룬 자료집과 의견서를 작성하여 정부와 국회에 전달하였다. 또한 이라크로 출발하는 정부 조사단에 현지상황에 대한 시민보고서를 제공하여 객관적 보고서 작성을 압박하였다. 대표적인 정책보고서로는 2003년 10월, 2005년 11월에 발간한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250p), 이라크 파병연장반대의 논리(300p)가 있다.

헌법소원 : 한국군 파병의 위헌을 묻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위헌소송에 대해 “일반 시민에겐 원고자격이 없고 파병 결정은 통치자의 재량행위”라는 이유로 각하했다.

4) 국회의원들과에 대한 압력과 협력

반전평화의원그룹 : 시민사회조직 대표들과 의회 내 파병반대 의원들과의 주기적인 간담회를 통해 ‘반전반전평화 의원그룹(50-60명)’을 형성하여 유기적으로 협력하였다. 이들은 원내전략에 대해 시민사회조직과 협의하였고 파병재검토 결의안을 공동으로 성안하였다. 2004년 6월 여야의원 50명은 ‘이라크 추가파병 반대 및 재검토 결의안’을 발의하였고, 2005년 7월에는 30명의 의원이 ‘자이툰부대 철군 결의안’의 발의하였다. 2004년 6월의 결의안은 2004년 8월의 자이툰 부대 파견으로 사실상 파기되었고, 2005년 7월의 결의안은 국방위원회에서는 부결되었으나 현재 본회의에 회부되어 있다.

파병찬성의원블랙리스트 : 시민사회조직들은 국회 모니터링 결과를 바탕으로 파병에 찬성한 의원들의 명단을 선거 시기에 공개하고 낙선을 촉구하였다.

5) 전범민중재판과 국제협력

전범민중재판 : 자카르타 합의에 따라 부시, 블레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민중전범재판을 2004년 12월 초에 진행하였다. 이 재판에는 미국 시민, 이라크 시민, 이라크 내에서 피살된 회사의 직원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고 약 4000명이 기소인으로 동참했다.

국제반전공동행동 : 자카르타, 뭄바이, 베이루트 등에서 적극 결합하였고 3.20국제반전공동행동 등 주요한 국제공동행동의 날 집회를 서울과 주요도시에서 개최하였다. 일본, 터어키 등과 파병반대 공동집회를 기획하고 주요 집회에 연사를 교환했다.

지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파병반대운동은 한반도라는 좁은 틀을 넘어서야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교훈을 준 운동이었고, 한국 시민사회에 국경을 넘어서는 평화행동을 뿌리내리는데 크게 기여한 최초의 대중적 반전평화운동이다.

4. 이라크 철군행렬과 한국의 파병재연장

한국 파병반대운동은 정부와 국회의 이라크 파병을 만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파병운동 기간 동안 파병 찬반여론은 각각 50% 수준으로 고정되었으나 50%의 반대여론도 적극적으로 행동화되지 않았다. 이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 내 반대여론이 90%에 육박하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최근의 여론조사 역시 53% 정도가 철군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강력한 철군여론으로 형성되지는 않고 있다.

이 편차는 북미 핵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한미동맹 균열이 가져올 손실에 대한 우려 등이 작용한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또한 편차는 한국 시민사회가 국경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위해 연대하는데 익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민주주의적 선택이 갖는 힘과 호소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라크 침공이 일어난 지 2년 8개월이 지났다.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지도 2년 7개월을 맞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부시와 블레어, 그리고 이른바 ‘의지의 동맹국가’들의 패권적 야망에 따라 거짓명분을 내세운 선제공격으로 도발되었지만,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라크는 힘에 대한 고정관념, 현실 혹은 실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바꾸어 놓고 있다.

1) 철군 도미노

이라크는 예상대로 제2의 베트남으로 되었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라크는 현재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총선을 앞두고 있지만 계속되는 저항과 점령군에 대한 불신, 그리고 미군 등 다국적군이 점령한 이래 심화된 정치세력간 종족 간 갈등으로 인해 이라크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라크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다국적군이 이라크 재건과 평화를 돕는다는 이유로 계속 주둔하는 것은 도리어 이라크에 무장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극단주의의 발호를 돕는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이라크 내부의 무장갈등의 원인제공자는 다름 아닌 다국적군 자신인 것이다. 자이툰 부대 역시 내세웠던 ‘재건지원’과는 상관없는 사실상의 ‘칩거‘수준의 주둔을 지속하면서 미군을 돕는 정치군사적 후비대로서 존재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내의 시민사회도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 사망자 가 2000명을 넘어서게 되자 의회 역시 구체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과 영국 내에서는 철수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다국적군에 참여한 다른 나라 군대들의 철군 행렬 역시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나라들은 대체로 올해 말과 내년 중 철수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정부가 1000명을 감축하다 하더라도 내년에 이라크에는 미국과 영국군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군대 수와 맞먹는 수의 한국군이 주둔하게 된다.

2) 파병연장 – 근시안적 실리추구의 파산, 그러나 반복되는 오류

그러나 유일하게 한국정부나 의회만은 철군이나 철군시한에 대한 논의를 주저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제출한 파병재연장 방침은 일부를 감축하는 대신 장기주둔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게다가 아르빌 내의 유엔시설에 대한 경계업무까지 임무를 확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설경계 업무는 애초 자이툰 부대의 임무규정에는 없던 새로운 임무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정부와 의회가 이미 자명해진 이라크의 진실과 국제사회의 동향을 한사코 외면하고 있고 심지어 감추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국회와 언론은 명분 없는 파병을 강행한 후 보도통제와 정보통제, 문제에 대한 토론과 검증의 회피 등 현실도피적 정책으로 일관해왔고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그 결과 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이라크에서 멀어지게 하는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더욱 가치를 발하기 시작한 역동적 민주주의를 저당 잡히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이미 현실성을 상실한 낡은 현실주의, 이미 불가능한 것이 판명된 낡은 실리주의의 덫에 갇혀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진 늪보다 더욱 고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3) 민주주의와 보편적 정의의 추구 속에서 한반도 평화의 길 찾아야

파병재연장 동의안은 현재의 여론이나 국회의 조건으로 비추어 볼 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적 선제공격에 맞서는 반전평화를 위한 도덕적 선제공격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갈파한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주장대로 냉전시대의 패배적 사고가 강요하는 편협한 이기심과 공포의 논리에 맞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라크 파병 3년은 국경을 넘어 보편적 가치를 지행할 때, 한국사회의 평화도 보장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파병반대운동은 더 이상 현실성을 상실한 낡은 현실주의, 국경에 갇힌 오도된 실리주의로부터 한국사회를 구하고 미래 대한민국의 민주적, 평화지향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운동이다.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 정책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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