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반론] “권 차관보님 같은 합리주의자가 관료의 다수입니까?”

재경부 권오규 차관보님 보십시오

(편집자주)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서 지난 19일, 정부의 재벌개혁 후퇴를 강하게 비판하는 서울대 경제학부 정운찬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데 이어 21일, 재정경제부 권오규 차관보가 이에 대한 반박문이 실리는 등 재벌개혁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이자 정운찬 교수의 제자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권오규 차관보의 글에 대한 재반박문이 오마이뉴스에 다시 실렸다. 사이버참여연대에서 이 기사 전문을 게재한다.

오마이뉴스 보도

  • “한국경제 더 망해야 살 수 있다” – 서울대 정운찬 교수 인터뷰(11/19)
  • “재벌규제 완화 아닌 합리적 개편이다” – 재정경제부 권오규 차관보 반박기고(11/22)

    1. 권 차관보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정운찬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에 대한 권오규 차관보님의 반박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부는 달라진 경제여건에 맞게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편(re-regulation)한 것이지 규제를 완화(de-regulation)한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으신 부분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냅니다.

    ▲ 지난 23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재벌개혁후퇴 막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상조 교수

    우리나라의 관료 중에서 이처럼 올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물론 과거에도 알고 있었지만) 새삼 확인하니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장을 떠나서 경제학도로서 진정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이렇게 글을 띄웁니다. 당돌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2. 합리적 정책관료의 의무

    첫째,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권 차관보님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우리나라 관료 중에서 얼마나 되나요? 특히 정책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시는 고위관료 중에서 말입니다. 저의 이 질문이 대다수 관료들의 전문가적 자긍심을 건드리는 비아냥거림으로 느끼셨다면 사과말씀부터 드립니다.

    저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려야겠군요. 관료조직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제발전 초기에 미약한 시장기능을 대신하는 기업가적 정책관료의 중요성은 세계 유수의 경제발전론 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발전국가 단계의 관료 의식을 지배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중상주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습니다. 한국경제의 규모는 이미 OECD 회원국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커졌고, 세계경제도 이른바 국경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자유주의가 부활했고, 규제완화 내지 폐지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최근 재계의 요구가 이를 대변하고 있고, 관료 중의 일부도 이에 적극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과도기적인 현상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 관료들의 의식에는 과거의 부국강병론적 중상주의와 최근의 규제폐지론적 자유주의가 섞여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솔직히 권 차관보님 같은 합리주의자가 설 땅이 별로 없을 거라는 점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재벌은 과거 중상주의의 최대 수혜자였으며 최근에는 자유주의의 열정적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규제체계의 재설계(re-regulation)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마침내 재벌의 과거 기득권을 보호하고 새로운 욕구에 부응하는 ‘개혁후퇴’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운찬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나 저의 3차례에 걸친 기고문에 담긴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권오규 차관보님. 권 차관보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합리주의자가 관료세계의 소외된 소수가 아니라 책임있는 다수라고 확신하신다면, 정운찬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에 반박글을 쓰신 것의 10배, 100배에 이르는 열정으로 전경련과 한나라당의 규제폐지론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실 의무가 권 차관보님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써 합리적 정책관료가 한국경제의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계속 해오셨겠지만, 지금부터는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십시오. 부탁입니다.

    3. 규제체계 재설계(re-regulation)의 합리적 기준

    둘째, 권 차관보님께서는 11월 15일 발표된 재벌규제정책 개편에 대한 당정협의 결과가 규제체계의 재설계(re-regulation) 원칙에 입각한 합리적인 결정임을 강조하셨는데, 솔직히 저는 그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언론을 통해 일부 보도되기도 했지만, 당일 재계 측에서는 ‘아쉽지만, 만족한다’, 또는 심지어 ‘환영한다’라는 코멘트도 나왔고, 표정관리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후일담도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입 싹 씻고, 규제강화라고 반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정협의 결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재벌지정제도의 기준을 자산 5조 원 이상으로 완화하되, 상호출자 및 채무보증을 금지하는 것 등은 2조 원 이상으로 강화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적극 환영합니다.

