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벌개혁, 이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몫입니다.

1. 이제 정부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재벌개혁을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선언하셨을 때는 솔직히 큰 기대를 했습니다. 98년 초에 재벌개혁 5대 원칙이 만들어지고, 99년 광복절 때 ‘5+3원칙’으로 확대되었을 때는 진짜 뭔가를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종합주가지수의 오르내림만으로 경제정책의 성패를 판단하는 재경부가 재벌개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겠습니까.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재경부가 주식투자 손실분을 재정에서 보전해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습니다. 재경부의 의식 수준이 이 정도이니, 재벌소속 금융기관의 계열사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고 나아가 은행마저 재벌에 넘겨줌으로써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허물어뜨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재벌이 불공정거래행위 조사를 물리력으로 방해해도 제재는커녕 큰 소리 한번 못치는 공정위가 재벌개혁을 추진할 힘을 갖고 있겠습니까.

경제검찰이라는 공정위가 조사 이틀 전에 상장법인의 이사회 의사록까지 바꿔치기한 삼성그룹의 위법행위를 적발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공정위의 위상이 이 정도이니, 출자총액제한을 위반해도 실효성 있는 제재수단도 없고 적용대상보다 예외조항이 더 많은 누더기 법률로 공정거래법을 전락시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 정부 하에서는 이제 새로운 재벌개혁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해왔던 거나마 폐기하는 개악만은 막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헌법기관인 개개 국회의원들의 몫입니다. 개개 국회의원들의 양심적 판단, 재벌개혁의 후퇴를 막는 최후의 보루이며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는 최후의 안전판입니다.

2. 증권집단소송제의 조기 입법화 : 기업 스스로를 위한 투자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가 두 쪽이 났다고 합니다. 지식인들 사이에 생산적 토론과 합의의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증권집단소송제의 조기 입법화가 그것입니다.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증권관련 법학자, 금융학자, 판사, 변호사, 그리고 현업 종사자들에 이르기까지 증권집단소송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국민적 합의를 이룬 사안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법무부 시안보다 훨씬 확대·강화된 형태로 조기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다수 의견입니다. 이제 도입 여부를 둘러싼 논의는 접어야 합니다.

재계는 여전히 증권집단소송제의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데, 많은 부분 당해 법률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남소를 우려하는 재계의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 제도 자체의 실효성에 의문이 생길 정도로 각종 남소방지장치가 삽입된 것이 현실입니다. 시민단체로서는 크게 우려하고 있지만, 생소한 제도의 도입인 만큼 차차 개선해 가자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자산 2조원 이상으로 대상기업을 제한한 분식회계와 허위공시의 경우 최소한 향후 대상확대를 위한 일정(scheduling)을 명시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분식회계나 주가조작 등의 위법행위가 발생했을 때 최대의 피해자가 누구입니까. 물론 투자자도 피해를 보지만,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기업 자신입니다. 대우그룹이나 이용호 게이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증권집단소송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용이 발생하겠지만, 이것은 그냥 낭비되는 비용이 아니라, 경영투명성을 제고함으로써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그리고 그 최대의 수혜자는 바로 기업입니다.

지난 11월 17일에 증권집단소송법안이 입법예고되었습니다. 정기국회 기간 내에 처리하기에는 일정이 너무 빠듯합니다. 우리 나라 증권시장의 발전에 기념비적 이정표가 될 증권집단소송제의 조기 입법화를 위해 국회의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부탁드립니다.

3. 재벌지정제도와 출자총액제한제도 : 심판자의 권위를 포기한 현 정부, 결국 다음 정권도 불행한 운명을 맞을 겁니다.

지난 11월 15일 재벌지정제도 및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한 당정협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그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정부가 심판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경기의 규칙(rule of game)을 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심판자입니다. 심판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도록 단순·명쾌하게 규칙을 정하고, 그리고 규칙을 준수한 사람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규칙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엄격한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11월 15일 당정협의 결과는 이 모든 조건을 결여한 것입니다.

