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 빗나간 재벌체제 옹호론

외환위기 이후의 개혁과정을 통해 재벌의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 체제는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불법대선자금이나 SK글로벌 사태에서 보듯이 재벌이 선진대기업으로 환골탈태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경기침체를 빌미삼아 재계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금융계열사의결권 고수 등을 요구하며 재벌개혁을 저지하고 과거 재벌체제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 와중에서 진보적 이론가로 평가받던 일부인사들도 이런 움직임에 한몫 거듬으로써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들의 지적 중엔 과도한 개방에 대한 비판처럼 경청할 부분도 없지는 않다. 또 국내기관투자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재벌개혁론자와 같은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개혁을 영미식 자본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의 추종으로 매도하고, 경영권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재벌개혁이 최근 경기침체의 원흉인 것처럼 묘사하는 이들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첫째로, 재벌개혁이 영미식자본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의 추종인지를 검토해보자. 재계에서는 예전에 재벌개혁이 反자본주의적이라고 반대하는 논조가 강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선 얼마 전 현명관 전경련부회장의 발언에서 보듯이 그와 정반대로 재벌개혁은 영미식 스탠더드의 강요고 우리는 우리식으로 가야한다는 식의 주장이 부상했다. 색깔론만으론 잘 안 먹히니 사이비민족주의에 기대는 것이다. 급하면 반일관제데모를 조장했던 친일파 박정희의 수법이다.

재계는 원래 상대적으로 해고가 용이한 영미식자본주의를 찬양해왔다. 그러다 재벌개혁에 부딪치면서 갑자기 우리식(재벌체제)을 내세운 것이다. 일부 진보논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면서 우리식(개발독재 및 재벌체제)을 높게 평가하다 대륙유럽식 지지를 가미하고 있다. 어쨌든 둘 다 재벌개혁을 영미식 추종으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점에선 동일하다.

그런데 재계든 일부 진보논자든 다 실체가 아닌 허수아비를 공격하고 있다. 가장 철저한 재벌개혁의 사례가 일본인데서 드러나듯이 재벌개혁을 영미식의 추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재벌개혁이 반자본주의라는 주장이 맥아더가 일본의 재벌해체를 시행한 사실에서 부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재벌개혁을 위해 도입한 몇몇 제도가 미국제도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외이사는 경영진의 견제라는 점에서 독일의 감독이사와 성격이 같으며, 미국의 집단소송제처럼 유럽에도 단체소송제가 존재한다. 일본에도 주주대표소송제가 단독주주권이라는 훨씬 강력한 형태로 존재한다. 또 우리나라에선 재벌개혁 과정에서 유럽처럼 은행의 재벌규율 기능이 강화된 측면도 있다. 요컨대 재벌개혁은 영미식 요소를 도입하긴 했지만 대륙유럽 및 일본식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도입된 영미식 요소가 무조건 나쁘냐 하는 점이다. 소수주주권, 사외이사제, 집단소송제는 총수 즉 지배주주 1인의 이익을 위해 다수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태를 규제한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제도이다. 미국에서 노동자의 고용이 불안해지고 분배가 악화된 것은 소수주주권과 같은 제도 때문이 아니라 노조의 낮은 조직률과 취약한 사회보장제도 탓이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겨선 안 된다.

그리고 재벌개혁을 거부하는 논리로서 영미식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배구조에 정답은 없다는 주장도 횡행한다. 물론 우리가 특정 국가의 제도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이식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권을 탄압한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나 북한의 우리식이 역사적 오류였음은 분명하다.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처럼 선진지배구조의 대원칙인 경영의 투명성, 책임성, 전문성이라는 정답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일부 진보논자가 주장하는 대륙유럽식 또는 일본의 이해관계자자본주의는 수용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대륙유럽이나 일본의 대기업은 재벌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선진체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경영권의 안정을 위해 재벌개혁에 반대하는 논의를 따져 보자. 한때 정부나 일부 보수적 인사들은 재벌개혁은 시장에 의해 이뤄져야 하고 그것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활성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본시장 개방 이후 외국인의 보유주식이 주요 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이런 목소리는 사그라졌다.

경영진이 온통 경영권 방어에만 신경써야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경영의 안전성확보가 지나쳐서 재벌체제에서와 같은 경영의 무책임성을 가져와서는 곤란하다. 왕조체제에서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하면 국정이 상대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다. 지도자 지위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재벌체제에서 선진기업체제로 발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투기적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위협에서 벗어난답시고, 순환출자를 통해 가공자본을 형성하거나 금융기관의 고객 돈으로 장난치려 해선 안 된다. 차라리 재벌계열사가 아닌 기관투자가를 적극 육성하고 민주적 우리사주조합을 활성화해서 이들이 안정적 대주주 역할을 하되 필요한 경우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울러 경영자가 챙길 수 있는 불법적 변칙적 이득을 경영투명화를 통해 없앰으로써 경영권을 둘러싼 공방의 소지를 줄여야 한다.

셋째로, 재벌개혁이 경기침체를 초래한 원흉이라는 주장은 어떤가. 먼저 재벌개혁이 기업가정신을 쇠퇴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자본주의발전의 추진력인 기업가정신은 당연히 고무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익은 주로 총수가 챙기고 손실은 주로 일반주주와 국민에게 떠넘기는 ‘사기꾼정신’과 능력도 없으면서 총수자리에 앉아 함부로 기업을 경영하는 ‘노름꾼정신’을 기업가정신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아울러 재벌개혁은 총수 1인만의 기업가정신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경영진 및 경영진을 장래목표로 삼는 다수구성원의 기업가정신을 발휘시키려는 것이다.

한편 재벌개혁이 기업투자를 저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대마불사의 신화가 사라짐으로써 무분별한 투자가 자행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그 점에서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리고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투자를 저해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공정위의 발표에 따를 때 별로 근거가 없다. 이 제도엔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예외가 설정되어 있다.

재벌총수들이 경영권을 상실할까 불안한 나머지 투자를 꺼린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투자부진 원인에 대한 실증분석도 없는 막연한 추측이다. 많은 재계 인사들 스스로가 지적하는 투자부진 요인은 우리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 등 전혀 다른 요인이다. 그리고 투자가 부진한 주된 부문은 재벌 쪽보다는 중견ㆍ중소ㆍ벤처기업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의에서 재벌체제 옹호론의 허구성은 분명해진 듯싶다. 사실 재벌체제 옹호론은 재벌체제에 아부함으로써 재벌기업을 망치는 이론이다. IMF사태가 이를 웅변한다. 반면에 재벌개혁론은 재벌을 거듭나게 함으로써 모두가 윈-윈이 되는 게임이다. 어떤 선진식이 되더라도 황제경영과 선단문어발경영의 재벌체제는 사라져야 한다. 외국자본에 재벌이 넘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통해 도산확률을 낮춰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미진했거나 후퇴했던 재벌개혁에 다시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이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 경제학)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