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센터 칼럼(ef) 2013-10-01   523

[기고] 가면 벗은 성장론자 박근혜, 국민 우롱하나

[경제 민주화 워치] <10> 슈퍼 갑 횡포 근절하지 않으면 상생은 없다

이상호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정책위원 

국정원 선거 개입과 이석기 의원 사태로 미루어져왔던 정기국회가 9월 30일부터 재가동되고 있다. 여야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이 예상되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가장 큰 경제적 이슈는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민주화 포기와 관련된 내용이 아닐까 싶다. 현 정부의 최근 행보가 경제 민주화라는 ‘가면’을 벗고 경제성장론자로서 현 정권의 ‘본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활성화와 고용 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10대 재벌 회장을 모시고 ‘쇼’를 하고, 수차례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투자 활성화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당연히 없애야 한다고 대통령이 직접 발언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대선 이후 경제 민주화 논쟁은 크게 두 축에서 이루어졌다. 전횡적 총수 지배 체제를 근절하고 경제력의 과잉 집중을 막기 위한 기업 지배 구조의 민주화가 한 축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 축은 소위 ‘갑을 관계’로 대표되는 거래 관계의 민주화이다. 기업 지배 구조의 개혁 없이 경제 민주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 상식이다. 그래서 지분 몇 %로 수십 개의 계열사를 지배하고 주력 산업의 미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벌 체제의 ‘황제적 경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지는 오래되었다. 이와 달리 계약의 위탁자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악용하여 수탁자에게 횡포를 일삼고 불공정 행위를 강요하는 ‘갑을 관계’의 비민주성은 지금까지 제조업의 원·하청 관계에서 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가맹점, 대리점 등 유통업 전반에 만연한 ‘슈퍼’ 갑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거세지고 불공정 행위에 대한 따가운 여론이 형성되면서 ‘갑을 관계’의 민주화를 둘러싼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기보다 책임 회피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국내 편의점 업계 1위인 CU 편의점의 사례를 보자. 본사인 BGF리테일의 일방적인 불공정 거래 행위로 인해 지난 몇 개월간 무려 네 분의 편의점주가 목숨을 잃었다. BGF리테일이 최근까지 밀어내기식 영업 및 강매, 24시간 영업 강요, 허위·과장 정보 제공, 과다 해약 위약금 부과, 영업 지역 미보호 등 온갖 불공정 거래 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슈퍼’ 갑의 대명사가 되었다. 편의점주협의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이 BGF리테일을 가맹사업법 위반 행위로 공정위에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처분 결정은 계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양유업 사태로 불거진 대리점 불공정 행위의 실태는 더욱 심각하다. 약 5개월에 걸친 피해점주들의 끈질긴 투쟁 끝에 남양유업 사태는 상생협약서에 합의하면서 일차적으로 종결되었지만, 다른 업종 대리점 거래의 불공정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진 말길

지난 9월 25일 공정위가 국회에 제출한 ‘본사-대리점 거래 관계 서면 실태 조사 결과 및 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를 보면 과도한 판매 목표량 설정, 제품 밀어내기, 계약 해지 시 과도한 부담 등 본사의 횡포와 불공정 거래 행위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공정위는 지난 2개월간 자동차, 주류, 유제품, 라면, 화장품, 제과, 음료, 빙과 등 8개 업종 상위 23개 업체를 대상으로 거래 유형 및 계약 내용 등을 조사하고 각 업체별 50개 대리점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공정위 조사는 본사 직원의 폭언, 주류 대리점주의 자살 등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대리점에 대한 본사의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사전 실태 조사 차원에서 실시됐다.

이번 실태 조사에서 본사가 설정하는 판매 목표액이 과도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59.5%였고, 본사가 인센티브로 지급하는 판매 장려금이 적정한 수준이라고 응답한 경우는 고작 15.7%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판매 정책으로 본사가 설정한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대리점의 비중은 20%에 그치고 있다. 또한 대리점 불공정 거래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인 ‘제품 밀어내기’에 대해서도 86개 응답 대리점 중 22개가 ‘주문하지 않은 제품을 공급받은 경우가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번 조사를 통해 현행법상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해당하는 ‘신제품 등을 할당하여 판매하는 행위’,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판매하고 반품을 받지 않는 행위’, ‘판매 목표 미달성 시 바로 대리점 계약을 해지하는 행위’, ‘하자 상품의 반품을 거부하는 행위’, ‘대형 유통업체에 파견된 판촉 사원의 임금을 대리점에 전가하는 행위’ 등 불공정 관행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슈퍼’ 갑의 불공정 행위를 감시·감독하고 시정조치를 취해야 할 공정위가 절차상의 규정을 이유로 지금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정위에 제소된 수많은 불공정 행위 신고 건에 대해 ‘계속 조사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공정거래위원장은 현재 국회에 발의된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정안은 불필요하며, 현행 ‘공정거래법’으로 충분히 규제 가능하다고 언론에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박근혜 정부는 올해 초 국정 목표를 제시하면서 ‘원칙이 바로 선 시장경제 질서 확립’을 국정 과제로 설정하고 그 세부 과제로 ‘경제적 약자의 권익 보호’를 내세웠다. 하지만 정권 출범 8개월이 채 되지 않은 현재의 시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돌이켜보면, ‘대선 공(空)약’에 속은 국민들을 다시 한 번 우롱하고 있다는 판단을 떨칠 수가 없다.

아마 이번 가을에도 매 정권 초기마다 반복되던 대중소기업의 상생 협력과 동반 성장을 위한 온갖 ‘퍼포먼스’가 재탕 형식으로 언론을 장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민간 차원의 자율적 합의가 강조될 것이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조치 또한 패키지로 국민에게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슈퍼’ 갑의 횡포를 막고 불공정 행위를 근절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 없이 대중소기업의 상생 협력과 동반 성장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허망한 기대일지 모르지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 본 기고글은 필자가 <프레시안>의 ‘경제민주화워치’ 칼럼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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