    저희 시민단체에서 항상 주장했던 바이지만, 재벌지정제도는 지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지정을 통해 파생되는 규제의 내용이 문제이며, 개개 파생규제의 적합성과 실효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일부는 완화, 일부는 강화’로 큰 방향을 설정하신 것은 정말 올바른 결정이라고 평가합니다. 시민단체가 정부정책을 사사건건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죠? 칭찬에 인색하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민단체의 침묵은 곧 칭찬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완화와 강화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규제는 모름지기 누구나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단순해야 하고, 그리고 보상과 제재의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1월 15일의 당정협의 결과는 이 조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재벌지정제도의 핵심적 파생규제인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보면, 기업경쟁력 강화와 핵심역량 집중 등을 새로운 예외 항목으로 인정함으로써 도대체 이 규제가 무엇을 규제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업인에게 물어보십시오. ‘기업이 하는 일 중에서 경쟁력이나 핵심역량과 관계없는 것이 있는가’라고. 기업인들이 웃을 겁니다. 재계가 왜 표정관리에 애를 먹었는지 아시겠죠? 설마 정부가 그 기준을 정해주시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90년대에 실패로 끝난 주력업체 또는 주력업종 제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중상주의적 인식의 잔재 아닙니까? 아니면 규제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아무 것도 규제 안하는 자유주의의 실체이든지요. 둘 다일 것 같군요.

    그리고 순자산 대비 25%를 초과하는 출자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제한한다고 하셨는데, 이게 제재의 실효성이 있나요? 한 기업이 다수의 계열사에 출자하는 현실에서 개개 계열사의 주주는 어느 주식이 의결권이 제한된 것이고, 어느 주식이 의결권이 허용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공정위가 재벌의 주주총회 때마다 쫓아다니며 지분율을 계산하여 미리 알려주실 겁니까? 혹시 재벌이 25%를 초과하여 의결권을 행사하면, 공정위가 주총결의 무효확인소송을 내실 겁니까?

    어느 계열사의 주총결의를 무효화시킬 겁니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개개 주주를 대신하여 공정위가 모든 문제를 다 책임지는 것이 ‘달라진 경제여건에 맞게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편(re-regulation)’하시는 겁니까?

    규제의 대상도 명확하지 않고, 규제를 지켜봐야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규제를 위배한들 실효성 있는 제재가 따르는 것도 아니면, 뭐하러 이 규제를 하시는 겁니까? 권 차관보님. 정말 권 차관보님 같은 합리주의자가 관료세계의 책임있는 다수 맞습니까?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역시 재벌지정제도의 핵심적 파생규제인 계열금융기관 의결권 제한 문제입니다. 이미 입법예고된 개정안에 따르면, ‘임원임면·정관변경·합병 및 영업양수도 등 경영권 변동관련 사안으로서 신탁재산에 손실발생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 재벌소속 투신사와 뮤추얼펀드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허용한다’로 되어 있는데, 이 법 개정안의 내용을 이해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왜 경영권 변동관련 사안에 대해서만 제한을 푸는 거죠? 손실발생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란 도대체 어떤 경우고, 누가 판단하는 겁니까? 재벌소속 펀드매니저의 판단이 진짜 투자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재벌총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재벌총수의 이익을 위한 경우라면, 현실적으로 개개 투자자가 이를 입증할 수단을 갖고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리고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공정거래법 11조 개정 문제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왜 계속 침묵하시는 겁니까? 권 차관보님. 권 차관보님과 같은 합리주의자가 관료세계에서는 소외된 소수 아닙니까?

    4. 심판자로서의 정부 권위 회복

    마지막으로, 정운찬 교수님과 권오규 차관보님의 논쟁에서 핵심적인 이슈는 ‘재벌이 얼마나 변했나’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죠.

    그런데, 며칠 전에 YTN 보도에 따르면, 삼성그룹에서 이재용 씨와 관련된 인터넷 계열사 부당지원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조작하고 직원들 교육도 시켰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상장회사 이사회 의사록까지 바꿔치기 하면서. 무법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규제체계 재설계의 구체적 내용, 사람마다 주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자로서의 정부의 권위가 이미 땅에 떨어졌는데, 규제체계만 바꾸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번 ‘삼성그룹의 공정위 깔아뭉개기’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엄중한 책임추궁을 요구합니다.

    소관업무가 아니라고 침묵하실 일이 아닙니다. 권 차관보님과 같은 합리주의자라면, 심판자로서의 정부 권위를 복원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기초해서 ‘재벌이 얼마나 변했나’에 대해 신중하게 다시 판단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혹시 제 글에 무례한 표현이 있었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

  •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