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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14.06.11
  • 727

[경제 민주화 워치]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론'에 담긴 함의

황혜란 대전발전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추격시스템의 한계와 시스템 위기

곳곳에서 사회경제 시스템의 위기를 알리는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양극화와 청년실업,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참사까지. 대한민국호가 가라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온 국민이 느끼고 있다. 물론 위기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 수준의 경제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희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우리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추격국가. 지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 경제의 틀 안에서 빠른 추격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해 왔다. 추격시스템은 성공적으로 작동하여 우리는 산업화 과정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지난 50여 년간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하였다. 성공한 경제시스템은 사회 구성원의 행동을 지배하는 룰을 확립하고 사회전반의 시스템으로 확산되어 왔다. 추격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힘은 시간의 압축이다. 따라잡기 위한 긴 노동시간, 빠른 성과를 위한 자원의 집중,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수직적 위계와 같은 것들이 추격시스템을 떠받치는 중요한 원리로 작동하였다. 추격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대기업과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와 같이 자본집약적인 몇몇 전략산업 분야의 약진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회-경제 시스템은 그 잠재력이 소진되었을 때 성공의 크기만큼 큰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시간의 압축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메카니즘이 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에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시간을 압축하여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한국의 추격 시스템은 많은 것을 간과하거나 희생해 왔다. 자원부족을 극복하고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도입된 중요한 경제원리 중 하나였던 ‘선택과 집중’은 경제 및 혁신주체의 다양성 소실을 초래했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수직적 위계 구조는 수평적 협력과 다양한 사회 이해관계자간의 숙의구조의 기반을 훼손하였다. 또한 수출시장에의 전략적 집중은 선진국에서 이미 성숙되어 잘 정의된 수요를 기반으로 생산효율성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혁신능력의 축적을 방해하였다. 

사회의 하위 시스템 중 한 부문에서 큰 성과를 경험하면 동일한 시스템 원리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 정착된다. 추격형 기술-경제 시스템의 원리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작동원리로 정착하였다. 또한 추격에 적합하게 적응된 시스템은 내부 구성원의 의식과 행위 또한 지배한다. 우리 사회의 빨리빨리 신드롬과 승자독식, 성장지상주의, 개방과 융·복합 난망, 협력과 통합 실종 등의 문화와 행위패턴은 상당부분 추격 관성에 길들여진 구성원들의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연구개발과 기술혁신의 영역에서도 동일한 작동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수월성에 기반한 연구개발 자원집중, 대규모 국가연구개발사업을 통한 자원배분, 기술공급중심적 기획 관행, 연구개발자의 긴 노동시간 등은 한국 혁신체제가 작동하는 기본적인 원리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쫓아갈 정답이 없는 추격 이후 시기에는 이러한 연구 및 기술개발 관행이 대규모 실패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추격시스템은 환경변화를 맞아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경제주체간 수평적 협력을 통한 혁신생태계로의 진화로 인해 개방과 협력을 기반으로 한 혁신환경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직계열화한 기업구조와 기술집약형 독립 중소기업군의 미흡은 혁신생태계 형성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국내 수준에서는 추격을 통한 성장잠재력의 축소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규모와 효율 증대를 통한 학습효과가 현저히 저하되고 추격기의 양적 성장을 통해 성장한 중산층의 몰락이 목도되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이 지속됨에 따라 양극화와 청년실업이 지속되고 있다. 연구개발 현장에서도 연구개발비 투입 대비 경제적 효과 및 지식 산출 효과는 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과 혁신은 추격시스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라는 문제 제기 자체가 실종되었었다. 추격시스템의 성장 잠재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이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과학기술과 혁신인가 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론

기후변화, 자원고갈, 양극화, 고령화 등 글로벌 수준에서 거대한 도전(Grand challenge)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사회혁신, 지속가능한 경제체제 등 사회-경제 환경의 전환을 예감하는 논의들이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작금의 문제들이 단기적인 정책 처방이나 시스템 개선에 의해 해결되기 보다는 전반적인 사회-경제-기술시스템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기술시스템 전환론 (Socio-technical Transition) 또한 과학기술과 혁신 영역에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등장한 논의이다. 우리가 접하는 사회문제가 현재 사회·기술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에서 유래한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기술과 활동방식, 하부구조, 시장으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기술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기술전환론은 현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현재의 시스템은 시스템 수준에서 문제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분 개선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시스템 전환은 세계화의 진전에 따른 양극화 심화, 고령화, 기후변화 심화, 에너지 자원 고갈 등의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새로운 사회・기술시스템 형성 주체(니치에서 활동하는 혁신주체)들이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기존 사회・기술레짐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기술시스템을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을 정책 기조로 삼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지속가능성 교통시스템 전환,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 지속가능한 농업 전환 등 현재 대량생산 시스템 하의 에너지, 교통, 식품 등의 시스템을 지속가능한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과학기술과 혁신이 추구해야할 가치와 지향성을 전면적으로 재해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보건의료와 관련된 삶의 질 제고문제, 복지 관련 지출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치료 중심의 보건의료 시스템에서 예방 중심의 보건의료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다소비 시스템을 신재생 에너지 중심의 저소비형 에너지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때문에 사회・기술전환론은 에너지 정책, 보건의료시스템 정책, 농업시스템 정책 등 다양한 실천 분야와 연계를 맺으며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최근에는 사회경제적 전환과 지속가능한 도시 및 지역 개발 등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탈추격(Post catch-up)으로의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론이 우리의 과학기술계에 던지는 함의는 명확하다. 경제성장을 위한 과학기술, 과학자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기술, 시민과 사용자를 위한 과학기술과 혁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고에너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스템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우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면 기존 지식의 모방, 성장지상주의를 위해 봉사했던 추격형 시스템을 지식과 혁신주체의 다양성의 창출,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개발, 사용자와 시민을 고려한 연구개발과 확산 시스템의 설계 등 탈추격형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식은 많은 경우 특수한 지역적, 시간적 맥락 하에서 생산된다. 창조는 기존의 문제를 빨리 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설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지식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시민의 삶과 국민들의 문제에서부터 정의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기술적 새로움과 새로운 과학지식이 탄생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안테나가 선진국의 과학기술, 노벨상, 자원배분자인 중앙정부의 이해로부터 방향을 틀어 시민, 사용자, 사회로 돌아설 때 오히려 우리 안의 ‘창조’가 꽃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GE 헬스케어의 인도 현지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인도의 경제-사회적, 문화적 토양에 맞는 심전도기기가 전 세계 시장으로 팔려나가는 ‘역혁신(reverse innovation)’은 이러한 가능성들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다. 

위기는 파국으로 귀결되기 보다는 항상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진화는 위기 후에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 혹은 시스템이 출현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스템의 쇠락에 따른 위기 발생 후에는 항상 사회-경제 시스템의 재구성 필요성과 사회적 저항이 뒤따른다. 경제와 혁신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면서 낡은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초기 선구자들이 출현한다.  

진화론의 지혜는 위기는 변화과정에 필수적이며, 위기를 통해 돌연변이와 선택 압력이 나타난다고 말해주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직선의 성장일변도 추격국가를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린 시도들이 필요하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환경변화와 시스템 위기 속에서 어떤 돌연변이가 살아남아 선택압력을 받게 될지는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열려있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획과 시도 속에서 새로운 사회시스템이 형성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 본 기고글은 필자가 <프레시안>의 '경제민주화워치' 칼럼에 게재한 것입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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