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센터 칼럼(ef) 2013-09-24   591

[기고] 박근혜가 ‘경제 민주화 거의 끝’ 선언한 진짜 이유

[경제 민주화 워치] <9> 경제 민주화의 두 가지 버전

홍장표 부경대학교 교수

지난 대선 새누리당의 10대 핵심 공약 가운데 경제 민주화는 우선순위가 가장 앞선 공약이었다. 새누리당은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 질서를 확립해 대기업 중심의 경제를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가 동반 발전하는 경제 시스템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7일 만인 지난해 12월 26일, 박 대통령은 전경련에 앞서 중소기업중앙회와 소상공인단체연합회를 방문해 “경제가 살려면 중소기업이 잘돼야 한다. 중산층 70% 복원 약속도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이 중심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 4월 경제 민주화 입법에서 박 대통령은 여야가 한창 논의 중이던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법안에 대해 “내 공약 내용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속도 조절론을 들고나왔다. 7월에 와서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 주요 법안들이 국회에서 통과돼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재벌 총수들 앞에서 “투자하는 분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까지 했다.

당선인 시절 박 대통령의 발언과 7월 이후의 발언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차이를 두고 두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가 애초부터 공약을 제대로 이행할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에서 경제 활성화로 바뀌는데 채 7개월이 걸리지 않은 데에서 이런 해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은 애초에는 진정성을 가지고 공약했지만 이후 대기업의 거센 반발과 로비에 부딪쳐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집단소송제, 금융 회사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 등 박 대통령이 내건 공약에서도 뚜렷한 후퇴의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두 해석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뭔가 부족해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경제 민주화란 도대체 무얼까? 사실 경제 민주화란 일반 시민들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경제력 집중의 억제와 경제 양극화 해소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재벌 개혁과 같은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헌법 제119조 2항에 담겨진 내용으로 보면, 경제 민주화는 힘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경제 영역에 적용하여 경제력 집중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를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주체 간의 조화와 균형으로 이해하는 경우, 경제 양극화 해소 및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는 경제 구조 개혁 문제와 직결된다. 시민단체들이 요구하고 야당이 공약으로 내건 경제 민주화는 이와 같은 의미의 실질적 경제 민주화에 가까웠다. 이에 비해 경제 민주화를 공정하고 투명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시장 규제로 좁게 파악하는 경우, 경제 민주화는 재벌 총수의 반칙이나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바는 똑같이 경제 민주화를 말해도 정작 그 내용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이 대선 때 경제 민주화 공약으로 담은 내용은 주로 후자와 같은 좁은 의미의 형식적 경제 민주화와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총수 일가 사익 편취 행위 규제,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 등을 경제 민주화 공약으로 내걸었다. 박근혜 정부가 내건 경제 민주화는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고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약에, 국민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공감대가 미흡한 정책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거나 단계적으로 접근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기업 규제에는 투자 위축과 같은 부작용이 있고 이는 경제 활성화를 저해한다는 인식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민주화법 1호는 하도급법 개정이었고,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규제 강화였다. 지난 4월 하도급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적용 범위가 부당한 단가 인하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6월 임시국회에서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징금 부과, 금산분리 강화 등 몇 개의 법안이 통과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하였다. 이 발언 이후 박근혜 정부 국정 운영의 무게 중심은 경제 민주화에서 경제 활성화로 급선회하였다. 물론 전경련과 일부 여당 의원들이 ‘경제 민주화가 대기업을 옥죄고 경제를 위축시킨다’고 반발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만, 박근혜 정부가 좁은 의미의 형식적 경제 민주화만 수용했던 데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의 ‘경제 민주화’와 시민이 열망한 ‘경제 민주화’는 다르다

박근혜 정부가 정책 기조 전환을 모색하면서 지난 대선 때 잠재된 두 가지 버전의 경제 민주화가 그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철학은, 정부의 시장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고 최소화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이 때문에 경제 민주화 입법은 시장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에 대해 경제 민주화를 재벌 총수와 대기업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고 균형 발전을 도모하는 지속적인 경제 개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개혁에 어떤 부작용이 있기에 속도를 늦추고 기조를 바꾸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우며 공약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버전이 대립하는 현 시점에서 지난 대선 때 많은 시민들이 경제 민주화라는 그릇에 담고자 했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서 경제 민주화의 동력은 서민들과 중산층의 생활상의 절박한 요구에서 나왔다. 통제되지 않은 재벌의 경제력과 단기적 이익 추구는 중소기업을 질식시키고 골목상권까지 침범하여 서민의 생계조차 위협했다. 약육강식의 약탈적 생태계에서 재벌의 성장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이익을 희생시킨 ‘나 홀로 성장’이었고 ‘나쁜 성장’이었다. 약육강식의 기업 생태계에서 재벌 대기업의 이윤 독식으로 시장경제의 활력이 소진되어갔다. 실제로 이런 일이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여야 대선 후보 모두 경제 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채택한 것이다.

시장에서 경쟁은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하지만 재벌 총수의 반칙과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몇 개의 법안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경쟁이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슈퍼헤비급 선수와 라이트플라이급 선수가 권투 경기를 벌이는데 규칙만 지킨다고 경기가 공정해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력이 재벌에 집중된 경제 구조에서 경쟁은 원천적으로 불공정하며 이런 경제에서 양극화는 계속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 민주화법 1호로 내세우는 하도급법 개정은 형식적 수준에서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최소한의 법적 조치일 뿐이다. 물론 법 개정으로, 일상적으로 행해왔던 불공정 행위를 하는 데 대기업들은 예전보다는 조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법 개정으로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가 근절되고 우리 사회에서 갑을 관계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교섭력 우위로 납품 단가를 가능한 낮게 결정할 수 있는 수요 독점적 시장 구조 하에서 중소기업이 정당한 대가를 받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교섭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대기업과 협상하여 대기업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어야 문제 해결의 물꼬가 트이고 중소기업과 서민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재벌 개혁 없이 경제 민주화는 없다. 공정 경쟁을 넘어서 과도한 경제력 남용을 규제하고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재벌 개혁은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다. 물론 재벌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재벌의 성장이 자신의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막강한 경제력을 오남용한 결과라면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 재벌 개혁으로 우리 경제를 이끄는 대표 기업의 체질을 건강하게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재벌 개혁의 과제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경제 민주화가 재벌 개혁과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곤란하다. 재벌 개혁 역시 경제 민주화로 가는 긴 여정의 하나일 뿐이다. 재벌 개혁은 경제를 살리고 중산층과 서민의 삶의 질 개선으로 가는 발판이다. 경제 민주화는 재벌의 ‘나 홀로 성장’을 함께 누리는 ‘좋은 성장’으로 바꾸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여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는 재벌의 거듭나기로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고, 국민 모두 성장의 과실을 누리는 성장 모델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많은 시민이 경제 민주화라는 그릇에 담아야 한다고 기대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제 구조 개혁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 입법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했지만, 이런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경제 개혁은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경제 민주화가 많은 시민들이 기대했던 경제 민주화와 어떻게 다르고 또 그 열망을 저버리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꺼져가는 경제 민주화의 불씨를 되살리는 길이다.


※ 본 기고글은 필자가 <프레시안>의 ‘경제민주화워치’ 칼럼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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