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센터 칼럼(ef) 2013-08-28   484

[기고] 박근혜, 입으론 ‘경제 민주화’ 실제론 ‘MB 계승’?

[경제 민주화 워치] <6> 경제 민주화와 노동 시민권

이병훈 중앙대 교수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여야 후보 모두 핵심 공약으로 앞다투어 내세웠던 경제 민주화의 개혁 과제가 새 정부의 출범 즈음에는 흐지부지되는가 싶더니, 남양유업 등의 갑을 관계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동안 세간의 뜨거운 감자로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남양유업 사태는 새롭게 터져 나온 또 다른 사건들에 떠밀리긴 하였지만, 경제 민주화의 대상이 단지 재벌 개혁이라는 특정 이슈로 국한되기보다는 우리 경제 곳곳에 고착화되어 있는 갑을 간의 불평등한 거래 관행을 온 세상에 밝혀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이번 사태를 야기한 일부 업계를 대상으로 관련 법령의 재개정과 해당 업체들의 그릇된 관행 개선이 이뤄지는 성과를 낳기도 하였다.


경제 민주주의라 하면, 경제 활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의 생산과 분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으며 상호 간에 대등한 거래 관계를 이뤄가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민주화가 이토록 강조되는 이유는 우리 현실에서 경제 주체들 간의 거래 행위가 대등하게 이뤄지기보다 어느 일방이 다른 거래 상대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일이 광범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경제 민주화의 주된 개혁 대상이 되어온 재벌 문제나 이번에 공론화된 갑의 횡포 모두 그들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독점적 또는 지배적인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부당하게 대다수의 경제 약자, 즉 을들에게 정당한 몫을 보장하기보다 자신만의 수익으로 독식하고 있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 결과, 우리 경제에서 낙수 효과는 사라지고 사회적 양극화과 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 경제에서 재벌-대기업의 권력 독점이 너무나 지나쳐 다른 경제 주체들이 노예처럼 취급되는 현실이 구조화됨에 따라 경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폭넓게 이뤄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경제 민주화 논의에서 잊힌 영역, 노동 현장

그런데, 우리 경제의 민주화를 논의하면서 손쉽게 잊고 있는 영역이 있으니, 다름 아닌 노동 현장이 그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경제 민주화의 당위성이 제대로 구현된 것이 바로 노동 시민권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동력이 여느 상품처럼 거래되는 자본주의 노동 시장에서는 노동자의 지위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조건이 작용하고 있다. 즉, 노동력을 팔아야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자본을 가진 사용자에게 의존하는 비대칭적인 교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자본가들이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약자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였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착취는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을 낳았고, 심지어는 러시아혁명에서와 같이 노동자 계급의 체제 전복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을 거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계급 혁명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자본 측의 전략적 양보로 이뤄진 것이 노동 시민권의 제도화이다. 구체적으로, 단결·단체교섭·단체행동의 노동3권과 여러 노동자 보호 제도가 마련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과 자본의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대등하게 만들려는 핵심적인 경제 민주화의 제도적 기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 시민권의 현실은 어떠한가? 친기업 정부로 자처한 이명박 정권의 5년은 노동자들에게 참으로 잔인하고 가혹한 세월이었다. MB 정권이 개발, 경쟁력, 경제 위기를 명분 삼아 임기 5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 굵직한 사건들만 돌아봐도, 2009년 벽두의 용산참사, 같은 해 뜨거운 여름날에 자행된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와 폭력 진압, 2011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사태와 유성기업의 ‘용역 깡패’ 폭력 사건, 그리고 임기 말에 밝혀진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공작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사건을 통해 정부의 공권력이 노동자들의 처절한 생존권 요구에 아랑곳없이 기업 편들기를 하거나 그들의 노동 탄압을 방조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또한, MB 정부는 2009년 봄에 비정규직 100만 실업 대란설을 내세우며 비정규 보호법의 규제 완화를 시도하려다 실패하였으며, 2010년 초에는 복수노조-전임자의 일방적 법 개악을 강행하여 사용자의 노조 무력화에 매우 유리한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글로벌 기업인 현대차와 삼성전자는 각각 사내 하청의 불법 파견과 직업병 산재 인정에 대한 사법적 판정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기보다는 ‘재벌 권력’답게 노동자들의 정당한 문제 해결 요구를 철저히 무시-묵살하는 무소불위의 재벌 공화국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반노동 MB 시대는 갔건만…

노동자들에게 무척 암울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친기업-반노동의 MB 시대가 마감하였지만, 크게 훼손된 노동 시민권을 되살리려는 조짐은 보이질 않는다. 보수 재집권에 성공한 박근혜 정부는 국민 행복의 새로운 희망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국정 비전을 제시하면서 70% 고용률을 위한 일자리 늘리기에 매진할 뿐 후퇴한 노동 시민권을 복원-강화하려는 정책 의지를 전연 보이질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대선 국면에서 공약하였던 쌍용차 사태 국정조사가 박근혜 정부 들어 불발하였으며, 공무원노조의 합법화가 무산되고 오히려 전교조의 합법적 지위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현대차 불법 파견, 삼성전자의 백혈병 산재 불인정, 유성기업 등에서 이뤄진 노조 파괴 공작, 특수고용직 노동권 불인정과 같이 해당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묵은’ 숙제들이 해결될 기미 없이 그대로 답답하게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차별과 배제의 상징이 되어온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현 정부로부터 어떠한 정책 해법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여소야대’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구성되어 뭔가 기대를 부풀게 하였지만, 그동안 말만 무성할 뿐 노동 현안의 해결이나 제도 개선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시민권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할 노동조합 운동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으며, 그동안 산별노조 운동으로 형식적인 조직 전환을 이루기는 하였으나 대기업 지부들의 조합원 실리주의에 가로막혀 비정규직이나 중소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시민권 개선에 힘 있는 역할을 기대만큼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막강한 재벌-대기업의 시장 권력, 경제 성장 담론을 추종하는 보수 정부, 그리고 무능한 정치권 등으로 켜켜이 가로막혀 노동 시민권이 개선되기는커녕 뒷걸음질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불안스럽고 힘들어지고 있다.

경제 민주화 위해선 노조 운동 재활성화 반드시 필요

문제는 노동 시민권을 훼손하려는 시장과 국가의 권력 집단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보호해야 할 노동조합 운동이 예전의 힘을 잃고 효과적으로 대응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운동의 침체는 다양한 원인들이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내부 분열과 기득권의 덫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현재 노동조합 운동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운동의 시대적인 의의와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 운동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대다수 약자인 노동자를 대표하여 그들의 노동 시민권을 유지-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직 노동의 결집된 힘에 기반을 두어야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제대로 성취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노동조합 운동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과 질타의 목소리가 앞섰지만, 노조 운동의 부활 없이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사회-경제적 발전이 가능치 않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운동이 다시금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노조 내부에서 무엇 때문에 그동안 운동이 침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자성과 더불어 분열과 현실 안주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노동조합 운동의 부활에 애정 어린 성원과 연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권력 불균등을 바로잡으려는 경제 민주화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노조 운동의 재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본 기고글은 필자가 <프레시안>의 ‘경제민주화워치’ 칼럼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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