적용대상보다 예외조항이 더 많은 규제가 무슨 규제입니까. 기업 경쟁력 강화, 핵심역량 집중, 심지어 공기업 인수 경우까지 예외로 인정되었는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출자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25% 초과분에 대한 의결권 제한? 이 제한의 실효성을 누가 담보합니까. 한 기업이 여러 계열사에 출자하고 있는 현실에서, 개개 계열사의 주주는 어느 주식이 의결권이 제한된 것이고 어떤 주식이 의결권 행사가 허용된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공정위가 주주총회 때마다 쫓아다니며 감시할거며, 위반사례가 적발되면 공정위가 주총결의 무효확인소송을 낼 겁니까. 주주총회 때마다 계열사 지분을 조정하는 장난을 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정부가 심판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할 때 그 효과는 비단 재벌지정제도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데 그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제 정부의 규제를 성실히 이행할 순진한 재벌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버티고 로비하고 협박하면 모든 규제가 무력화될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제 한국의 시장은 규칙도 심판자도 없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음 대선에서 어느 정당이 승리하든 간에 관계없이, 그 정권은 불행한 운명을 맞을 겁니다.

정부가 스스로 포기한 심판자의 권위,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장경제의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4. 계열금융기관 의결권 제한 : 손실발생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 이런 법도 있습니까.

드디어 이 정부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재벌소속 금융기관이 저축자의 돈으로 산 계열사주식을 재벌총수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사용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겁니다. 다른 정부도 아니고, ‘재벌개혁을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한 그 정부가…. 절망입니다.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기관투자가가 보유주식의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산업자본과 분리된 금융자본의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재벌소속 금융기관은 저축자에 대한 의무(충실의무 및 선관주의의무)와 재벌총수에 대한 의무(경영권 방어) 사이에서 이해상충의 문제(conflict of interest)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기능이 성숙되었다면, 우리 나라에는 더 이상의 재벌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해당법률 개정안들의 내용이 가관입니다. 공정거래법(제11조) 개정안의 경우 내부지분율이 30% 미만인, 즉 재벌총수의 지배력이 미약한 상장계열사의 경영권 변동관련 사안에 대해서만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겠다고 합니다. 허참….

또한 증권투자신탁업법(제25조의2) 및 증권투자회사법(제31조) 개정안의 경우 경영권 변동관련 사안으로서 신탁재산에 손실발생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에 대해서만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실제로 손실발생이 명백히 예상된다면, 이해상충의 문제가 있는 계열투신사나 계열뮤추얼펀드가 나서지 않아도, 당해 회사의 주주가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외부주주가 이익발생을 기대하면서 독립적 사외이사의 선임을 요구하거나 적대적 M&A를 시도하는데, 계열투신사나 계열뮤추얼펀드가 손실발생이 예상된다며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입니다. 결국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고, 장기간의 경영공백이 불가피할 겁니다. ‘명백한’ 손실발생 ‘예상’? 이것만큼 명백하지 않은 조건도 없을 겁니다. 이런 엉터리 법이 만들어진다면, 국회의원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진정 이해상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기능이 성숙되었다고 판단하신다면, 모든 기업의 주총결의사항 전부에 대해서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을 고치십시오. 차라리 그것이 더 깨끗합니다. 아니라면, 이 법의 개악을 막아주십시오. 이 법들이 통과되면, 재벌총수의 경영권은 그야말로 철옹성이 됩니다. 그리고 재벌의 금융업 진출 인센티브를 강화함으로써 산업자본의 금융자본의 분리원칙을 붕괴시킬 겁니다.

5. 은행법 개정 : 최소한의 지배구조 개선장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재벌에게 은행을 맡기실 겁니까.

긴 말 필요 없습니다. 이번 재경부의 은행법 개정 시도는 은행산업의 경쟁력 제고와는 무관한 것이며, 단지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졸속 조치입니다.

공적자금 회수,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은행의 건전한 소유·지배구조 구축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상충되는 두 가지 정책목표를 조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의 책무일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적자금 회수 일정에 관한 정치적 합의 도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계적 동시불황에 대테러 전쟁의 불확실성이 겹친 현 상황에서 은행주식의 조기매각을 통한 공적자금 회수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은행을 재벌에 넘기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은행민영화 및 공적자금 회수 일정과 관련하여 IMF와 재협의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십시오. IMF 졸업했다면, 이런 요구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은행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지불결제체계(payment system)의 핵심을 이루는 은행이라면 일반 기업보다 훨씬 강화된 지배구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 참여연대는 이번 정기국회에 주주대표소송의 단독주주권 인정, 그리고 집중투표제의 의무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은행법 개정 입법청원안을 이미 제출하였습니다. 주주대표소송은 승소하여도 손해배상금이 소 제기자가 아닌 회사에 귀속되는 공익소송이며,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대주주 및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재계에서는 반대할 겁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정도의 지배구조 개선장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은행의 대주주가 되겠다고 나설 자격이 없습니다. 경영감시의 사각지대에서 은행을 사금고화하겠다는 말밖에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참여연대가 제출한 입법청원안이 제도화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센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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